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 둘째 아들은 자신에게 상속될 재산을 미리 받아서 아버지 곁을 떠나죠. 소위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 본문입니다. 탕자의 비유 본문이라고 바로 말하면 다 알아들으실 텐데요. 굳이 알려져 있는 탕자의 비유라는 말을 제가 쓰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그 제목이 정확한 제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틀린 제목일지도 모릅니다. 탕자의 비유라고 하는 제목으로 인해 우리는 이 본문에서 둘째 아들에게만 집중하게 되는데요. 성경에서 예수님은 사실 둘째 아들의 경우만을 탕자로 말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냥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집 나간 둘째 아들에 대해 말씀하고 싶으셨다면 아들이 둘일 필요가 없었겠죠. 재미있게도 예수님의 비유에서는 두 아들이 나오고, 그 아들은 대비됩니다. 하나는 아버지 곁에서 성실히 일하는 일꾼으로,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떠나 혼자 허랑방탕한 삶을 사는 난봉꾼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마치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예수를 믿는 신자들과의 대비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죠.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첫째 아들은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이유는 자신이 한 일들 때문이죠. 자신은 늘 아버지 옆에서 성실히 일을 했지만 둘째는 혼자 자기 좋은 생활을 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둘째 아들을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환대를 합니다. 그 일에 큰 아들은 부아가 났습니다.
사실, 이런 큰 아들을 보면서 우리는 큰 아들의 인성을 탓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인성은 오늘날 우리의 인성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아주 비근한 예가 있지요. 일찍이 우리는 예수를 믿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뜻에 따라 쉽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과 긍휼로 살았습니다. 남을 위해 살고, 베풀며 살았죠. 그런데 주위에는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호사를 누리죠. 남이 굶건 말건, 남이 아프건 죽건 그들은 자기만의 유익을 위해 살아가죠. 그런 그들이 죽기 하루전, 너무 예화가 단적인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예화라는 것이 극단적일수록 더 감이 오니까요. 죽음을 눈 앞에 두고는 예수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아는바와 같이 예수를 영접한 그는 아버지의 집에 초대를 받게 되겠지요. 이런 상황이 주어지면 우리는 썩 기분이 좋지는 않습니다. ‘나는 뭐지?’ 하는 기분이 들죠. 큰 아들이 딱 그런 기분입니다. 더 거칠게 이야기해서 악인에게도 의인에게도 똑같이 해와 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예수 믿은 것에 대한 보상을 생각하는 우리는 주님의 보편적이고 긍휼한 사랑과 은혜를 이해하기 힘들죠.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에서 그런 믿는 우리의 모습 조차도 탕자일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다른 제목은 잃어버린 아들들의 비유가 되죠. 그러나 이 또한 정확한 제목은 아닙니다.
우리의 선행,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긍휼은 사명이지 업무가 아닙니다. 우리의 업무은 보상을 받죠. 우리가 하는 일, 이루어 낸 업적들은 우리의 성과로 채워집니다. 그것을 저는 업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사명은 그런 보상과는 다른 것입니다.
올해 우리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했는데요. 개인적으로 3.1운동은 제게도 인연이 있습니다. 얼굴 한 번 뵌 적이 없는 저희 할아버지는 평안북도 덕천에서 꽤 사는 부호셨다더군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1919년 3.1운동 당시 평북지역 운동 자금을 댔다는 이유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시고 8년간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자식이라고는 하나뿐인 저희 아버지는 갓난 아이였고요. 모든 논밭과 재산은 몰수를 당하셨답니다. 왜 이들은 그런 수모와 어려움에도 독립만세운동을 했을까요? 이것을 하면 누군가에게 보상을 받을 것을 염두에 두고 했겠습니까? 그들은 피끓는 조국에 대한 애절함으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독립을 외친 것이죠. 우리는 이것을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자녀로 사는 것을 업무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다시말해, 그리스도인으로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죠. 그러나 대한민국의 백성이라는 것만으로 너나 할 것 없이 독립만세를 외쳤듯이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그분의 자녀인 것만으로도 사랑을 외치고, 긍휼을 외치며, 그리스도의 공의와 공평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 진정한 자녀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쩌면 큰 아들은 그런 착각 속에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들로서의 모든 일과 행동은 자녀로서의 사명이 아니라 업무였다고 말이죠. 모든 것이 계산 되어야 하고, 대가가 있어야 하는 업무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순종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말씀은 또 다른 시각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아들도 아니고, 둘째 아들도 아닌 아버지의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한번 읽어보세요. 아버지는 큰 상처를 받았을테지요. 유산이라는 것이 아버지가 돌아가셔야 받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둘째 아들은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합니다. 그 말은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죽었다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유학이나 여행이 아닙니다. 완전히 떠난 것이죠. 아버지를 죽은 셈 치는 아들의 떠남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은 어떨까요? 뿐만이 아니죠. 큰 아들은 둘째가 그리 떠난 이후에 달라졌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기 때문이죠. 어쩌면 그 불만은, ‘왜 나는 지금 유산으로 주지 않느냐’에서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둘째에게 떼어준 유산 때문에 가세는 반쪽이 났겠죠. 재산이 현금이 아닐바에는 토지와 가축들을 팔아야 했겠죠. 그 기울어진 가세를 책임져야 하는 큰 아들로서는 마치 뒷치닥거리 하는 기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말은 안 하지만 퉁명스럽게 일하는 큰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가슴이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는 둘째가 떠나는 순간부터 자신에게 전부였던 두 아들 다를 잃었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 뿐만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비유를 들은 이들은 이 비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당시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요구할 분위기의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당시 부모는 자식의 목숨을 좌우할 힘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가부장적인 시대가 있었습니다만 중동의 가부장은 우리나라에 대할 바가 아닙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하늘을 찌릅니다. 아버지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된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사는 이들이 이 비유를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어쩌면 어떤 이들은 의아해 하고, 어떤 이들은 조소를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조금 전 말한대로 이 비유의 아버지는 아들에 의해 목숨이 찢기는 아버지입니다. 그것은 당시 시대상으로 보면 부권의 침탈이고, 아버지에 대한 모욕이며 수치죠. 이것은 당시 상황에서 보면, 심하게 말해 반사회적이고, 반상식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그런 모욕과 수치를 그대로 당하십니다. 그것도 아들에게 말이죠. 왜 일까요? 왜 예수님은 그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물론 그 의미를 정확히 저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말씀 속에서 한 가지 유추는 가능합니다.
성경은 아들이 돌아오는 장면을 아버지가 목격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직 먼발치인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달려갔다고 되어 있어요.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은 아버지가 매일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며 동구 밖 먼 산에서 떠난 아들이 돌아오길 기다렸을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그랬는지 성경은 정확히는 기록하고 있지는 않지만 상당부분 근거가 있는 추측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뜻이죠. 상당히 이율배반적이죠. 유산을 떼어 떠나보낸 것은 무엇이고, 또 돌아올 것을 기다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런데 이 장면에 대한 의문이 오늘 본문 에스라를 통해 저는 해답을 얻었습니다.
제게는 많지는 않지만 대학시절부터 모이는 절친한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오래 전 유학을 떠나 미국에 정착한 친구들도 있죠. 가끔 귀국해서 만나게 되면 다들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열망을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자녀들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뿌리 내린 곳을 쉽사리 박차고 오기가 힘든 거죠. 어느 친구는 자녀들이 한국말을 잘 못하기도 하죠. 10년~20년이 지나도 그 자리를 떠나오는 것이 힘든데, 아무리 포로생활이지만 삶의 터전으로 삼은지 70년입니다. 시쳇말로 강산이 변해도 7번은 변했고요.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세대가 두 번 바뀌는 시간입니다. 이미 이스라엘민족이 살았던 땅, 예루살렘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을 시기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내려가라는 말에 순종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은 성경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갈바를 알지 못하고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이집트의 오랜 생활을 뒤로 하고 떠나야 했던 일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명처럼 이어집니다.
이러저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일어났습니다. 오늘 본문 5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주님의 성전을 지으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길을 떠날 채비를 하였다." 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실 그렇습니다. 바벨론의 70년은 하나님의 잠시 맡기신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잠시의 기간입니다. 거기가 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거기가 익숙한 곳, 거기가 살 곳이라 여깁니다. 성경은 우리의 인생이 잠깐 보이다가 사라져가는 안개(약4:14)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인생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놓고 싶지 않고, 그래서 버리고 싶지않고, 그래서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선교사로 보내신 하나님의 대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꿈꾸는 본향은 그 분의 나라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달려갈 그 나라말이죠. 우리는 내가 당하는 고난이 전부인줄 압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죠.
벧전1:6~7 그러므로 여러분이 지금 잠시동안 여러 가지 시련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기뻐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믿음을 단련하셔서, 불로 단련하지만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되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더 중요한 내용들이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신당에는 옛날 느부갓네살왕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키면서 예루살렘성전에서 가져온 물품들이 있었습니다.고레스는 그 물품들까지 유다 총독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물건들이 무엇인지 자세히 적고 있습니다. 그 물건의 값이 얼마나 되는지, 그 물건들이 어떤 물건들이며, 얼마나 귀한 것인지 저는 잘 모릅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빼앗겼던 물건들을 다 찾았다는 것입니다.
70년전에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가장 이스라엘 백성에게 치욕스러운 것은 그들의 성전이 유린당한 것이었죠. 성전이 무너지고, 왕이 눈이 뽑혀 노예처럼 끌려가고, 성전의 성물들은 침략자의 손에 의해 더렵혀지고 약탈되었습니다. 성물들이 귀해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적인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과 관련되어 있기에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나라가 빼앗기고, 성전이 유린 당할 때, 모든 것이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믿었던 믿음은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르죠.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다가 어려움이 닥치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낙심입니다. 낙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땅에 떨어지는 것을 말하죠. 아마도 하나님이 진 것 같은, 하나님이 힘이 없는 것 같은 마음에서 절망하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사랑도 소용없고, 주님의 마음으로 베풀었던 긍휼도 없던 것이 되는 그때, 우리에게 신앙에 회의가 찾아 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이 끝나고 새로운 계획이 시작되는 지금, 그 잃어버리고 빼앗겼던 것들이 다 찾게되는 과정을 오늘 본문에서 봅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며 서두에서 말씀드렸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의문에 쌓였던 아버지의 태도가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모든 사회적이고, 상식적인 것을 뛰어 넘어 그렇게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었던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고요. 모든 것을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어서가 아니라고요. 그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되찾을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주님의 때, 온전히 빼앗겼던 것이 돌아올 것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라고요.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는 바로 다시 되찾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능력이 되는 것이죠. 예수께서 당당히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용기는 용감해서도, 아프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무기력해도, 힘이 없어서도 아니고요. 그는 다시 되찾을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때에 빼앗겼던 것을 되찾을 것이라는 믿음 말이죠. 그 믿음을 하나님은 부활로 나타내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브라함도 그런 믿음의 제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들을 제물로 드릴 수 있는 용기는 아버지로서 아들을 아끼지 않거나 무자비해서도 아니고, 무능력해서도 아닙니다. 주님의 때, 되찾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죠.
우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의 자녀로 살면서 많은 것을 빼앗깁니다. 자존심을 빼앗기고 권리도 빼앗깁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자기의 의를 내려놓고, 권리를 포기하고, 주권을 하나님께 내어 드립니다. 뺨을 맞으면 대항하기보다 반대 뺨을 돌려대는 삶을 삽니다.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어리석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기 쉽습니다. 나의 힘도 빼앗기고, 나의 권리도 빼앗기는 삶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죄도 없이 다른 사람을 위해 죽어야 하는 삶입니다. 목숨도 빼앗깁니다. 그러나 억울해 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날에 그것을 다 도로 찾게 될 것입니다. 빼앗겼던 것들은 다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는 그 날에 우리는 모든 것을 돌려받게 될 것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용기있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날에 모든 것을, 하나도 상하지 않고 다 되찾을 것을 믿기 때문이죠. 더 나아가 아버지의 은혜까지 덤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억울해 하지도, 세상을 부러워하지도 마십시오. 그리고 당당하고 아름답게 빼앗기는 삶을 사십시오. 누가복음 15장의 우리가 탕자의 비유라 부르는 본문의 정확한 제목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주님의 길을 걷는 자는 반드시 되찾을 것입니다. 하나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내려놓고, 내가 자발적으로 버린 것들을 단 하나도 잃지 않고 도로 되찾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죠.
롬8:18, "생각하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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