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일에 말씀드렸다시피 에스라서의 배경은 바벨론으로 인해 멸망했던 남유다 백성들이 70년간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페르시아왕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 다시 고향 땅 유대로 돌아오는 시기에 맞춰져 있습니다. 지난주일, 구약의 역사를 요약해서 공부했죠? 구약의 역사를 10가지 시대구분으로 요약한 내용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창조시대, 족장시대, 출애굽과 광야시대, 가나안정복시대, 사사시대, 통일왕국시대, 분열왕국시대, 포로시대, 포로귀환시대, 침묵시대, 이렇게 10가지로 구분이 가능하죠. 그중에 구약의 역사 후반기에 속하는 포로귀환시대에 에스라서의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본래 히브리성경에는 물론 70인역에도 에스라서는 따로 존재하는 책이 아니었습니다. 느헤미야서와 같은 책으로 그 안에 묶여 있었던 책이었죠. 70인역이란, 히브리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해 놓은 책을 말하는데요. 70인역이니까 70명의 번역자가 참여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70이라는 숫자를 뜻하는 라틴어 단어로 셉투아진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책이 번역된 이유는, 알렉산더 대왕의 이스라엘 정복 이후, 급속히 헬라문화가 번지면서 유대인들이 히브리어를 잃고 헬라어에 동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했던 것이죠. 이 책이 기원전 300년쯤 기록된 책이니까 예수님이나 제자들도 구약을 이 책으로 읽으셨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후, 성경은 다시 라틴어로 번역이 되죠. 자꾸 공부처럼 말씀드려서 죄송합니다. 그래도 한번쯤은 들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언급합니다. 이 책은 불가타성경이라고 부르죠. 5세기 초에 번역된 성경입니다. 비로소 이 번역본에 에스라서가 느헤미야서에서 독립해서 한 권의 책으로 나오죠.
포로 귀환은 총 3번으로 나뉘어서 진행됩니다. 1차 귀환은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진행된 귀환이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가장 먼저 성전을 재건하죠. 아시다시피 예루살렘에는 솔로몬이 지은 솔로몬성전이 있었는데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죠. 그래서 성전을 재건했던 것이죠. 두 번째 성전이 지어진 셈입니다. 그것을 스룹바벨의 성전이라고 부르죠. 이후, 여러분이 잘 아는 헤롯대왕이 이 스룹바벨의 성전을 증축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혀 헤롯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어떨까요? 기원후 2세기 이스라엘과 로마의 전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은 오히려 이슬람 사원인 알 아크사 모스크가 세워져 있습니다. 아무튼 이 1차 귀환에 관한 기록이 에스라 1~6장까지 기록되어 있죠. 2차 귀환은 에스라선지자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1차 귀환으로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2차 귀환을 통해 이제 외적인 부분이 아닌 내적인 부분의 회복을 꿈꾸셨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대대적인 개혁운동을 펼치죠. 개혁운동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회복운동이었죠. 이 부분이 에스라의 후반부, 7~10장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에스라는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죠. 참고로 3차 포로귀환은 느헤미야선지자의 인도하에 이루어집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중건하는 일과 공동체를 추스르는 일을 담당하죠. 이는 느헤미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성전재건과 내적인 영적재건이 동반되어야 함을 역설한 책입니다. 그럼에도 사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기독교공동체 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는 책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뚜렷하게 기억할 만한 구절도 없고, 회복이라는 주제가 손에 잡히는 주제는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나 반대로 어쩌면 오늘날 자기 도취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현대 교회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를 자명하게 보여주는 도전의 책이 아닌가 저는 생각합니다. 이는 회복이 외적인 부분만 이루어져서도, 그렇다고 내적인 부분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으로 변화가 보인다고 해서 다 회복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고요. 또한 내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면 반드시 외적으로도 표시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고백을 하고 그분의 마음과 뜻을 품었다면,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표시가 되게 되어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적인 권세는 말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영적인 권세가 골방에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신앙은 온전히 품는다면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품으면 소문나게 되어 있고요. 영적인 개혁은 그렇게 2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집니다. 에스라를 함께 묵상하는 동안, 우리에게 정말 소중하고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은혜 나누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분열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렸습니다. 분열한 왕국은 멸망에 이르렀는데요. 먼저 나라를 잃은 것은 북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들은 기원전 722년, 당시 히타이트를 물리치고 티그리스 강 유역의 신흥강국으로 부상한 아시리아에게 침략을 당해 멸망을 합니다. 이후 150년쯤 지난 기원전 580년경 남유다도 신바벨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을 당하죠. 이 일로 이스라엘의 상징과도 같은 예루살렘성전이 파괴됩니다. 그리고 70년간의 포로생활이 시작되죠. 당시 활동한 성경의 인물 가운데 다니엘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가 주님께 붙들여 사는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죠. 타향에서 노예로 살면서도 주님을 잃지 않고, 신의와 정직으로 성공하는 성공사례로 우리에게 등장합니다. 노예의 신분임에도, 고급관리로 승승장구하죠. 그런데 이 성공비결에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처세술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의 처세술은 단지 주님의 방법대로 사는 것 뿐이었습니다. 다니엘을 보고 있노라면 여러 사람이 떠오릅니다. 마치 고난 가운데서도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요셉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을 섬기는 문제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면, 마치 죽으면 죽으리라하며 자신의 민족을 위해 십자가를 지었던 에스더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있는 육체적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했던 바울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자기 민족의 멸망을 바라보며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갈 기회를 달라고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끝내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외면하십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계획된 70년이었죠. 다니엘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은 지속되었습니다. 마치 바울의 기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은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고통 속에 몰아 넣으시는 것일까요? 그것이 이스라엘을 혼내주려는 의도로 단정짓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즐기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왜 바울은 몸에 가시를 지니고 살아야 했을까요? 한번도 보지 못한 지나가던 병자들에게까지 치유의 손길을 주시는 주님이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늘 주님 곁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자 하는 이들, 특별히 이스라엘은 세상의 어떤 민족보다도 주님께 가까이 있는 민족이 아닙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보면서 아침저녁으로 다르고, 은혜도 모르고 왔다갔다하는 존재로 읽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을 아는 민족이 세상에 어디 있었습니까? 누가 그런 사랑을 받았고, 누가 그런 사명을 얻고 감당했습니까? 그런 이들이 왜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나요?
이런 의문은 성경의 역사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마치 세상 사람들은 잘 사는 것 같습니다. 아무 문제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이들에게는 많은 고난들이 따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주님의 마음을 품고 살겠다고 노력하면 할수록, 수많은 태클과 문제 앞에 놓입니다. 예수의 사랑은 늘 오해받고, 용서와 긍휼은 늘 이용을 당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면 오히려 세상의 버림을 받습니다. 끊임없이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가르치죠. 심지어 신앙과 삶이 유리된 이중적인 삶에 우리는 익숙해 집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왜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고난과 어려움에 놓여야만 합니까? 왜 예수 믿으면 더 많이 아픈가요? 왜 예수를 따르면 방해가 더 심해집니까? 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했나요? 이런 의문에 우리가 대답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이어나가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이 의문을 풀 이야기의 단초가 있습니다. 다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서 9장에는 그의 간곡한 기도가 나옵니다. 회개와 간구의 기도죠.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그치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시간표였습니다. 정해진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죄송하지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죠. 어려서부터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청년이 있습니다. 가정은 깨어졌고,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학대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는 이 없이 자란 이 청년은 삐뚤어진 마음과 반항심으로 술과 도박, 폭력과 쾌락에 빠져 살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새로운 삶을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이제 정상적인 자신의 삶으로 돌아오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오기 위해 그는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요? 시간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처절한 싸움을 싸워야 할까요? 그의 신체가 다시 돌아오는 시간, 그가 술을 끊고, 도박을 끊는데 필요한 아픔은 얼마나 될까요? 마음먹으면 다음날 당장 우리는 정상적인 몸이 될까요? 이를 연이어서 질문해보죠. 여러분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도 깨달았어요. 그리고 회개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님의 뜻대로 사는 삶, 주님의 제자로 사는 삶으로 살아가야죠.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얼마나 시간이 필요할까요? 당장 될까요? 회개하는 순간, 나의 마음과 몸과 영혼은 리셋이 될까요? 여러분이 알았던 지식을 주님의 지식으로 변화시키고, 여러분이 경험했던 것들을 주님의 생각으로 바꾸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아니 시간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요? 얼마나 많이 아파야 할까요? 술 하나 담배하나 끊기가 그리 어려운데, 여러분의 영혼을 바꾸는 일은 쉬울까요?
우리의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익숙한 것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것들을 담으려면 아픔이 있습니다. 옛것을 잊고 새로운 것을 품으려면 어려워요. 옛사랑을 잊어버리는 것도 그리 힘든데 내가 수년동안, 수십년동안을 품어왔던 생각과 가치와 경험을 버리는 것이 어찌 힘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런 고통이 있다는 것이 은혜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노라하고 그런 삶을 바꾸지 않는 이들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힘들지도, 괴롭지도 않을거예요. 왜냐하면 자신을 바꾸지 않으니까요.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 된듯하지만 내면은 변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이들에게는 고난도 없습니다. 아픔도, 고통도 없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참을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죽는 줄 알았습니다. 병원에서 진통제를 두번이나 맞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요. 병원에서는 결석에 의한 통증이라고 하더군요. 진료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조금 전의 통증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와 나눴습니다. 너무 아파서 다시 아프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데 아내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통증은 당신편이라고 말이죠.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통증이 어찌 내 편인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지…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아내가 계속 말을 합니다. 당신이 아프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면 몸 속으로는 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요. 그러니 통증이 있다는 것,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당신에게 고마운 일이라는 말을요. 곰곰히 생각해보니 맞는 말입니다. 나를 위해서 통증이 있는 것이라고요. 나를 위해 아픔을 주는 것이라고요.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픔을 통해 나의 문제를 발견하는 것이고, 아픔을 통해 내가 익숙했던 것과의 결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난을 통해 새로워지는 것이고, 변화되는 것이죠. 고난을 선용하세요. 고난을 기뻐하세요. 고난의 유익을 즐기세요. 코치의 강한 트레이닝은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나를 훈련시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선수로서 성장하죠. 그렇듯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은 나를 좌절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벌을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 고난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시려는 것이죠. 그래서 내가 성장을 하면, 내가 주님의 뜻에 순종하면, 움직일 것 같지 않은 거대한 페르시아의 왕을 사로잡아서라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문제는 나의 성장에 있습니다. 문제는 나의 영적인 재건에 있어요. 우리에게 통증이 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바꾸시려고 하시는 것이고, 건강케 하려 하시는 거예요. 고난으로 영적인 재건을 이루십시오. 아플수록 나를 바꾸어 가세요. 힘들수록 새로워지세요. 고지가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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