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태양력입니다.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시간 계산법이죠. 굳이 태양력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다른 계산법이 존재하기 때문인데요. 대표적으로 우리나라가 음력을 사용하죠. 물론 우리나라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요. 중국을 비롯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중화권 국가들이 음력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음력을 중국력이라고도 부릅니다. 유대민족에게도 이와 같은 시간 계산법이 있는데요. 유대력이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날짜의 계산법뿐만 아니라 시간도 다른데요. 그래서 성경에 나와 있는 시간은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과는 사뭇 다릅니다. 가령, 우리는 밤 12시를 기준으로 하루를 정하죠. 그러나 유대인들은 해가 지는 시간이 바로 하루의 끝입니다. 그래서 하루가 해가 지는 시간에서 시작해서 다음 날 해가 지는 시간까지가 하루인 셈이죠. 굳이 우리의 시간으로 따지면, 오후 6시쯤 시작해서 다음 날 저녁 6시까지가 하루인 셈이죠. 그래서 성경의 시간은 이해가 좀 어렵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에 새롭게 번역되는 현대어 성경들에서는 유대의 시간을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으로 고쳐 번역해 놓기도 하죠. 우리가 읽는 새번역도 시간만큼은 고쳐놓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성경의 시간을 쉽게 구분하는 법을 알려드리면 이렇습니다. 시간이 많이 나오는 예화가 있는 데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품꾼들의 이야기죠. 포도원 주인이 품꾼들을 부르는 데요. 개역성경에는 각각 제3시와 제6시, 그리고 제9시와 제11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는 도대체 몇 시인지, 오전인지 오후인지 헛갈리죠. 유대의 시간법으로 적은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익숙한 시간으로 고치려면 여기에 6을 더하면 됩니다. 그래서 제3시는 오전 9시가 되는 것이죠.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품꾼이 제11시라고 했으니 6을 더하면 17시, 즉 오후 5시가 되는 셈이죠. 그러고 보니 오전 9시에 일해서 6시까지 일하면 9시간을 일한 것이 되는군요. 그런데 오후 5시에 들어와 한 시간 일하고 같은 품삯을 받는다면 열불이 날만도 하네요.^^
유대의 달력은 더 독특합니다. 더 헛갈리게 하는 것은 고대 유대력과 현대 유대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상에 나오는 달력과 현재 이스라엘이 사용하는 유대력이 다른 것이죠. 아무튼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유대력을 기초로 하겠습니다. 이 고대 유대력에서 1월은 태양력으로는 3~4월에 해당합니다. 음력으로 1월, 그러니까 구정이 태양력에서는 2~3월에 해당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음력은 달의 움직임에 기초하여 1월을 정한 반면, 성경의 유대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신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하죠. 유대력은 그래서 절기와 함께 달력이 형성됩니다. 그러니까 유월절을 기점으로 한 시기, 현재로는 부활절을 기점으로 한 지금의 시기가 1월인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 일곱 번째 달, 즉 7월이라는 말이 나오는 데요. 조금 전에 언급한 바대로 하면, 이 7월은 태양력으로 9~10월에 해당하는 달이 됩니다. 그런데 이 7월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쩌면 더 헛갈릴 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현재 이스라엘의 정월이 바로 이 7월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의 9~10월에 해당하는 때 이스라엘은 정월이 되는 셈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력의 7월에는 많은 절기들이 겹쳐있습니다. 7월의 시작은 나팔절로 시작합니다. 나팔절은 성경 상에서 제2의 정월이라고 표현할 만큼 중요한 절기인데요. 이날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공동체를 소집하는 날이죠. 나팔을 불어 모든 공동체가 모이도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거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이행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절기는 대속죄일이 있습니다. 죄 씻음을 선포하는 회개의 날입니다. 그리고 일주일간 초막절을 지냅니다. 초막절은 장막절, 수장절이라는 다른 표현으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지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때를 기념하는 것으로 감사의 절기죠.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초막절을 실제로 지냅니다. 집에서 나와서 운동장 같은 곳에서 천막을 짓고 일주일을 살죠. 심지어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아파트 베란다에 텐트를 치기도 합니다. 그만큼 광야에서 살았던 그때, 그날을 기억하는 것이죠.
오래전 제가 중국에서 사역할 때입니다. 첫째 아이인 상민이가 이제 막 무엇을 잡고 일어나는 어린아이였을 때입니다. 저는 중국에 살았지만 중국선교사는 아니었거든요. 아시다시피 저는 북한 땅을 위한 사역을 했습니다. 그래도 중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함께 교제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중국 대학에 유학 온 한국 학생들이 그랬고, 중국 유일의 조선족 신학교의 신학생들이 그랬으며, 북한 선교를 위해 함께 동역했던 중국 사역자들이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주 우리 집에 모였는 데요. 모이면 주로 떡국이나 국수 같은 것들을 끓여 먹었습니다. 정말 그 당시 국수는 원 없이 먹어봤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제 막 움직이는 상민이에게는 그런 음식이 위험했습니다. 중국의 국그릇이라는 것이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 그런 그릇이었거든요. 그래서 건드리면 쉽게 넘어지는 그런 구조의 그릇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상민이는 뜨거운 국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는 터라 주의를 주곤 했는데요. 일이 터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어수선한 가운데 집사람은 떡국을 끓이느라 여념이 없었고, 저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죠. 그러는 사이 떡국은 한 그릇씩 식탁에 올라왔고요. 그 식탁 다리를 붙잡고 일어서는 상민이를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힘차게 일어선 상민이는 그만 식탁 위 떡국 그릇을 잡다가 그 뜨거운 국물이 팔 위로 쏟아졌죠. 내복 바람이었던 상민이는 그 내복이 살에 다 붙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상민이는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화상에 오소리 기름이 좋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고, 중국이기에 순수한 오소리 기름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죠. 그리고 그 기름은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는 사실도 알았죠.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얼마나 아팠으면 자면서도 상민이는 오소리 기름을 바른 손을 든 채 잠이 들었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이후 큰 아이에게는 결코 뜨거운 것에 손을 대지 않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바로 학습효과인 셈입니다. 상민이는 그 이후, 뜨거운 것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화상의 경험이 고통이었겠지만 어쩌면 그 고통으로 인해 더 큰 고통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은혜인 셈이지요. 고통 앞에서 우리의 심령은 한없이 약해집니다. 어려움 앞에서, 두려운 현실 앞에서, 닥쳐오는 고난들 앞에서 우리의 믿음은 사그라지고 아파오죠. 더 나아가 억울함과 불평들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노예로 끌려가야 했던 요셉이 그랬을 것이고, 나라를 잃고 타국의 노예로 전락해야 했던 이스라엘이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명색이 하나님의 백성인데요. 수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너희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는 놀림을 받아야 하는 신세가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함이 더 귀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래서 잃었던 나라가 더 소중하게 다가왔을지도 몰라요. 잃어봐야 귀한 것을 안다고 했나요? 어쩌면 고통이나 고난은 우리를 더 큰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는 지름길인지도 모릅니다.
중국 이야기가 나온 김에 중국 땅의 교회에 대해 한 가지만 더 이야기를 나누겠습니다. 제가 살았던 중국의 심양에는 중국에서 가장 큰 조선족 교회가 있습니다. 시타교회라는 곳이죠. 이 교회가 조선족 교회의 중심이라 할 만합니다. 그 교회에 아까 말씀드렸던 중국 유일의 조선족 신학교인 동북신학교가 있죠. 그런데 지금은 현대식으로 크게 건물을 지었는데 그 옆에는 자그마한 목조건물로 된 옛 교회건물이 기념교회처럼 있습니다. 이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17년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찾아보니 그 목조건물교회로 새롭게 지었더군요. 그런데 이 교회가 중국문화혁명 당시 폐쇄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교회를 책임지고 있던 오애은 목사는 잡혀갔습니다. 오 목사님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목사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고깔모자를, 목에는 죄인 명패를 달고 결박된 채, 홍위병들에 의해 거리를 이리저리 끌려다녀야 했습니다. 그렇게 조롱거리가 되었죠. 나이가 든 교인들은 못질 되어 들어갈 수 없는 교회 문앞에 모여 돌을 맞아가며 예배를 이어갔습니다. 그렇게 10년을 말이죠. 그러다가 문화혁명이 끝나고 교회의 재산이 환원되었지만 정부는 교회의 문을 열어주지는 않았는데요. 이제 나이가 들어 연로해진 할머니 교인들은 중국 정부에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그 교회에 들어가 보고 싶다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 간절한 애원에 못 이겨 중국 정부는 딱 한번을 전제로 교회 문을 열어주었는 데요. 다 쓰러져가는 교회 2층에 올라간 할머니들이 그 자리에 다 들어 누웠답니다. 죽기 전에는 이 교회에서 나가지 않겠다고 말이죠.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시위 아닌 시위를 했데요.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중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허가를 받아냈습니다. 제가 이 교회에 처음 갔을 때 너무 놀랐습니다. 첫 번째는 많은 숫자에 놀랐는 데요. 수천명의 교인이 가득 모여 예배하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또 놀란 사실은 그들이 주일에 2시간 전부터 와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것도 몇 명이 아니고요. 거의 대부분, 수천 명이 주일 오전 9시 이전에 거의 다 모입니다. 그들의 집이 가까운 것도 아니에요. 어떤 할머니는 한 시간을 넘게 걸어서 교회를 온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배가 시작되는 11시까지 찬송가 성경을 읽습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찬송이 시작되고, 인도자도 없이 사람들이 나서 성경을 봉독합니다. 저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순서가 없답니다. 그들은 그렇게 자발적으로 예배하고 있었어요. 그중에 친분이 있는 할머니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분은 교회에서 사무 봉사를 하시는 분이었는 데요. 저와는 신학생들을 돌보는 사역을 같이하셨죠. 왜 이렇게 일찍 교회에 오시냐고 물으니 이런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예배를 드리고 싶어도 드리지 못하는 시절을 살아 본 우리는 예배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격스러워 그런다”고요.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맨 처음 한 것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바로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의 이스라엘은 이 기점을 이스라엘의 정월로 설정했던 것이고요. 이것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 새 출발의 힘은 그들의 고난에 있습니다. 새로운 예배의 시작은 주님을 잃었던 시절을 상고하는 데 있고요. 그들의 기쁨은 이전 하나님께 묶였던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간섭이 싫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소견대로 하기를 즐겨했고, 때로는 대놓고 하나님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죠.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기 싫어합니다. 주님께 복을 받는 것은 좋아하지만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는 싫어하죠. 주님에게서 단물을 빨아 먹는 것은 좋아하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사명에 대해서는 눈을 감습니다. 때론 주님이 곁에 안 계셨으면 하고, 때로는 주님을 걸림돌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세상이 자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타국의 왕들이 자리하게 된 거죠. 주님의 말씀을 피했더니 세상의 간섭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피했더니 지배자의 명령이 나를 짓누른 것이죠. 여러분, 아십니까? 내가 편하자고 주님의 낯을 피하면 우리는 사탄의 낯을 대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자유롭자고 주님의 계명을 피하면 우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세상의 지독한 경쟁논리가 내게 명령하는 세계에서 살게 될지도 몰라요.
영적 재건의 출발은 예배입니다. 그것도 다시 찾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 말입니다. 죽음에서 건져진 예배 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의 첫 행동은 예배입니다.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시작합니다. 예배가 나의 출발점입니다. 지난 주간 매일 묵상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십일조에 대해 묵상을 하며 그렇게 고백했죠. 십일조의 정신은 내가 주님께 1/10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게 9/10를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일부를 드리는 사건이 십일조가 아니라 전부 드린 내게 다시 돌려주시는 사건이에요. 이것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고백입니다. 예배는 내가 주님께 돌아왔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예배를 그렇게 만드세요. 지난주 금요일, 혹시 가정예배를 드리셨습니까? 저는 가정예배를 위한 자료집에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자녀와 함께 드리는 기도시간에 여러분은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리라는 것을 믿고 기도하냐고요. 가식적인 것을 다 내려놓고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기도하면서 이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리라고 믿고 기도하십니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기도하시나요? 그 마음을 함께 기도하는 자녀들이 압니다. 아버지가, 엄마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는 이가 그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시리라 믿는 믿음의 기도를 하는지 아니면 그냥 하는 기도인지 안다고요. 자녀를 축복하는 기도는 여러분이 무슨 말을 해서 능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믿음이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 믿음을 보고 자녀들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첫 시간은 예배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여도 주님 앞에서 예배를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예배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여전하실 것입니다. 그 사랑은 사람을 가리시지 않고, 그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아세요? 아무리 사랑이 넘쳐도 예배를 잃은 사람은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주셔도 예배가 없는 사람은 그것이 은혜인지를 몰라요. 은혜가 은혜인지도 모르고, 사랑이 사랑인지도 모르는 사람은 은혜와 사랑이 넘쳐도 메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혼자라고 여길 수밖에 없고, 누구도 돕는 이가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어요. 예배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내 생각과 가치관을 내려놓고 주님 말씀 앞에 겸손이 무릎 꿇는 것이 그래서 중요해요. 주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사랑을 받고 있는지, 내가 어떤 은혜 아래 있는지를 모른다면 사랑과 은혜의 유무와 상관없이 그 영혼은 메마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압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내가 서 있는 이유가 주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고요. 예배가 지속되어야 감사한 일들이 보입니다.
문제가 있으십니까? 회복을 꿈꾸십니까? 예배를 회복하십시오. 모임과 회개, 그리고 감사가 있는 예배를 회복해야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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