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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라서묵상

에스라07 - 그리스도의 길은 순조롭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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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이 쉽게 하는 착각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 삶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내가 회개하고 주님의 길을 걷겠다고 선언하면 그 길이 편안할 것이라는 생각이죠. 이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가령, 조폭생활을 하던 사람이 손을 씻겠다고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래, 잘 생각했다.. 잘 살아라 할까요?” 우리와 거리가 먼 조폭생활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형편없는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개과천선하여 올바른 삶을 살겠다 했다고 치자고요. 그러면 모든 사람이 바로 인정해 줄까요? “개과천선했구나.. 이제 좋은 사람 되었구나..” 이렇게 바로 믿어줄까요? 지금까지 한 일이 있는데, 과거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사람들이 당장 잊어버려 줄까요? 매일 늦잠을 자던 사람이, 그렇게 일찍 일어나라고 해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내일부터 일찍 일어난다고 하면 부모님이 뭐라고 할까요? “그래, 이제 부지런한 사람이 되었구나! 할까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을 탓할 수 있나요? 다 자기가 한 일인데요.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선언하면 당장 자신의 과거에 해 온 일들과 싸워야 합니다. 지난 시간들이 방해를 하겠죠. 이것은 외부적인 요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자신과도 싸워야 하죠. 마음만 먹으면 나의 행동이 움직여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작심삼일이 한두 번입니까?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고 당장 그분의 뜻을 따라 자신의 가치관을 바꾸기가 쉽나요? 아마도 부단한 수고를 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힘겨운 싸움이죠. 그러니까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렇게 나의 과거와 전쟁을 선포하는 일이죠. 그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어찌 순조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모든 삶이 순조로울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이 착각은 오히려 조금만 걸림돌이 생기고 지체되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여기도록 우리를 현혹하고 말죠.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기고 방해가 있으면 마치 주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혹은 뭔가 잘못 가고 있는 것처럼 여길 때가 있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을 순조로움에만 맡겨 결정할 때도 있어요. 순조롭게 진행되면 주님의 뜻이고, 방해가 있으면 주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이는 참 어리석은 판단이 될지도 몰라요. 오히려 하나님의 뜻은 더 많은 역경을 통과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마치 애굽을 나와 광야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듯이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의 길 또한 결코 순조롭지 않았어요. 그들은 주님의 인도 하심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히 알았고, 또한 그 일을 준행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이 바라던 일들이죠. 그들의 마음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오랜만에 주님의 뜻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방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포로생활을 하던 시기 동안 유대 가나안 땅에는 다른 민족들이 살았습니다. 그 민족들이 어떤 민족인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사마리아에 사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앗시리아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마리아는 본래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남유다보다 먼저 북이스라엘은 멸망을 했죠. 그것도 당시 가장 잔혹한 민족이었던 앗시리아에 멸망당했습니다. 앗시리아가 잔혹하다는 것은 그들의 식민정책에 있습니다. 그들은 타민족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소위 민족 말살정책을 사용했죠. 그래서 순수하게 혈통을 지키도록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강제로 혼혈정책을 사용했고요. 그러다보니 민족에 대한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형성된 자들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떠돌다가 주인 없는 땅에 정착한 유목인들인지도 모르죠. 아무튼 그들은 몇십 년 동안 그 땅을 자신의 땅 삼아 살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땅 주인이 나타난 셈이죠. 어쩌면 그들은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셈인지도 모르죠. 돌아온 유대인들이 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방법도 없습니다. 졸지에 땅 주인에서 이방인이 된 이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이스라엘과 화합하는 방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성전 건축에 동참하겠다고 나서죠. 

이 장면에서 저는 우리가 묵상해야 할 2가지 사실을 발견합니다. 먼저 그들의 의도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을 돕겠다는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기득권이었습니다. 자신도 지분을 차지하고 싶은 것이죠. 마치 성전을 짓는 일에 동참함으로 자신들의 지분, 자신들 또한 이 땅에 머물 권리를 쟁취하고 싶은 것입니다. 어쩌면 오갈 데 없는 이들을 돌보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무일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법을 법률로 정할 만큼 긍휼의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단칼에 그들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이것을 마치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결정으로 읽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거절 이유는 그들이 타민족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의도입니다. 그들이 거절당한 이유는, 그들이 성전을 짓는 일에 동참하는 이유가 그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는 성전을 짓는 것은 단순한 건축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죠? 그것은 자신들의 주인, 우리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선포하고 인정하는 일종의 세러모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배는 나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드려서는 안 됩니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나의 권리를 위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나를 버리고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기득권도, 어떤 의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저는 예배가 광야라고 말씀드렸어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는 완전히 가난한 마음으로 두 손을 들고 항복하며 나가는 것이라고요. 그래야 우리가 순종할 수 있죠. 많은 사람이 순종이 이성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요. 저는 순종은 이성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리 고상하지 않아요. 정말 순종은 언제 되느냐 하면, 내가 모든 것을 잃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그때 순종합니다. 마치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처럼 말입니다. 진짜 모든 것을 잃기 전에, 우리는 예배에서 이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정말 가난해져야 합니다. 예배 가운데 정말 간절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간절하지 않으면 말씀도 들리지 않잖아요.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지만 아마도 지금 당장 주님의 음성이 필요하고,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다면 이 예배가 여러분에게 간절할 것입니다. 내일 당장 인생을 걸어야 하는 시험이 있거나, 위험한 수술이 있거나, 혹은 절망에 빠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일 때, 여러분의 예배는 달라지겠죠. 저는 여러분이 인생에서 그런 경험을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의 예배가 그런 간절함을 찾아야 해요. 여러분의 예배가 깊어야 합니다. 주님이 나의 주인 됨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에서 그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예배가 회복되어 있었다면 포로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배를 잃으면, 주님에 대한 간절함을 잃으면, 우리의 삶을 통해 그 간절함이 만들어질지도 모릅니다. 현실에서 정말 기댈 곳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 만들어질지도 모릅니다. 

한 가지 더 묵상할 내용이 있는 데요. 그것은 ‘가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마리아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돕겠다는 제의가 거절당하자 태도를 바꿔 이제는 이스라엘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죠. 조금 전까지는 돕겠다더니 갑자기 방해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 삶의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도와주려고 하다가 거절당하면 오히려 화가 나죠. 저도 그래요. 가족들을 먹이려고 가끔 아침을 차리고 맛나게 준비합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배부르다고 안 먹으면 화가 나요. 왜 화가 날까요? 사실 생각해보면 가족들에게 맛나고 배불리 먹이려고 차린 거잖아요. 그런데 배부르데잖아요. 배부르면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화가 날까요? 나의 목적이 가족들의 배부름에 있지 않았다는 반증이죠. 그럼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렇습니다. ‘내가 맛난 것을 했어…’ ‘내가 했으니 먹어…’ ‘내가 잘했지?’ 바로 내가 한 일에 있는 거죠. 그러니까 화를 내는 겁니다. 제가 그러고 있더라고요. 우리는 이것을 가짜라고 부릅니다. 가족들을 위한 것이 아닌 거죠. 그냥 자신을 위한 것이었죠. 사마리아에 사는 이들이 딱 그렇습니다. 그들은 도와주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자신들이 제안한 것이 아니라는 거죠. 오로지 자신들을 위해 도움을 제안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도움이 아니죠.

이같은 일은 우리가 남을 돕거나 봉사하는 일에도 드러납니다. 다림사역을 하다 보면 도와야 할 이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을 위해 일할 때 도움이 순조로우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도움을 거절하는 분들이 있어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반찬 나눔 사역을 하는데 문도 안 열어주는 분들이 계시다고요. 지난번 다림브릿지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인데, 반찬 나눔이 필요해서 드렸더니 그분이 안 먹고 다른 분들을 주더라는 거예요. 그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세요? 좀 모자란 저는 그런 분들은 안 드려도 되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게 고상하게 말해서 그렇지 조금 저급하게 말하면 이런 말이잖아요. “내가 고생해서 반찬 만들어줬는데 안 먹어?” 우리는 그분들을 돕기로 한 거잖아요. 그분들도 남을 도울 권리가 있잖아요? 그렇게라도 도움이 되면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왜 화가 날까요? 그것은 도움이 목적이 아니라 내가 한 일이 목적이기 때문 아닐까요? 심지어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갖죠. “내 도움을 안 받아? 그럼 어디 내 도움 없이 잘되나 보자.” 이런 마음의 도움을 우리는 가짜라고 말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봉사에는,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뽐내려 하는 경우들이 많아요. 긍휼이라는 마음에는 나의 기득권이 자리할 곳이 없습니다. 오로지 상대방의 권리만 있을 뿐이죠. 남을 돕는다고 하는 마음에는 나의 마음은 없고 상대방의 마음만 있는 거예요. 더 나아가 남을 돕는다는 것은 나를 희생해서 남을 살리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런 손해도 없이 남을 도울 수는 없어요. 시간이라도 희생을 하게 되죠. 그 희생, 그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없이 남을 도울 수 없습니다. 또한 그 손해를 보상받으려는 마음을 가지고는 남을 도울 수 없는 거죠. 가짜 도움은 어김없이 우리를 결국 방해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마리아인의 방해처럼 말입니다.

3주 전부터 우리는 회복의 중요 키워드 3가지를 나누고 있죠. 첫 시간에 나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것을 말씀드렸고요. 첫 마음을 회복하라고 말씀드렸죠. 내가 처음 시작했을 때를 기억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낄 때, 처음 품었던 마음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주 나눈 키워드는 지키라는 말씀이었죠. 절기를 지키라는 말씀이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절기를 지키라는 의미를 저는 여러분의 분위기를 영적인 분위기로 만들라고 말씀드렸어요. 그것이 싸워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를 물들게 하는 여러 분위기가 있습니다. 우울하고, 억눌린 심리적인 분위기서부터, 사회적 분위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노출되어 있죠. 그 전쟁터 같은 분위기의 싸움에서 언제나 우리는 영적인 분위기를 쟁취해야 합니다. 주어진 분위기에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지난 수요일, 평안의 신발을 신으라는 전신갑주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는데요. 정말 좋은 사람은 누구를 만나든, 어디를 가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평안을 지킨 사람이라고요.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그래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거죠. 물론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우리의 분위기를 지켜야 하죠. 그것이 영적 회복의 두 번째 중요 키워드입니다. 오늘은 드리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날마다 번제를 드렸다고 되어 있어요. 번제라는 것은 태워서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의 감정을 태워 드리는 것인지도 몰라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고, 나의 불안, 나의 염려를 태워드리는 것입니다. 결코 순조롭지 않아요. 그리스도의 길은 수많은 방해를 받을 것입니다. 방해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 방해는 우리의 포기를 이끌만큼 강력할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가 아니면 방해도 아니죠. 그래서 힘겹고, 그래서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그 길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순조롭지 못하나 반드시 이루어진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루어지는 역사라면 순조롭지 못한 것이 뭐 대수이겠습니까?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조금 늦은들 어떻겠습니까? 반드시 이루어지는 일이라면, 지금 고생한들 어떻겠습니까? 그 믿음을 가지고, 여러분을 괴롭히는 염려와 괴로움, 걱정과 분노의 감정들을 매일 태워 드리세요. 여러분의 욕심을 태워 드리세요. 여러분의 조바심을 매일 태워드리세요. 혹시 오늘 순조롭지 못한 여정 때문에 괴로워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새겨야 할 단어는 "순조롭지 못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진다"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새겨야 할 것은 십자가의 고난이 아니라 부활의 영광입니다. 여러분이 간직해야 할 것은 수많은 방해가 아니라 그 너머 지어질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어려움을 묵상하지 마세요. 주어진 은혜를 묵상하세요. 제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나이차이가 많아서 깊은 교제들을 나눈 기억이 없습니다. 단지 몇 가지 말씀이 기억날 뿐인데요. 그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어요. “목회를 하면서 너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수만가지도 넘을 거다. 열의 아홉은 너를 괴롭히는 일일거고, 열의 아홉은 힘겨운 싸움일거다. 너에게 기쁨이 되고, 감사한 일은 고작 열에 하나 뿐일거야. 그러나 네가 기억하고 늘 묵상해야 하는 것은 그 많은 아홉이 아니라 작은 하나여야 한단다. 네가 붙잡아야 하는 것은 네 인생에서 많았던 것이 아니라 내 인생에서 은혜로웠던 거야.” 열의 아홉이 괴로움이라면 태우세요. 비록 하나이지만 은혜만 묵상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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