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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라서묵상

에스라15 - 그리스도인은 연약해서 더욱 강한 사람입니다. 8: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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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서는 7장을 기준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인 1~6장까지가 스룹바벨을 중심으로한 1 귀환과 성전재건에 관한 내용이라면, 후반부인 7~10장까지는 에스라를 중심으로 2 귀환과정을 다루고 있죠. 후반부도 굳이 구분을 한다면, 7, 8장은 2 귀환과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나머지 9장과 10장은 에스라를 통한 종교개혁과정을 다룹니다. 

이미 우리는 에스라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조금 다뤘습니다. 포로가 되어서도 말씀을 연구하는 일을 그치지 않았고, 이방 , 전혀 다른 사회적 배경 속에서도, 그러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기가 자유롭지 않은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는 일에 헌신했다 점을 성경은 말해주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에스라가, 전혀 다른 삶과 전혀 다른 사상을 가진 사회에 강제로 편입된다하더라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 믿음과 신앙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있었습니다. 믿음과 신앙은 적군의 마저도 감탄하고 존경을 표시할만큼 강력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죠. 그리고 우리는 진짜 감동을 주는 삶이 무엇인지, 나아가 모든 이들이 나를 돕도록 만드는 힘이 무엇인지를 묵상했습니다.

가끔 우리는 힘이 사람들을 정복한다고 믿습니다. 큰소리치면 사람들이 나의 편이 되어주고, 강한 주장을 가지면 나를 따라올 알죠. 그러나 그것은 봐주는 것이지 동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시쳇말로 똥이 더러워서 피하지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같은 반응이죠. 동의는 진짜가 아닙니다. 언제나 큰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사람들을 압도하며 자기 생각을 관철시켰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그래서 자기 뜻대로 사람들이 움직이는 같아도 그것은 사람에게 감동해서 동의하는 뜻이 아니라, 시끄러워질까 , 분위기 좋아질까 참아주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이거 정말 심각하게 들으셔야 합니다. 남편의 , 아내의 , 들으시죠? 그런데 그게 같은 순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순종이 감동하고 동의해서 하는 순종인지, 아니면 더이상 말하기 싫어서, 더이상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어서 하는 순종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같은 순종처럼 보이지만 순종의 차원이 다르죠. 그러니 말을 듣는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뜻대로 되었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이면에는 다른 생각이 있을지도 몰라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어, 마음대로

진짜 정복은 상대방 스스로 무릎 꿇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힘으로도, 권력이나  재물로도 가능하지 않아요. 오직 자발적인 존경심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곧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 만난 것을 인격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가 하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타의가 아니라 자의적이기 때문이에요. 그분이 가진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생각과 삶에 경의를 표하며, 존경심과 경외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죠. 그것이 진짜 정복입니다. 

다림교육에서 일대일 멘토링을 하는 아시죠? 고등학생들이 초등 혹은 중등 동생들을 위해 자원해 교육봉사를 하는 프로그램인데요. 프로그램에 참여하려면 다림교육에 신청을 해야 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벌써 올해 100명이 넘는 고등학생들이 신청해 멘토링에 참여하고 있어요. 다림교육에서는 멘토링 참여 신청을 하면 먼저 멘토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봉사하겠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감사히 받아야 하는데 다림교육은 봉사하는 친구들을 교육까지 하죠. 심지어 교육을 받지 않으면 멘토링 참여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림교육이 배부른 단체인 같아요. 참여하겠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참여하는 아이들을 심사하는 셈이니까요. 그렇게까지 다림교육이 하는 이유는 우리가 프로그램을 하는 이유가 단순한 교육나눔이 아니라 사랑과 교제의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멘토교육에서는 우리가 일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중요한지를 교육합니다. 

제가 멘토교육을 가장 먼저 물어보는 것이 있어요. 다림교육에 왔냐는 질문입니다. 어떻게, 그리고 어떤 이유로 왔는지를 묻죠. 일단은 신기해요. 왜냐하면 다림교육은 특별히 멘토 모집 광고를 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꾸역꾸역 멘토들이 매주 적게는 한두 명씩, 많게는 서너 명이 신청을 합니다. 질문에 가장 많은 대답이 뭔지 아세요? ‘친구가 교육봉사를 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서라는 대답입니다. 친구가 다림봉사를 하면서 재미있어하고, 남을 돕는 모습이 멋져 보여서 자신들 신청했다는 아이들이 많아요. 이것이 진짜죠. 요즘 아이들은 하라고 해도 하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 돈을 준다고 해도 하지 않을 거예요. 저에게 기도요청하는 학부모들 많아요. 자신의 아이가 다림에서 교육봉사를 하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런데 아이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말을 듣지 않는다고 기도요청을 하죠. 사람의 마음을 어찌 무엇으로 조정할 있겠어요? 중요한 것은 바로 감동입니다. 감동하면 변해요. 에스라는 감동의 삶의 살았던 것이죠.

그런데 감동의 삶이 무얼까?’ 중요하겠죠? 감동적인 삶을 살려고 해도 일부러 감동적인 삶을 수는 없습니다. 에스라가 적국 페르시아 왕을 감동을 목적으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가 어떤 환경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단지 환경보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고, 상황보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믿음마저도 힘에서 나오는 알아요. 그래서 내가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힘든 일도 척척합니다. 어느 때는 자신이 가진 재물도 척척 내놓죠. 많은 사람이 없는 일들도 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감동적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때는 하고 어느 때는 하지 않으니까요. 스스로 마음이 내킬 때는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새벽에도 나오고, 시간씩 기도하고 하죠. 그러나 조금만 힘든 일이 생기고, 기분이 상하는 일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 합니다. 들쑥날쑥한 모습이 문제인가 하면, 외부의 힘으로 인해 자신이 조정되기 때문이죠.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세력이 존재한다면 가장 다루기 쉬운 존재가 바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기분만 상하게 하면 되고, 조금만 마음이 흔들리게 하면 되니까요. 아무리 위대한 일을 해도 사탄은 그들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을 언제라도 넘어뜨릴 있기 때문이죠.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만 만나게 하면 됩니다. 수틀린 일들이 일어나게만 하면 되니까요. 때론 조금만 힘들게 하면 되고, 때론 몸이 아프게만 해도 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나의 큰소리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가르치고 소리 지르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을 보면서 그들의 성품을 온전히 알아차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경의 기록과 사건들을 대하는 모습 등을 통해 그들의 성품을 유추할 뿐이죠. 그래서 인물됨을 판단하는 문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인물의 반응과 그들의 모습은 우리의 영적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성경의 인물들을 연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필수 불가결한 일이죠. 에스라가 어떤 인물인지를 가늠하는 일도 쉽지는 않습니다. 물론 이미 우리는 에스라의 인품에 대해 유추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줄의 말씀이 근거일 뿐입니다.  

에스라7:10    에스라는 주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지켰으며,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였다.

 

외람됩니다만 구절을 통해 여러분은 에스라가 어떤 사람이었을 것이라 추측되시나요? 혹시 그가 매우 철저한 사람이고 성실한 사람이며, 심지가 곧은 사람이라는 것을 있지 않나요? 보통 공부를 잘하는 사람은 지독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일을 미루지 않고, 매일 시간을 지켜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는 것은 지독하지 않고는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공부 하셨던 분들에게는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저처럼 별로 공부를 잘못했던 사람이 보기에는 그분들은 독해 보이죠. 때론 이기적이어야 공부할 있습니다. 남의 사정 봐주고, 이것저것 신경 쓰며 살면서 공부까지 잘하기가 쉽지 않죠.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에스라는 매우 대범하고 용기 충만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전혀 다른 에스라에 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에스라에 대한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엿본 것이죠. 물론 순전히 느낌입니다. 설교라는 것이 느낌을 말하는 자리는 아닙니다. 성경을 대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가능한 일이죠. 그러려면 신학이 필요합니다. 사실 관계와 정확한 정보도 필요하죠. 저는 가급적 그런 바탕 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확인되지 않은 느낌을 전제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래서 느낌이라는 것을 미리 밝혀두는 바입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라가 금식기도를 선포하는 장면입니다. 그는 2 귀환 과정에서 많은 무리를 이끌고 이동 중에 있습니다. 그들 무리 가운데는 나이 많은 노년에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양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아하와 강에 이르렀을 금식기도를 선포하죠. 아하와강은 바벨론에서 멀지 않은 유프라테스 줄기의 강입니다. 그러니까 아하와 강에서의 금식기도는 출발한 얼마 되는, 다시 말해 귀향의 시작점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요청하는 기도였습니다. 사실 바벨론에서 가나안까지의 여정은 광야 길입니다. 게다가 많은 흩어진 민족들이 전쟁을 치르거나 치렀던 장소들을 통과해야 하죠. 군인들이 아닌 민간인 신분으로 많은 무리가 길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아마도 아닥사스다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군사 요청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없지만 군사가 필요할 만큼 위험하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던 같아요. 그리고 아하와 강에 이르러 금식을 선포합니다. 이쯤 되면, 금식기도가 필요했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여러분이 위험한 길을 갑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어요. 그럼에도 길을 가야만 합니다. 게다가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이 책임져야 사람들도 있어요. 그들을 보호할 어떤 조치들이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시겠어요? 정말 종교적 가식을 버리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니까 어떤 일에도 기도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으신가요? ‘기도는 필수니까 기도했다 하실래요? 사실 어쩌면 이런 생각이라면 여러분의 기도는 가짜이기 쉽습니다. 습관성 기도일 뿐이죠. 정말 다급하고, 정말 급박하다면 여러분의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자꾸 예를 들어 죄송하지만, 누군가 다쳐서 수술하게 되어 기도한다면 어떤 기도일까요? 기도는 두려움의 기도 아닐까요? 무서워서, 겁이 나서 주님께 매달리는 기도 아닐까요? 마치 시골집 화장실을 밤에 가기 무서워 같이 가달라고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나를 도와달라는 간절함의 기도 아닐까요? 생각에 이르자 저는 에스라가 참으로 겁이 많고 두려움이 많은, 마디로 연약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는 어쩌면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는 것이 없는 연약한 사람이어서 기도해야 하고, 내가 두렵고 떨려서, 부족해서 기도하지 않고는 없기에 하는 것이 기도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내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아직 스스로에게 힘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도 몰라요. 기도하지 않아도 만큼 아직 자신이 있어서 말이죠. 아직 견딜 하고, 아직 다급하지 않기에 기도하지 않는지도 모르죠. 이렇게 생각하면 기도는 정말 간절한 사람들의 도구입니다. 연약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 주님께 매달리는 그런 자들의 마지막 보루처럼 말입니다.

에스라는 귀환자들을 데리고 일단 바벨론을 나와 서북쪽 아하와 강가에서 삼일동안 머물렀습니다. 이런 까닭은 귀환자들을 확인하며 전열을 가다듬겠다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레위자손이 없음을 알고 그들을 보충하여 전열에 합류시키는 일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바벨론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광야의 여행길에 앞서, 몰려오는 두려움과 무게감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던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군대도 없이 무리를 이끈다는 것이 쉽지 않을뿐만 아니라 많은 살림살이들과, 아닥사스다에게서 받은 성전의 물건들, 그리고 연약한 어린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겁이 나지 않을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사명으로 행하기 이전에 여러 영적인 공격을 받습니다. 어쩌면 그런 공격들 앞에서 큰소리치며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이 멋져보일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들을 용기있는 지도자로 추앙하는지도 모르죠.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기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실 소리쳤던 베드로는 결과적으로 허풍이 되고 말았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겸비한 자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려움을 이길 없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 용기나 권세로 영적인 싸움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연약하게 자신의 나약함을 고하고, 앞에 엎드려 도우심을 구하는 자가 진정한 믿음의 지도자죠.

"나는 있다"라는 것은 땅의 표어이지, 영적 표어는 아닙니다. 에스라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금식을 하며 기도합니다.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는 믿음에, 금식을 하며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죠. 우리가 없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기에 기도하는 거예요.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하기에 기도하는 겁니다. 바울은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습니다. 말씀을 역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한시도 주님의 도우심없이는 없는 존재라는 뜻이 되기도 하죠. 영적인 싸움은 자기 암시나 최면으로 이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분이 함께하셔야 이기는 것입니다. 에스라의 연약함, 그의 눈물과 두려움, 그리고 떨림이 하나님께 향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연약합니다. 십자가도 연약합니다. 어떠한 역습도, 방어도 없는 연약함 자체입니다. 연약함은 죄가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연약합니다. 연약해도 됩니다. 아니 연약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이 함께 하시는 공간이 생기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연약할 오히려 강할 있습니다. 연약함이 그분을 부르는 나팔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해지세요. 겸손하세요. 낮아지세요. 그때 주님이 일하시고, 주님이 역사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이 감동하고, 도움의 손을 내밉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주님의 개입을 기도하세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을 의지하세요. 겸손한 마음으로 사세요. 연약해서 오히려 강한 사람, 그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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