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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라서묵상

에스라17 - 신앙은 현실이 될 때에만 신앙입니다. 10:11~12

오늘은 에스라의 마지막 묵상을 나눕니다. 지난 주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인 개혁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나눠보려고 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기억하시나요? 제목은 문제 해결의 출발은 나입니다였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너무 아는 말이죠. 세상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그분의 연출이 세상의 시간들을 만들죠. 그러나 땅에 사는 저마다의 캐릭터들은 각자가 주인공입니다. 영화를 보면 특정한 주인공이 있죠. 이외 사람들을 우리는 엑스트라라고 부르죠. 그러나 그것은 주인공의 시각에서 영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일 뿐이고요. 만약 영화의 엑스트라 사람을 중심으로한 스토리를 전개한다면 아마도 그가 주인공이 되었겠죠.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그가 말과, 행동과, 지내온 시간들이 우리의 미래를 열죠. 

우리는 기적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기적은 본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적이라고 하죠. 그런 의미로 보자면, 기적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을 갈망합니다. 그렇다고 나의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갈망하는 것은 아니죠. 우리의 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데서 빚어집니다. 그런데도 기적을 바랄까요? 아마도 그것은 기적이라는 뜻을 다르게 해석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우리의 과거나 행동, 나의 태도와 패턴을 뛰어넘어 이루어지는 바람들일 거예요. 가령,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시험에서 100점을 맞거나,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합격을 하는 등을 말하죠. 그리고 그런 기적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도둑놈 심보죠. 말이 거칩니다만 한번 이런 생각을 보세요. 내가 열심을 다해 지금 공부를 하는데 어떤 아이는 공부도, 노력도 하지않고 시험에서 100점을 얻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이 아버지의 빽으로 시험 문제지가 유출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라면요? 나는 수없이 노력해서 취업의 문을 두드리는데 누군가는 그런 노력도 없이 척척 대기업에 합격한다면요? 심지어 자격도 되지 않는데 말이죠. 그것도 아버지나 집안의 후광으로 말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이런 일에 분노하게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보면 이런 분노를 일으킬만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가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없이, 인간성의 변화없이, 단지 교회를 다닌다는 것만으로 천국을 꿈꾸고, 어떤 노력과 애씀도 없이 성과를 바라는 기도가 난무하죠.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런 기적을 꿈꾼다면요? 그러면 세상은 어떤 마음이 들까요? 

하나님의 기적은 우리가 생각하는 기적과 다릅니다. 성경의 대표적인 기적이라 불리는 사건이라고 하면, 홍해를 가르는 사건이겠죠. 홍해가 갈라져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는 사건은 드라마틱합니다. 그런데 사건은 저절로 얻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미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안주하는 삶을 버렸어요. 400년이 넘는 습관화된 삶을 버리고 새로운 변화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선택을 사람들만이 홍해의 기적을 있는 것이죠.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는 기적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그의 앞에 나섰습니다. 어린 다윗이 나섰을까요? 아무도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스라엘의 누구도 골리앗 앞에 나서지 못했습니다. 왜요? 죽을까봐요. 그렇다면 다윗이 나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죠? 죽음을 각오했다는 의미입니다.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골리앗 앞에 것입니다. 이것을 우연으로 보지 마세요. 이것을 단순한 우리가 하는 기도처럼 보지 마세요. 우리는 힘들다고 말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해요. 그런데도 주님께 처절히 기도하거나 혹은 주님을 알려고 힘쓰지도 않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해요. 골리앗 앞의 이스라엘 군대 같아요. 이기고 싶다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아요. 그런데 반해 다윗은 골리앗 앞에 나서죠. 그의 기도, 그의 결단은 목숨을 담보로 기도요 결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적은 주님의 길을 나선 사람들만이 맛볼 있는 은혜인 거죠.

기독교가 욕을 먹는지 아십니까? 기독교가 쇠퇴하는지 아세요? ‘ 없어요. 나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이 없어요. 낮아지라고 말은 하면서 낮아지는 사람이 없어요. 섬기라고 선포하면서 겸손히 섬기는 사람이 없어요. 자기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나누는 것은 사역이 아니에요. 한번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보시죠. 여러분은 바울처럼 살고 싶으신가요? 오늘 찬양도 했잖아요.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그렇게 없을까? 에수님처럼, 바울처럼 그렇게 수는 없을까? 뛰어난 학식, 위대한 선교활동, 많은 사람들의 추앙, 놀라운 주의 일들과 결과들, 본받고 싶으신가요? 그렇다면 그가 죽지 않을만큼 매를 맞은 것이 5번이고, 로마식 태형은 3번이나 당했고, 돌에 맞은 적도 있으며, 3번이나 배가 침몰해 죽을 고비를 넘겼음은 물론 선교여행과 복음 전도로 인해 강도와, 위협과, 굶주림에 노출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닌 삶은 어떤가요? 고난당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아요. 고난이 앞을 막아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는 험난한 인생을 멈추지 않았어요. 넘어지면 일어나고, 쓰러지면 일어났어요. 그의 놀라운 말씀은 삶이 기초였고, 그의 사역 또한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걸은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습니다. 

영성은 쉽게 얻어지지 않아요.  상담을 몇번 받는다고 나에게 깨달음이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내가 나서고, 내가 일어나야 주어지는 것이 인격이고, 성품이며, 영성입니다. 에스라는 영적 개혁의 가장 중요한 기초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죠. 나의 영성 성숙은에게서 출발한다고요.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그럼 인생의 주인공은? 인본주의 신앙이냐? 그럴지도 몰라요. 말씀은 인생은 나의 이라는 메시지가 아니에요. 내가 움직여야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기적도 우리가 움직일 일어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 일하시니까요. 고난을 극복하는 스토리는 언제나 은혜롭죠.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자리일지라도 그것을 통과해 결국 아름다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위대합니다. 문제는 역사를 보려면 우리가 어려운 자리에 가야한다는 것이죠. 놀라운 기적을 보려면 우리가 고난의 자리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지예요. 바로 내가 주님을 드러내고, 바로 내가 주님의 말씀이 되는 ,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이제 에스라에게서 배우는 번째 영적개혁의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습니다. 나의 신앙은 현실이 때에만 진짜 신앙이 된다 것입니다. 지난 주에 용서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나눴는데요. 용서를 구하기는 쉽습니다. 회개도 쉽습니다. 말로 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진정 용서가 용서 되려면, 회개가 진정한 회개 되려면 뱉은 말이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실천이라고 하죠. 결단 또한 누구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결단이 진정한 결단은 아니죠. 결단이 실현되어야 결단입니다. 그것이 에스라가 우리에게 전하는 영적 개혁의 두번째 이야기입니다. 어려운 이야기 없죠? 결단을 했으면 반드시 실천하라는 말씀, 주님을 안다면 아는대로 행동하라는 말씀,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안다면 일을 행하라는 말씀, 그것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영적 개혁입니다. 이것으로 설교는 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데, 그것이 되는 것이 문제죠. 오늘 저는 에스라의 마지막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현실화 하는 방법을 2가지로 설명해 드리고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먼저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5절과 6절입니다.

5     말을 듣고에스라가 일어나서, 지도급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에게 그들이 말한 대로 하겠다고 맹세하라고 요구하니, 그들은 그대로 맹세하였다.

6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물러 나와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서,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백성이 지은 때문에밤이 새도록 밥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며, 슬피 울었다.

백성들이 에스라에게 나와 결단을 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자신들이 했던 잘못들을 버리겠다고 선언하고 나섰습니다. 에스라는 이를 다시한번 확인하죠.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 이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의 결단에 대해 어떻게 해야할지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던 같습니다. 어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두 속았어야죠? 또한 결단이 온전한 결단이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라의 번째 반응이 나옵니다. 그것은 7절에서 9 상반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어 읽어보죠.

7    잡혀 갔다가 돌아온 백성은 모두 예루살렘으로 모이라는 명령이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내렸다.

8    사흘 안에 오지 않는 사람은, 지도자들과 원로들의 결정에 따라 재산을 빼앗고, 잡혀 갔다가 돌아온 백성의 모임에서 내쫓는다고 하니,

9a    사흘 안에 유다와 베냐민 사람들이 모두 예루살렘에 모였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모일 것을 명령합니다. 그것도 3일만에 모이도록 못을 박죠. 심지어 만약 3일만에 모이지 않을 경우,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물론, 공동체에서 추방까지 있는 조건을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3 안에 모였습니다. 3, 기간이 재미있죠? 서양에서는 3이라는 숫자를 완전한 숫자로 여기기도 하죠. 삼각형을 완전한 도형으로 보고요. 동양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로 천지인 삼재를 논하기도 하죠. 기독교에서도 3 특별한 숫자입니다. 삼위일체가 그렇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짜가 3일이기도 합니다. 어느 때는 3 기회의 숫자이기도 하죠. 아이들에게 기회를 어떻게 하시나요? “ 동안 그만둬라! 하나, , 우리는 무엇을 정하려고 해도 적어도 삼세판은 해야죠. 저는 아버지께 참을 번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말을 제게 자주해 주셨는지 모르겠는데 그랬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을 떠오른 것은 작심삼일이었어요. 작심삼일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실테죠. 굳은 결심이 3 지나면 흐지부지 된다는 뜻입니다. 말에 자유하지 못한 자신이 들으면 가슴 찔리는 말이기도 하죠. 결심하고 조금만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과거로 돌아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니까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에스라가 결단하며 나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 꺼내든 화두는 3일이었습니다. 결심을 3 안에 확증하라 의미죠. 이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합니다. 번째는, 순종은 즉각적이어야 한다 것이죠. 죄송하지만 한번 따라해 보실까요? “순종은 즉각적이어야 한다.”

순종은 즉각적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마음먹은 일은 즉각적으로 행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목장모임을 설교를 가지고 나눕니다. 설교가 좋거나 교과서여서 설교를 가지고 나눔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나에게 주신 말씀, 주신 은혜를 바로 나누라는 의미가 훨씬 큽니다. 나에게 주신 깨달음, 혹은 마음의 찔림, 변화들을 즉각적으로 고백하고 행하라는 의미죠. 아무리 깨달은 것이 많고, 찔림이 있어도, 그것을 묵혀두면 여지없이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결심도 하루 이틀 미루면 잊어버리고 말죠. 아마도 생각조차 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선배 형에게 배운 것이 있는데요. 영어를 암기하는 방법이었어요. 모르는 단어는 즉시 찾아보는 습관이었습니다. 지나가다 읽은 영어도, 모르면 자리에서 즉시 찾아보는 것이었죠. 그러고보니나중에 찾아봐야지하면 어김없이 잊어버리더라고요. 잘못에 대한 고백도 즉시해야 합니다. 미루면 미룰수록 점점 하기가 힘들어지죠. 아니 점점 왜곡되고 잊혀집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에요. 분명 자신의 잘못임을 깨달았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면 점점 이런 생각이 들어오죠. “ 그게 나만의 잘못이냐?” “생각해보니 억울하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순종은 즉시 하세요. 누군가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즉시 해야 합니다. 미루면 잊혀질 뿐만 아니라 왜곡이 되죠. 특별히 나의 것을 나누어주는 일이라면 미루어지는 시간동안 아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것으로 일들이 생각나죠.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순종은 즉각적으로 하세요. 

본문을 조금 읽어나가겠습니다. 9 하반절부터 12절까지입니다. 조금 본문이니 나눠서 교독을 하죠.

9b     때가 아홉째 이십일이다. 백성이 하나님의 성전 앞뜰에 모여 앉아서 떨고 있었다. 사태가 이러한 터에, 큰비까지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0    드디어에스라 제사장이 나서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이방 여자들과 결혼하였으므로,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이스라엘의 죄가 더욱 커졌습니다.

11    이제 여러분의 조상의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고, 그의 뜻을 따르십시오. 땅에 있는 이방 백성과 관계를 끊고, 여러분이 데리고 사는 이방인 아내들과도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12     회중이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지금 성전에 모인 때가 아홉째 달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9월은 여름, 혹은 가을이잖아요? 그런데 유대에서는 달을 키스레브라고 부르는데 겨울이에요. 우리로 보면, 12월에 해당하는 달이죠. 게다가 비까지 내렸으니 매우 추웠던 같아요. , 에스라가 선포하죠. 이스라엘의 죄악을 끊어버리라고 말입니다.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이 동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겠다고 결단을 하죠.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라고 규정한 것이 이방여인과 결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혼을 하겠다는 거죠. 말이 쉬워 이혼이지, 어디 이혼이 그리 쉽습니까? 일단 사랑해서 결혼을 했다면 쳐보세요. 사랑까지 아니어도 뭔가에 끌렸다고 봅시다. 미모에 끌렸건, 애교에 끌렸건, 결혼까지 생각을 했다면 단단히 홀린 것입니다. 표현이 여성에 대한 예의가 없었다면 용서하세요. 조금 극적인 표현을 하고자 이런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결혼을 결심했다면, 더욱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결혼을 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사로잡혔기 때문에 아니겠어요? 어디 사람에게 사로잡힌 것이 끊기 쉽습니까? 우리가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하죠? 영어로 ‘fall in love’이라고 표현하잖아요? 여기서 ‘fall in’완전히 무너진 ’, ‘붕괴 뜻하는 숙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끊어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이별을 없으시죠? 실연 당해보셨어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이 쉬워요? 그것도 강제로 해야져야 한다면 말입니다. 잠도 자고, 먹지도 못하죠. 그게 해결되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실연 같은 당해보지 못한 분들, 그럼 게임을 끊는 것이 쉬워요? 담배 끊는 쉽습니까? 그런 결단 지금 하라면 하겠어요? 지금 이스라엘이 결단한 것은 가벼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지도 않고, 단번에 해결되지도 않는 일이에요. 그런데 어려운 일을 하겠답니다. 

결단은 본래 어려운 거예요. 어렵지 않으면 결단이 아니에요. 쉬운 것이라면 그냥 하면 되죠. 결단까지 하면서 필요는 없죠. 결단이 본래 힘들어요. 힘드니까 결단을 하는 거죠. 힘으로 없는 , 보통의 마음으로는 되지 않는 , 그것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결단에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죠. 13~14절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13    그렇지만 여기에 모인 사람들의 수가 많고, 때가 장마철이므로, 이렇게 바깥에 있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일은 우리의 잘못이 너무나 커서, 하루 이틀에 처리될 문제가 아닙니다.

14    그러므로 대표를 뽑아서, 모든 회중의 일을 맡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마을마다 이방 여자와 결혼한 사람들에게는 날짜를 정하여 주어서, 그들이 자기 마을의 원로들과 재판장들과 함께 나오게 하고, 때문에 일어난 우리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까 춥다고 했죠? 그리고 결단은 하루 이틀만에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도 아시겠죠? 그래서 그들이 결단을 이행할 있는 방법들을 제시하죠. 대표를 뽑았고, 원로와 재판장들을 세워 자신들이 결단을 이행할 있도록 치리하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신앙을 실현하고 땅에 실천할 있는 번째 방법이 등장합니다. 바로, 우리에게는 공동체의 영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따라해 보실래요? 우리에게는 공동체 영성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 혼자 결단을 이행할 없기 때문입니다. 혼자 결단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정말 의지가 강한 사람 아니면 결단 지키지 못해요. 어떤 사람은 자신이 의지가 강한 압니다. 자신이 결단한 것은 지킨데요. 그런데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그가 그렇게 의지대로 지키는 결단이 과연 무엇인지 말입니다. 기껏해야 자신에게 유익하고 이로운 이들에 대한 결단들입니다. 가령, 다이어트나 운동 같은 것들이죠. 조금 나은 것이라면 성공을 위한 공부 정도입니다. 스스로 정의를 위해 자신을 버리고, 공의를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결단은 못합니다. 

저는 가정을 하나님 세우실 처음에는 기쁨을 주시려고 세우신 알았어요. 가정에 기쁨이 있죠. 최근에 우리 주위에 결혼한 분이 계신데 분이 그랬다더군요. 결혼 좋으니까 빨리하라고요. 그만큼 결혼이 기쁨을 주죠. 그런데 가정을 세우신 것은 기쁨 뿐만이 아닙니다. 나의 결단을 지키고, 나의 미래를 지키는 일을 위해 가정을 세우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혼자 결단을 지킬 없기 때문이죠. 혼자 결단했을 때는 언제든지 뒤집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 앞에서, 남편 앞에서 결단한 것을 쉽게 뒤집을 수가 없어요. 자녀들 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진짜 자신을 지키려면 가족 앞에서 결단을 하세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단을 하세요. 그것이 공동체의 영성이고, 그것이 교회의 영성입니다. 교회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교회의 꿈에 나의 꿈을 맞추며, 교회의 방향을 따라 걷는 결단이 바로 교회의 영성입니다. 혼자 살고 싶지만 교회의 메시지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자고 말씀하시고, 나의 유익을 누리며 살고 싶지만 교회의 꿈을 통해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자고 결단하는 , 그것이 교회의 영성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결단은 즉각적으로 하세요. 결단은 쉽게 상하는 음식 같기 때문입니다. 결단을 혼자하지 마세요. 무엇을 해야 할지도, 어떻게 해야할 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혼자는 지키지도 못해요. 그래서 공동체의 도움이 필요한 거예요. 내가 흔들릴 잡아주고, 내가 넘어질 일으켜 영적 이웃 말이죠. 스스로 혼자가 되지 마세요. 영적으로 은둔하지 마세요. 지신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의 일원이 되세요. 공동체에 속하세요. 렇게 신앙이 혼자에 머물지 않고 현실이 되도록 하세요. 나의 신앙은 현실이 되어야, 실천되어야 진정한 신앙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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