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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라서묵상

에스라16 - 문제 해결의 출발은 ‘나’입니다. 10:1~4

지난 말씀드린대로 에스라서는 크게 부분으로 나뉩니다. 1~6장까지의 전반부는 스룹바벨의 인도하에 귀환이 이루어지는 1 귀환의 모습이 담겨지고요. 여기서 성전 재건이 이루어지죠. 7장에 와서 드디어 에스라가 등장합니다. 세월이 흘러서 에스라의 인도하에 번째 귀환이 이루어지죠. 귀환과 함께 후반부는 영적인 개혁에 대한 내용을 다룹니다. 그것이 9, 10장에 나오죠. 이제 우리는 에스라서를 마무리하면서 에스라를 통해 말씀하시는 영적 개혁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대략적으로 오늘과 다음 , 두번에 걸쳐 영적 개혁에 대한 묵상을 하게 것입니다. 묵상은 에스라서의 내용을 풀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영적인 개혁을 해야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저는 주간 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유는 첫째, 에스라의 간절함 때문인데요. 에스라가 너무도 간절히 이스라엘의 개혁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고요. 두번째로는 영적 개혁을 외치는 메시지가 언제나 심한 저항이 있기 때문이죠. 아마도 주간은 여러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거나, 말씀이 왜곡되거나, 혹은 관심 밖으로 밀려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저는 깊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임하려고 합니다. 수만 있다면 에스라처럼 금식하며 말씀을 전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 심정이니 여러분도 마음을 열고 따라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밖에 계신 분들, 잠깐 주목해 주세요. 말씀은 들어주세요.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어수선하고 아이들이 떠들고 해서 거기에 신경쓰는 일은 괜찮습니다. 나의 아이이고, 우리의 환경이니 어쩔 없습니다. 훨씬 환경이 좋았으면 좋겠습니다만 환경 때문에 말씀을 듣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어렵지만, 힘들지만, 여러분은 그래도 말씀을 듣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마세요. 말씀이 들리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떠들어서보다, 아예 처음부터 말씀을 들을 생각을 갖지 않는 마음 때문이 훨씬 크다는 생각을 잊지 마세요. 처음부터 아이 때문에나는 말씀을 들을 거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그러지 마세요. 어려워도, 어수선해도, ‘나는 오늘 말씀을 들을거야!’ 생각하세요.

이스라엘은 이제 귀환을 해서 정착을 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사를 마치고 어느 정도 안정이 것이죠. 보통 이사를 하려면 집도 알아보고, 가격도 맞추고, 이래저래 신경쓸 일들이 많죠. 이사 후에도 정리를 해야하고, 적응도 해야 합니다. 이사하고 아직 정리도 못한 분들이 계시죠. 정리가 되어야 안정이 되죠. 이스라엘은 이제 시간이 흘러 안정이 되어갈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이 터졌어요. 사람들이 안정이 되니까 이제는 짓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래요. 괜찮아지고, 여유가 있으면 짓을 하죠. 제가 말씀드리는데, 남자가 시간이 남고 돈이 있으면 가장 먼저 짓을 꿈꾼다고 말씀드렸죠? 시간이 남는 것보다 바쁜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꼴입니다. 어떤 일이냐 하면, 가나안의 원주민, 성경은 그들을 가나안, , 여부스, 브리스사람들이라고 칭하고 있죠. 이에 이집트와 암몬, 모압, 아모리 사람들까지, 마디로 이방사람들의 집합체들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동화되는 모습을 가지로 표현했는데요.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삼은 입니다. 참고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성경은 순혈주의를 고집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방의 여인들과의 혼인을 금하지도 않아요. 성경에는 많은 이방여인과의 결혼이 담겨져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의 주인공인 룻은 이방여인입니다. 그는 보아스와 결혼을 하죠. 아브라함도, 요셉도, 모세도 이방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성경이 이방여인에 대한 결혼에 반대하는 이유는, 혈연 때문이 아니라 이방 문화 때문입니다. 다른 가치관이 들어오는 것을 말하려는 , 다시 말해 다른 사상이 하나님의 가치를 대신하는 때문이지, 국제 결혼이나 순혈주의 때문이 아님을 여러분은 이해하셔야 합니다. 심각한 문제는 이스라엘의 남자들이 자신의 아내를 버리기까지하면서 이방여인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하나님은 이혼을 미워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오해하지 마세요.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이혼을 마치 무슨 죄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혼을 쉽게 생각하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모든 이혼이 죄라는 인식을 가지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혼에 대해 반대하신 이유 또한 그것은 영적인 가치관 때문임을 아셔야 해요. 하나님을 떠나는 이스라엘을 향한 메시지로 이혼을 거론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모두 영적인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을 버리고 이방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결혼과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곧잘 우리와 하나님 관계를 결혼으로 비유하시곤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하나님께서 포로로 있던 이들을 풀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자 이제 자유를 얻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도 자유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죠. 이것을 자유가 아닌 방종이라고 하죠. 자유를 주었더니 선을 넘는 것입니다. 줬더니 기어오르고, 용서해 주었더니 마치 자신은 죄가 없는 구는 것과 같은 이치죠. 이것이 인간입니다. 

용서 받은 우리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죄책감이란 아직 용서받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열등감입니다. 용서를 받았다면 용서를 누릴 알아야 합니다. 이제 죄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살아야 하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살던 대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용서를 받았다면 용서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내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에 다시는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받았다고 해서 죄를 계속 유지해도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용서가 진정한 용서로써 역할을 하려면 우리는 죄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용서가 유지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 인간은 마치 용서가 되면 내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도 되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이제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이제 예전처럼 고향에서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살아가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처럼, 포로로 잡혀가기 전과 같은 삶을 반복해서는 되죠. 용서는 다른 삶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용서는 다른 새로운 출발일 힘이 작동하는 시스템이죠. 

이에 대해 에스라의 반응이 재미있습니다. 그의 반응은 다음 구절에 있습니다.    

에스라9:3     말을 들은 나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겉옷과 속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으면서 주저앉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동에 황당한 나머지 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었답니다. 얼마나 황당하고, 속상했으면, 벌거벗고, 머리를 뜯었을까요? 여기서도 에스라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는 본래 책이었습니다. 그만큼 비슷한 시대와 비슷한 환경에서 활동했던 인물이기 때문이죠. 느헤미야 시절에도 이런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성경을 찾아 보겠습니다.

느헤미야13:25    나는 아버지들을 나무라고, 저주받을 것이라고 하면서 야단을 치고, 그들 가운데 몇몇을 때리기도 하였으며, 머리털을 뽑기까지 하였다

에스라는 자기 머리를 뽑았는데 느헤미야는 남의 머리를 뽑았데요. 이를 보면 저는 느헤미야과는 아닌 같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생겨도, 아무리 화가 나도 남의 머리털을 뽑는 일은 죽어도 못할 같거든요.^^ 사역은 성격대로 하는 것입니다. 성격이 문제가 아닙니다. 성격 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신의 성격을 미워하지도 마세요. 하나님은 자신에게 맞는 성격을 주셨습니다. 다만 성격을 어디에 사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문제는 나의 유익에, 나의 이익에, 나의 뜻대로 되는 데에 나의 성격을 사용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괴팍해도 그것을 내가 아닌 주님께 사용하면, 그것은 괴팍이 아니라 독특이 됩니다. 아무리 사나워도 그것을 나를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사용하면 그것은 사나운 것이 아니라 용감한 것이 됩니다.성격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마세요. 내게 주신 성격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니까요. 

9장은 계속해서 에스라의 회개기도가 이어집니다. 읽지는 않았지만 9:6~15절까지 계속되죠. 내용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태도에 대한 황망함을 한탄하고, 어떻게 포로에서 해방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용서함을 받았는지에 대해 기술하며, 부끄러움을 토로합니다. 그런데 회개기도가 우리에게 영적인 개혁의 출발을 가져다 줍니다. 회개기도에는 특이한 점이 있어요. 아니 있어야 것이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이죠. 회개 기도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포인트가 있죠. 회개 기도를 하는 이유이기도 대목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특별히 선지자, 중보자라면 어떤 기도가 빠지면 될까요? 잘못에 대한 회개를 하면서 다짐하고 요청해야 것이 있죠? 바로, 죄에 대한 용서의 기도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의무이기도 하고, 백성을 변호하고 대변해야 하는 중보자의 역할이기도 하죠. 그런데 에스라의 기도에는 부분이 빠졌습니다. 그는 끝까지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는 예레미야를 묵상중이죠. 거기보면 반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않겠다는 경고를 계속 보내시죠. 경고를 보내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경고를 듣고 돌아서라는 의미죠. 무조건 용서가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조건 용서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죠. 어짜피 용서받을 거니까 아무렇게나 살겠다는 뜻을 품은 것이죠. 우리는 은연중 이런 생각을 품고 있습니다. ‘내가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겠지’, ‘내가 매달리면 인도해 주시겠지’, 그러면서 가운데서 떠나는 것을 미루죠. 지난 번에도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부모님에게 대합니다. 어짜피 사랑하실 거니까, 어짜피 떠나지 않으실 거니까그래서 가까운 이들에게는 함부로 하는 경향들이 있죠. 결국 떠나고 없어 봐야 후회하는 일들이 생기죠. 이런 것처럼 에스라는 용서를 이상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긴장했습니다. 나를 위해 중보자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용서를 구해 주어야 하는데 에스라가 용서의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가만히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을 거죠.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저는 우리교회 가족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여러분들을 정말 사랑합니다. 나보다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고, 심지어 나를 태워서라도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복이 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죠. 어느 때는 주님게 서원을 하기도 합니다. 나를 받으시고, 우리 교회 가족들을 인도해 달라고 말이죠. 그렇게 거의 매일 빠짐없이 여러분들을 떠올리며 기도하죠. 그런데 제가 기도하다가 느끼는 점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다보면 마음이 떨리고 간절한 기도가 있다는 점이에요. 문제 때문에 제가 어떤 차별과 나눔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들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차별하고 편애하는 진짜 싫어하거든요. 그런데 기도가 그러고 있더라고요. 그때마다 회개하며 주님께 저의 연약함을 고했는데요. 한번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떤 이들이 나의 기도를 떨리고 간절한 기도로 만들고 있는가 보았더니 대부분 무엇인가를 시도하고, 변화를 갈망하는 이들이더라고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인간적으로 연약해서 더욱 애정이 가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을 이끄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걱정하시며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시게 하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말이죠. 그들은 느려도 조금씩 앞으로 걸어가는 이들입니다. 힘겨워도, 어려워도, 그래도 연약한 무릎을 이끌고 일어나는 이들 말이죠. 실패해도 그래도 다시 일어서는 이들 말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그런 마음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하는 것은 없지만 신뢰를 주는, 마음이 가게 하는 이들 말입니다. 언제나 있을 자리에 있고, 지킬 것을 지키며, 항상 함께하는 이들 말입니다.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결단하고, 모습으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다시 주님 앞에 서고 하는 사람 말입니다. 이미 말씀 드린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짓는 죄보다, 우리가 돌아오는 것에 깊은 관심이 있으시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 죄를 지어도 다시 돌아와 결단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요. 

에스라의 통곡에 가만히 있지 많고 일어나는 이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에스라에게 나와서 자신들의 결심을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고 말이죠. 그것은 이방여인들과 혼인을 취소하고 주님의 율법대로 살겠다고 말이죠. 우리가 그렇게 살테니 제사장은 제사장의 직분대로, 선지자의 직분대로 우리를 대신에 하나님 앞에 달라고 말이죠. 그렇게 결단하는 이들이 에스라 앞에 나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 개혁의 출발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직접, 변화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렇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서 하나님이 뜻대로 변하기를 바랬고요. 나는 생각을 바꿀 마음을 갖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뜻대로 움직이시길 원하는 신앙을 추구했죠. 이웃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나보다 남이 변하길 원하고, 나보다 남이 사랑하기를 바라죠. 그러나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꾸셨습니다. 우리보다 주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땅에 오셨고,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으며, 우리가 의인으로 불리지 전에 먼저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지요.

신앙은 누구에게 맡길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대신해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교회 다닌다고 좋은 신앙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나의 것입니다. 나를 통해 만들어지고, 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생각을 대신해 없듯이 신앙도 대신할 없습니다. 밥을 대신 먹어줄 없듯이 그리스도와의 만남 또한 대신해 없어요. 맛난 밥을 차려주고, 숟가락에 떠서 먹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씹고 넘기고 소화하는 일은 본인이 해야 합니다. 어떤 과일이 맛있고, 어떤 맛이고, 얼마나 달고 시원한지는 설명해 있습니다. 그러나 역시 또한 본인이 먹어보지 않으면 경험할 없습니다. 누군가의 설명으로 신앙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인도로 신앙의 길을 수가 없어요. 자신이 걸어야 합니다. 자신이 읽어야 하고, 느껴야 하고, 이해해야 하며, 알아야 하죠. 

오랜동안 우리교회에 다니다가 남편따라 교회를 옮긴 집사님 분을 지난 주에 만났습니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해서 만났는데요. 그분이 그러더라고요. 옛날부터 목사님이 매일묵상 해야 한다고, 나눔을 해야 한다고, 댓글도 달고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부담이 되고 힘들었데요. 하는 것도 어렵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남들이 보고 뭐라고 할까봐 두렵기도 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최근에 어떻게 말씀묵상을 하게 되었는데요. 글을 올리는 분이 밖에 없더래요. 열심히 글을 올리는 그분에게 미안해서 자기도 도와야겠다는 마음으로 묵상글을 그냥 편안히 올리기 시작했는데요. 그것을 하다가 자신이 치유를 받기 시작했데요. 자녀를 키우는데 버겁고, 관계도 좋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날 말씀이 에베소서였데요. 읽는데 내용이너나 잘해라라고 읽히더래요. 그래서 한테 그대로 이야기 했데요. 잘하라고 맨날 이야기 했는데 하나님이 엄마더러너나 잘하래.’ 그래서 엄마가 잘하기로 했어. 미안해 너에게만 뭐라고 해서그랬더니 딸이 변하더래요. 자신이 변하니까 딸이 변하더라고 말이죠. 이제야 말씀 묵상이 무엇인지 알겠다고, 이제야 말씀이 안에 중요한 것을 알았다고,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만나자고 했데요. 말을 듣는데 울컥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문제 해결의 출발은 아니라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영적인 개혁입니다. 말씀은 먼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쓰고 있는 것이죠. 나의 하루하루가 말씀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입니다. 신앙을 남에게 맡기지 마세요. 세상이 변해야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변해야 세상이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인이 되었기에 주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가 의인된 것이죠. 이처럼 가정도 내가 변해야 가정이 변하고, 내가 변해야 자녀도 변합니다. 좋은 교회는 누군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단하고 바로 서서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교회입니다. 이유는 그가 결단하고 섰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정은 좋아보이죠? 좋아보이는 가정에 내가 들어간다고 좋은 가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을 바꾼다고 좋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좋은 가정을 만들지 않으면 좋은 가정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까지 나는 움직이지 않고 좋아지기를 바라실 겁니까? 언제까지 나는 결단하지 않으면서 남의 결단을 요구하실 건가요? 영적 개혁은 바로 내가 결단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통해서 가정을 만들고, 사회를 만들고, 이웃을 만드는 , 그것이 영적 개혁입니다.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를 통해 은혜를 만들고, 사랑을 만들고, 말씀을 만들어 전하는 , 그것이 영적 개혁이에요. 여러분에게 영적 개혁의 물결이 일어나길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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