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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에스라서묵상

에스라14 - 하나님은 내 안의 가시를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7:27~28

우리는 계속 에스라서를 읽고 있습니다. 혹시 에스라서의 묵상을 시작하면서 정한 주제를 기억하시나요? 회복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에스라서를 통해 우리의 영적 회복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영적인 회복을 가져다줄 여러 가지 솔루션들을 지금껏 제시해 왔습니다. 되도록이면 여러분의 삶의 현장, 여러분들의 주위를 영적인 분위기로 만들라고 말씀드렸고요. 여러분 주위에 말씀을 나눌 동역자들, 사역자들을 세우라고도 말씀드렸죠. 지난주에는, 매력 있는 사람이 되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말씀 가운데 관통하는 메시지가 있는데요. 그것은 그 모든 회복의 과정이 바로 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죠. 다시 말해, 회복의 전 과정에 나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이런 속담이 있죠. “손도 안 대고 코 풀려고 한다.” 우리에게는 수고도 하지 않고 큰 소득을 얻으려는 심보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불로소득이죠. 더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을 더 높게 평가한다는 점이에요. 수고하지 않고 얻는 것을 행운이라고 하고, 대단한 결과로 여기는 경향이 있죠.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얻은 것을 자랑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어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이라는 개념 가운데는 그것이 저절로 얻어지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을 마치 나의 수고는 전혀 없이 주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아마도 값없는 은혜라는 말에 기인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값없는 은혜 맞습니다. 값없다는 의미는 무슨 대가나 보상의 개념이 아니라는 뜻이죠. 우리가 잘해서, 또 우리가 무엇인가를 해서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이죠. 여기서 착각이 있어 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선물이 있고, 우리가 아무것 하지 않아도 주님의 복이 있는 줄 안다는 거예요. 그런데요. 생각해 보세요. 그냥 단순하게 사람들과의 관계성에서 생각해 보세요.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선물을 줄 수 있어요? 물론 나는 선물을 줄 수 있죠.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선물 나눠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 선물 받을 수 있을까요?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 선물을 받을까요? 선물이라는 것에는 적어도 관계성이라는 설정이 전제되어야 하죠. 나와 관계가 있어야 하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접하도록 요구하시고,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하시죠.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관계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것이에요. 우리의 수고도 여기에 있죠. 

제 전화기에는 약 500명가량의 연락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은 1/3도 되지 않죠. 나머지는 그냥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는 단 한번도 전화통화를 해 보지 않은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죠. 우리가 적어도 사랑을 논하려면 꾸준한 연락이 필요합니다. 만남을 가져야 하고요. 서로의 이야기를 깊이 나눌 수 있어야 하죠.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사람을 만나서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심지어 게으르면 제일 먼저 놓치는 것이 관계성이고, 사회성이죠.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분과 늘 함께하고,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시선을 갖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공동체라면 같은 생각과 같은 가치를 품어야 하죠. 

매월 목자모임을 하는데요. 목자들께 매번 꼭 부탁드리는 것이 있어요. 매일 묵상을 꼭 하시라는 거죠. 그 묵상에 공동체의 말씀과 가치관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이야기하려면 왜 이 교회공동체 목자를 하겠어요? 나 혼자만의 신앙생활을 하려면 왜 연합하는 공동체에 속합니까? 내 나름의 철학을 전파하려면 왜 하나님 이름을 팔아요? 비록 지금까지 생각이 달라도, 비록 익숙하지 않았어도, 이제 내가 주님의 자녀가 되고, 그분의 직분을 맡았다면 나의 자리에서 주님의 자리로 변화하는 수고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비록 내 삶이 좋고, 비록 세상에 익숙해도,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매일 주님께 묶인 바 되는 삶을 살기 위해 수고를 해야 하잖아요? 결코 수고 없이는 주님의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결코 수고 없이는 주님의 복을 받을 수 없어요. 그 수고는 다름 아니라 주님과 늘 함께하는 수고죠. 매일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분을 알아가며, 그분의 생각과 뜻을 따라 살아가는 수고죠. 다시 한번 말합니다. 주님께 가까이 가는 수고 없이 주님의 은혜를 맛보지 못해요.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셔서가 아니라, 주셔도 우리가 그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최근에 제가 운동 다음으로 연습하는 것이 있는데요. 베이스 기타입니다. 우리 한 장로님이 지난주 식사하면서 버킷리스트가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리스트 가운데 피아노치면서 자신의 18번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있으시데요. 그 말씀에 자극을 받아서 베이스 기타를 연습해서 찬양팀과 함께 찬양하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며칠 연습했는데 쉽지 않더라고요. 손가락이 돌아가질 않아요. 베이스 기타를 연습하기 위해 전문가들의 연주 영상들을 보았는데요. 자유자재로 치는 그들을 보면서 부러운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찌 나와 이리 다를까 싶어 자괴감도 들고요. 물론 음악성의 차이가 있을 테고, 가진 선천적인 재능에도 차이가 있겠죠. 그런데 그렇다고 그 전문가들도 날 때부터 베이스를 잘 친 것은 아닐 거예요. 가만히 저절로 베이스를 잘 치는 않았을 겁니다. 분명히 피나는 연습을 했을 것이고, 연습 가운데 자유로운 연주가 가능했겠죠. 많은 사람이 자유로워지고 싶어 해요. 그 베이스 연주가처럼 편안하게 베이스를  치고 싶어하죠. 손흥민처럼은 아니어도 공을 자유자재로 치고 싶어 하죠. 부의 자리에 거해도, 가난에 거해도 요동치 않은 바울처럼 나도 상황이나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기를 원하고, 포로와 같은 비참한 현실 앞에서도 정의와 신앙을 지킨 다니엘처럼 강한 영적인 멘탈을 갖기 원하죠. 그런데 그게 잘 안 되요. 그것이 과연 재능 탓만일까요? 혹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수고를 다 하지 않은 탓은 아닐까요?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심보 때문은 아닐까요? 자유는 수고의 산물입니다. 수고해서 얻은 실력의 산물이에요. 열심히 연습한 사람만이 자유로운 연주를 하고요. 매일 쉬지 않고 반복하며 노력한 결과가 은연중에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한번 말씀드렸잖아요. 운동선수들이 똑같은 동작을 계속해서 반복 연습한다고요. 그 동작과 똑같은 장면이 경기 중에 등장하는 법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반복되는 훈련과 동작으로 인해 경기에서는 창의적이고, 새로운, 그리고 자유로운 동작들이 탄생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는 기본기라고 말하죠. 기본기 없이 놀라운 실력을 꿈꾸는 것은 사치입니다. 기본기 없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어요. 문제는 그 이상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스도인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아무것 하지 않고 느낌과 감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치고 처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재능을 발견했다면 이제 그 재능을 바탕으로 수고를 다 해야 하죠. 주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주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창조주임을 알았다면 이제는 그분을 더 알려고 해야죠. 마치 연애를 하는 것과 같아요. 첫눈에 반한 사람을 만난다면 아마도 그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 첫인상으로 결혼을 바로 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요. 첫인상이 좋았다면 그것을 가지고 이제 더 알려고 노력하겠죠. 첫 인상은 그런 것입니다. 재능이 딱 그런 것이죠. 그 이후는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남유다가 바벨로니아의 포로가 된 지, 70년 만에 이스라엘의 1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1차 귀환자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일을 하죠.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들은 20년 만에 마침내 성전재건에 성공합니다. 이는 남유다가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된지 90년 만의 일이고,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지 정확히 70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에스라서 6장의 말씀이죠.   

세월이 지나 남유다를 침략해 식민지로 만들었던 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로 바뀌죠. 이로 인해 남유다 또한 바빌로니아에서 페르시아의 식민지로 변합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고레스왕은 칙령을 내려서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을 선포하죠. 이후로, 이스라엘의 귀환은 오랜 세월을 걸쳐 3차례로 나뉘어 진행되는데요. 다리오왕, 아하수에로를 지나 아닥사스다왕에 이르러 2차 귀환이 이루어지죠. 성전이 재건된 지, 58년만 이니까 에스라서 6장과 7장 사이에는 그만큼의 세월의 간극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2차 귀환을 이끈 지도자는 에스라였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에스라의 영적 인품에 대한 묵상을 나눴어요. 페르시아왕 아닥사스다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낸 그의 매력의 원인에 대한 묵상이었죠. 오늘은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에스라를 향한 아닥사스다 왕의 전폭적인 지지는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일반 왕과 백성 사이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식민지배자와 포로의 관계에서 일어났으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죠.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이렇게 상식을 벗어나고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이며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닌 특별한 원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분명한 사실은 아닥사스다가 유대인에게 호의적이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에스라에게 이리도 지지를 보내며 호의적인 이 아닥사스다는 역사적으로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이기에 더욱 이해하기 힘들죠. 아무튼 그가 하나님을 위해 일을 했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조금 알레고리컬하게 해석해서 잠깐동안 눈이 멀어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을 텐데요. 저는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는 분명히 정상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그런 행동을 했음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행동이 나왔을까요? 그가 에스라를 신뢰하고, 매력적으로 느낀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행동은 단순히 그 차원에 그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수하게 행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중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세계사에 문외한이어도 한 번쯤은 들어 봤을, 42.195Km를 뛰어 승전보를 알려, 마라톤의 효시가 된, 이른바 마라톤전투라 불리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영화 300으로도 유명한 테르모필레전투 등이 이 당시에 일어났죠. 남쪽으로는 이집트와 접경을 두고 서쪽으로는 그리스와 마주하여 영토 분쟁을 하던 시기였던 셈입니다. 당연히 자신들의 많은 식민지에 대한 전반적인 통치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식민지에 대한 자율통치로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을 다문화 관용정책의 효시로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습니다. 아닥사스다왕의 식민 관용 정책은, 에스라를 통해 가나안 지역을 위임 통치할 목적으로 귀환 정책을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신앙적인 배경에서 설명하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아닥사스다의 전략인 셈이고, 페르시아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통치 기반을 조성하는 일이었던 것이죠. 한마디로 하나님을 위한 일이거나 이스라엘을 위한 일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렇다면 이 일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을까요? 천만에요. 이 또한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좁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의 작은 사고 테두리에서 해석하려고 하죠.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은 다 교인들인 줄 알아요.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줄 압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교회 안에만 묶어두려고 하죠.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는 지극히 편협한 시각임을 알아야 해요. 하나님은 교회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류의 하나님이시고, 전 우주의 하나님이시죠. 믿는 사람이든 아니든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이고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든, 다른 민족이든, 누구나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아닥사스다왕의 행동은 자신의 지혜와 전략을 동원한, 자신을 위한 일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조차도 하나님은 선용하시죠. 때로는 세상의 지혜가 이 땅에서 통하고 위력을 발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일하신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위에 계시며, 우리의 지혜 위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자신의 지혜가 이스라엘의 환심도 얻는 것은 물론, 자신들은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식민지배체제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막힌 지혜라고 무릎을 치며 감탄했을 겁니다. 그런데 뛰는 놈 위에 나는 분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야말로 그들의 꼼수를 이용하여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다.

북한은 우리의 아픈 손가락입니다. 여러분에게 북한은 어떤 존재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북한을 우리나라에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믿습니다. 북한을 통해 우리의 인내를 훈련하시고, 북한을 통해 교만을 통제하시니까요. 비록 아파도 우리에게 주신 가시는 나를 절제하게 만드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런 가시가 뽑히길 원하죠. 가시가 없으면 좋겠다고 믿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힌 가시는 언제나 아픔을 주고, 시시때때로 돋아나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이죠. 믿음의 사람 바울조차도 자신의 가시에 대해 주님께 없애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프기 때문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그가 바라는 대로 응답하시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가시를 은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네 은혜가 족하다고 말이죠. 

북한이 망했으면 좋겠죠? 모두가 손들고 항복하면 좋겠죠? 그 지도자들을 처단할 수 있으면 좋겠죠? 그렇게 되어야 일이 수월해질 것 같죠?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더 큰 그림을 그리시기 때문이죠. 지금 북한의 태도는 다른 누구를 위한 태도가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비핵화는 우리나라를 위한 것도, 미국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자신들을 위한 거예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세계의 평화나 이웃 나라들을 위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을 다 알아요. 그래서 우리는 그런 꼼수에 넘어가지 말고 다 부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몰라요.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을 아는 사람들은 조금 더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꼼수, 그런 사실, 그런 속임수 다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요구를, 할 수 있다면 들어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하나님이 선용하실 일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일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모두를 위해 선용 되는 일로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동의하기 힘드신가요? 그렇다면 우리 내면의 일로 바꿔서 말씀드려보죠. 우리에게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시죠? 원수들은 다 사라지길 원하시죠?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 내 안의 가시, 다 태워 없어지길 원하시죠? 그러나 그 일이 하나님의 범위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더 크게 일하십니다. 가시를 통해서 더 아름다운 일을 하시고, 나의 상처를 통해서 더 귀한 일을 꿈꾸도록 하시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죠. 화초에게 온실이 하나님이 아닙니다. 진정한 화초에게는 비바람과 모진 풍파 속에서도 이겨내는 것이 하나님이에요.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죠. 안전한 장소, 안전한 방법, 안전한 환경이 자녀를 귀하게 키우는 방법이 아닙니다. 정말 귀하고 아름다운 자녀는 어느 곳에 있든지 흔들리지 않고, 어느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이죠. 조금만 환경이 나빠도 두려움에 빠지고, 조금만 어려워도 좌절하는 자녀라면 어떻겠어요? 그래서 늘 온실처럼 가꿔야 한다면, 여러분의 자녀가 그런 자녀라면 부모로서 어떠실까요? 

가시가 없어지는 것이 은혜가 아닙니다. 가시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를 읽는 것이 은혜죠. 나쁜 환경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어두울 때는 빛이 비추이고, 모진 비바람에는 우산이 주어지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은 멘탈이라고요.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편기자의 고백입니다.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은 우리의 대적들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우리 앞에 놓인 대적을 보며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가시들을 통해서도 일하시죠. 우리 앞에 놓인 가시들을 보면서 분노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나의 가시가 나를 아프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를 더 큰 자리로 이끄는 도구가 되도록 하세요. 나의 상처가 흉터로 남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 살이 돋도록 크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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