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작어세(必作於細)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철학자 노자가 쓴 도덕경에 나오는 말인데요. “모든 것은 반드시 작은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는 뜻이죠. 그 책에 나오는 온전한 본문을 옮기면 이렇습니다.
“천하난사필작어이(天下難事必作於易) 천하대사필작어세(天下大事必作於細)”
풀이하면, “천하의 어려운 일일지라도 반드시 쉬운 일에서 시작되고, 천하의 큰 일이라도 반드시 작은 일에서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소한 문제가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힘들게 만들 수 있죠. 그래서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고요. 우리는 작은 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작은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죠. 너무 쉬운 문제는 무시합니다.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은 가치없게 생각하죠. 언제나 볼 수 있는 이들을 위해 만남에 애를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쉬우니까요. 언제나 볼 수 있으니까요. 없어질 것이 아니니까요. 이 작은 것들이 우리에게 정말 은혜고 귀한 것들인데도, 우리는 그것들을 무시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많은 남편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내에게 큰 선물을 안겨주면 좋아할 줄 알아요. 어떤 남편은 돈을 많이 벌어다 주면 좋아하는 줄 알죠. 물론 좋아하겠죠? 그러나 평상시 깊은 관계와 작은 나눔들을 갖지 못하면 그 관계는 지속되기 어렵습니다. 내가 좋은 선물을 줘도, 월급을 많이 갖다 줘도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여러분은 작은 것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일어나서 인사 한 마디, 다정한 공감의 대화, 웃음 띈 미소, 그것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이런 것들을 기본기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기본기들이 필요합니다. 건강이 그렇고, 정서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건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죠. 그래서 수많은 건강식품과 비타민을 챙겨 먹습니다. 비싼 비타민일수록 더 잘 팔리죠. 그러나 가장 기초인 식습관에는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식습관을 고치기보다는 비타민을 챙겨먹는 것으로 건강을 관리하려고 하죠. 운동을 하기 보다는 스테로이드 계통의 약물에 나의 근육을 만들려고 하죠. 원대한 꿈을 꿈꾸지만 오늘 하루 성실히 일을 하는 것은 힘들어 합니다. 우리가 품는 비전은, 우리가 꾸는 꿈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내 삶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기 쉽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은 결국 작고 소소한 나의 행동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죠.
기초학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문학, 철학을 비롯하여 수학과 기초과학에 이르는 기본적인 학문이죠. 오늘날 이런 기초학문들이 많이 무너졌습니다.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풍토이다보니 돈이 되는 직업군에 학문들이 편중되는 경향이 팽배하죠. 고등학교만 되어도 예술교육은 뒷전으로 밀립니다. 수업시간은 있는데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는 경향이 허다하고요. 이에 대해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예술교육이 대학 가는데 그다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예술교육을 왜 하는지 아시나요? 왜 인문학적 사고가 필요한지 아십니까? 사물을 보는 눈, 세상을 보는 눈, 즉 세계관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기본기이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기본기가 사라집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지난주, 교육당국의 발표를 보니 지난 해, 우리나라 주요 대학 내 기초학문 전공 신입생 가운데 절반 가까운 학생들이 자퇴를 하거나 휴학을 한 것으로 나왔습니다. 교육당국은 이들의 상당수가 재수를 통해 의과대학, 혹은 법대로 진학한 것으로 보고했습니다. 왜 그들은 의대를 갔을까요? 왜 법대에 진학했을까요? 우리나라 의사의 수가 모자라거나 혹은 우리나라에 치료받아야 할 환자들이 넘쳐나기 때문일까요? 법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아 그들을 위해 법률가가 되기로 했을까요? 우리는 누군가 꿈이 있다고 하면 이렇게 물어보죠. “왜 그런 꿈을 갖게 되었니?” 그리고 그 대답이 바로 그 꿈을 꾼 학생의 세상을 보는 눈이 되죠.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가진 직업의 기초는 누군가를 돕기 위한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예요.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작년에 은퇴하신 이재철목사님이 책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동차는 운송수단이 목적이라고요. 그런데 자동차를 사면 애프터서비스를 해 주잖아요. 일정한 기간동안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고쳐주는 것이 애프터서비스죠. 그런데 차를 사고는 그 애프터서비스를 받으려고 매일 공장을 찾는다면 그것이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요. 마치 신앙인들이 주님을 그렇게 믿는데요.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 이 땅에서 주님의 사명을 품고 살아가는 것보다 주님의 복을 받는 것을 더 목적으로 산다는 것이죠. 주님의 복은, 주님의 은총은 내가 이 땅에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도우시는 손길인데요. 그것을 마치 목적으로 삼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거예요. 자동차 메이커의 애프터 서비스는 자동차가 잘 운행하도록 돕는 것인데도, 그것이 무슨 큰 소득인양 목적하는 사람처럼 말이죠. 이런 이유가 바로 기본기의 문제입니다. 작은 것을 경시하는 문제 때문이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갈렸던 이스라엘은 차례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죠.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의 침공으로 이미 멸망하여 그 민족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남은 유다왕국 또한 바벨론에 의해 나라를 잃게 되는데요. 북이스라엘과 달리 남유다는 3차례에 걸쳐 멸망을 합니다. 기원전 606년, 여호야김왕 시절, 바벨론의 속국이 됩니다. 그리고 1차로 다니엘을 비롯한 왕족 중심의 사람들이 인질인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물건들이 전부 바벨론에 빼앗기죠. 그리고, 598년, 여호야긴 왕 때에 한번 더 포로로 끌려가는데, 이때 에스겔을 포함한 귀족 중심의 백성들이 끌려갑니다. 그렇게 숨이 끊어지지 않을만큼의 명맥을 이어가던 나라는 586년에 완전히 침몰합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까지 침공하여 모든 나라를 초토화 시켜버리죠. 남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눈이 뽑힌 채 사슬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고, 그 뒤를 이어 남아 있던 모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70년이 지나, 다시금 고향 땅으로 귀환하게 되었는데요. 그 상황을 오늘 본문은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다 읽지는 않았지만 성경은 귀환하는 이들의 명단을 일일이 기록하고 있죠. 가끔 성경에서 대하게 되는 족보들을 보면 당황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왜 이 족보가 필요할까 싶기도 하죠. 오늘 본문 또한 길게 적혀있는 이 명단이 왜 필요했을까 싶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말씀으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러다 문득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42,360명이라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말씀은 오늘 본문 64절에 나옵니다. 아마도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테죠. 민수기에 따르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인구가 60만명에 이르렇습니다. 이후에는 인구가 더 늘었겠죠. 그런데 멸망을 당하고, 다시 시작해야할 사람의 수가 1/10도 안 되는 작은 인원입니다. 70년의 고난으로 많은 사람들을 잃고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비록 적은 수, 비록 보잘 것 없지만 남은 자들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계획을 이루십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는 스룹바벨의 이름이 있습니다. 적은 숫자임에도 그 가운데서 예수님의 혈통이 이어집니다. 비록 형편없이 초라하지만 하나님은 그 초라함 속에서도 일하십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하나님은 우리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비록 초라하더라도, 비록 현저히 숫자가 줄어들었다 하더라도, 비록 보잘 것 없는 존재처럼 보일지라도, 비록 다 잃고 남은 것이 얼마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일하시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풍성한 열매를 거두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작다고 무시하지 마세요. 작아도 옳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거기에서 큰 것이 나옵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과 들을 태웁니다. 작은 불씨가 모여 큰 불을 이루죠. 우리의 신앙도 작은 것에 출발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는 것도 작은 것에서 출발하죠. 오늘 주님 앞에 엎드린 작은 기도, 말씀을 붙들고 소심하게 실천한 작은 행동, 그리스도인으로 부끄럽지 않게 결단한 작은 결정들, 이것들이 모여 우리를 예수의 제자로 만듭니다.
신실함은 작은 것에서 드러납니다. 우리가 크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작은 것들이 모여서 합쳐진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오늘 나의 작은 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지죠. 울창한 숲도, 거대한 바다도, 모두 작은 씨앗 하나, 물방울 하나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도 바로 작은 나의 행동에서 만들어집니다.
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기독교 고전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사람은 니콜라 에르망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17세기 프랑스 사람이죠. 그는 당시 최고의 직업이었던 군인이 되고자하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고 싶은 욕망이 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군인은커녕 그 변변한 직업하나 갖지 못하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러다가 그는 어렵사리 한 수도원의 청소부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과의 소소한 일상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매일 말씀 속에서 한 가지 자신의 실천할 일들을 찾았고, 그리고 그 작은 일을 하나씩 해 나갔습니다. 청소를 하는 곳에서, 식당에서 설겆이를 하면서도 그의 실천을 계속되었습니다. 그의 작은 실천들은 그곳에 있는 이들과 귀한 관계를 만들어 주었고, 그는 수도원 원장뿐 아니라 많은 수도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라고 여기고 글로 남겼습니다. 그 글은 나중에 [하나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어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읽힌 기독교 고전 중의 하나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도 그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산을 옮길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능력이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실천의 시작이 곧 큰 권능을 만든다는 말씀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자녀시죠? 그렇다면 오늘 무엇을 하시겠어요? 크고 놀라운 일은 거둬두세요. 그것은 주님이 하십니다. 여러분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작고 보잘 것 없는 것, 남들도 다 할 수 있는 것, 그것을 지금 해 보세요. 아내에게 매일 따뜻한 말을 해 보세요. 자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보세요.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매일, 하루에 한 번씩 고맙다고 말해보세요. 그 사소한 것들, 안해도 그만인 것들을 해 보세요. 그 작은 일이 얼마나 큰 일을 만드는지 경험해 보세요. 주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거대한 것을 바라시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의 불타는 열정과 죽음을 불사하는 헌신을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늘 아침, 일어나 나즈막하고 간단한 기도, 짧지만 멈추지 않고 매일 지속되는 말씀묵상, 곁에 있는 이웃을 향한 공감과 관심, 짤막한 인사, 작은 배려, 그런 모습이 습관이 될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지는지 경험해 보세요. 여러분에게 있는 작은 믿음이 어떻게 미래로 다가오는지, 여러분이 행한 작은 행동이 어떤 복으로 임하는지 경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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