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전 어제는, 우리나라 역사 가운데 가장 불행한 날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고, 나라를 잃기도 했죠. 남북이 서로 나뉘어 전쟁을 치른 역사도 있죠. 그것은 나라와 나라, 혹은 이념간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은 국민을 지켜야할 국가가 국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사건입니다. 물론 그런 일이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주도 4.3 사건이나 밀양 양민 학살 사건등도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이었습니다. 제주도에서는 30,000명이, 밀양에서는 500여명이 학살되었죠. 그런데 이는 전쟁으로 인한 이념간의 대결로 불거진 참상이었습니다. 5.18은 그와는 달리 정권을 잡으려는 쿠데타 세력의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큰 차이이자, 불행한 역사죠. 제가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상기록을 보았습니다. 제 기억에는 스웨덴의 국영 방송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인데요. 차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는 장면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보는 내내 눈물을 그칠 수 없었고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이전, 단지 깡패와 불량한 폭도들에 의해 저질러진 흉악한 범죄쯤으로 보도된 것들을 믿고 있었던 저로서는, 그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전혀 다른 보도를 접하고서, 거대한 조직으로부터 조작된 상황에 의해 눈과 귀가 가리워져 있었다는 분노가 참을 수 없이 몰려왔습니다. 오죽하면 그 길로 달려가 고등학교 시절, 존경하는 선생님께 따지지 않았겠습니까? 왜 그때, 있는 그대로 알려주시지 않았냐고요. 왜 사실은커녕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셨냐고요. 차라리 몰랐었다고 말씀해 달라고까지 했었죠. 너무 큰 충격이었거든요. 혹시 영화 트루먼쇼를 보셨어요? 어떤 연출가에 의해 한 인생이 연출당하는 그런 영화인데요. 제가 그런 모습 같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무엇이 옳은지 알 수 없는데 대한 아픔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은 제게 사회에 대한 눈과, 진실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새롭고 단단한 시각을 갖게 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난주, JTBC 뉴스에서는 5.18과 관련된 소식 하나를 전했는데요. 5.18이 서구사회에 알려지고, 그 실상이 기록되게 된 계기에 대한 소식이었습니다. 한국에 외국인들로 구성된 월요모임이라는 것이 있었데요. 그들은 박정희정권 때부터 한국의 인권과 독재에 대한 실상을 염려하며 보도통제가 되는 한국을 대신해 서구에 기사를 전송하는 일을 했다는 거예요. 그것을 팩트시트라고 했는데요. [사실보고서]라고 해야 하겠죠. 재작년 천만 관객을 모았던 영화 [택시운전사]의 주인공 격인 힌츠피터 기자도 이 팩트 시트로 인해 한국에 와 취재를 하게 되었다는 거죠. 그들은 외국인으로 정부의 말만 듣지 않고, 직접 발로 뛰며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적어 전세계에 알렸습니다. 제게 가장 강렬한 울림이 된 것은 그들의 말이었어요.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데요.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전하고, 옳은 것을 주장하다가 잡혀가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큰 고통이 추방일 뿐이다. 한국에 있는 이들에 비하면 우리는 축복을 받은 위치에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자. 비록 추방을 당할지라도…” 이 말이 제게 너무나 큰 울림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자신이 유리한데 사용합니다. 가능하다면 내 자리를 통해 이득을 취하려하죠.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자리로 정의를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이 아니였으면 많은 진실들이 그냥 묻히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최근 밝혀진 그 팩트시트에는 광주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80%가 총에 의한 것이고, 게다가 그 총은 연성탄을 사용했던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연성탄이란 납 성분의 총탄으로 몸에 막히면 조각조각 터지고 녹아서 제거하기 어려울뿐 아니라 온몸에 퍼지는 그런 탄환입니다. 그 무자비성 때문에 국제협약으로 전쟁에서조차 연성탄의 사용을 금지시켰는데, 광주에서는 이 비인도적인 살생무기를 사용했던 것이죠. 현재는 정권탈취를 위해 광주를 타겟팅해서 폭동을 기획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실정입니다. 그 대상이 마산, 목포, 광주 등이었다고 하니 가히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죠.
우리는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품느냐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많이 듣고 보는 것을 따르고, 내가 선택한 것을 반석삼아 살아가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 주위의 듣는 소리는 그만큼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상황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재건 당시, 유브라데 서해안 관할구를 책임지고 있는 페르시아의 총독은 닷드내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전재건과 관련된 여러 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요. 그 이유는 성전재건을 멈추라는 아낙사스다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인 성전재건을 획책하고 있다는 보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왕명을 거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불법을 찾아내기 위해 조사를 시작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조사를 하던 중 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재건 사업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의 칙령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내 사마리아에 사는 이들의 밀고를 통해 이스라엘이 페르시아의 지배를 벗어나 자신들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부였고, 그로 인해 성전재건 사업을 중단했기 때문이죠. 닷드내는 이를 상세히 다리오왕에게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다리오왕은 즉시 옛 문서를 찾아 사실관계를 확인했습니다. 악메다 궁전의 공문서 보관소인 보물전각에서 고레스왕 원년에 발표된 칙령을 발견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성전재건과 포로귀환에 관한 사항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다리오왕은 즉시 총독 닷드내에게 이스라엘 성전 재건을 막지 말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고레스의 칙령에 내려진 모든 사안들, 즉 느부갓네살 때에 가져왔던 성전의 기물들을 돌려 주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경비도 지원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에다 자신과 왕자들까지 중보기도를 부탁합니다. 성전재건 사업을 멈추도록 했던 선왕과는 달리 그는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귀환한 후 여러가지 혼란을 겪었죠. 성전재건을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지만 여기저기 들리는 이야기는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성전건축에 필요한 것들도 부족하고, 게다가 방해와 모든 겁박과 오해와 조롱들까지 그들을 괴롭혔습니다. 어떤 이들은 지쳐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도 있고, 어떤 이들은 성전 공사를 포기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하나님의 음성이 희미해지고 자신들의 주변 소리가 더 크게 들리게 되었습니다. 4월의 찬양 기억하시나요? 사랑중의 사랑이라는 찬양 말입니다.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 혼자 뒤쳐진 것만 같고, 울 힘 조차 없을 때
세상의 소리가 들리네 사랑받을 자격 없다고 너는 할 수 없다고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에 큰 꿈을 가지고 뛰어들고 힘을 다해 힘차게 출발했지만 어려움이 가로막고, 방해들이 오면 낙심과 좌절을 겪습니다. 문제에 봉착할수록 주변의 소리가 더 커지고, 더 그럴싸하게 들립니다. 여기저기의 쑤덕거리는 소리가 더 비중있게 들리고 현실감있게 들립니다. 어느덧 처음 가졌던 하나님의 꿈은 허망한 것처럼, 비현실적인 것처럼 들리기 시작하죠.
영적전쟁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지요? 영적전쟁이란 우리 영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어떤 전쟁일까요? 바로 '선택'의 전쟁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선택의 길에 놓여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어떤 말씀을 선택할 것인가?"입니다. 영적성숙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그 어떤 말씀보다 우선하며 그 말씀이 가치관의 중심이 되는 영적 상태를 말합니다. 문제에 봉착할수록, 어려움이 우리 앞길을 막을수록, 우리는 어떤 말씀을 붙잡을 것인가?의 중요성을 알아야 합니다.
사마리아의 사람들은 성전재건을 방해하려고 거짓 고소를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결국은 자기의 말을 들으라는 것이죠. 세상의 겁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말, 세상의 논리를 따르라는 협박입니다. 왜 거짓말이 난무합니까? 왜 쑥덕거림이 있고, 왜 세력이 필요합니까? 그것이 다 내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어려워하는 것은 이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길을 가면 죽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죽는 길인 십자가의 길을 택했습니다. 죽는 길이고, 실제로 죽음에 이르렀던 그 길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 길이라고 말씀하시죠. 그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선택을 불안해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선택은 리스크와 연결되어 있고, 불안을 유발한다는데 있죠. 내가 선택한 것이 옳은 것일까를 늘 반문하고, 또 그런 불안을 사탄은 부추깁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 불안을 해소하려고 수많은 노력을 합니다. 아니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선택을 통한 리스크를 해소하고 불안을 감쇄시키기 위해 통계를 만들고, 분석을 하죠. 끊임없이 시장을 분석하고 미래 수익을 예상합니다. 우리가 알 수 없고, 가보지 않은 미래조차도 우리는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 생각들이 우리의 선택을 또 만듭니다. 내 경험, 내 지식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해 온 방식과 그들이 이룬 결과들이 우리의 선택의 기준이 되죠. 그런데 오히려 이런 기술들과 분석들이 우리의 선택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잊습니다. 마치 너무 많은 메뉴가 있는 식당에서 선택할 때 우리가 쓰는 방법이 있죠. 이 식당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음식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것을 주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으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선택을 했으니 내 입맛이 틀린 것이라고 여기는 꼴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많은 지식들 앞에서 우리는 눈을 감고 있는지도 몰라요. 무지와 부인이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이죠.
[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 ]를 쓴 정신분석학자 [레나타 살레츨]의 테드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녀의 대학교 시절 친구 가운데 마냐라는 친구가 있었데요. 그녀는 학비를 벌기 위해서 아르바이트로 자동차 딜러 일을 했답니다. 그녀는 어떤 고객일지라도 그들의 라이프스타일과 현재 쓸 수 있는 금액에 맞추어 자동차를 선별해 주었답니다. 아이는 몇 명인지, 어떤 용도로 차가 필요한지를 파악하여 가장 합당한 결론을 내렸던 것이죠. 그러나 마냐는 고객이 집으로 돌아가 심사숙고하기 전에 이런 말을 꼭 했답니다. “지금 이 차는 완벽합니다. 그러나 2~3년이 지나면 아이들도 클 것이고, 생활도 달라지겠죠. 수입도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면 아마도 좀 더 큰 차가 적합하겠죠. 그러나 지금은 이 차가 가장 적당합니다.” 이런 말을 듣고 돌아간 고객이 다음날 차를 사러왔을 때는 대부분 마냐가 정해준 차가 아닌 다른 차를 샀답니다. 사실 지금 당장 필요하지도 않는 더 크고 더 비싼 차를 산 것이죠. 마냐는 그렇게 최고의 딜러가 되었고, 결국 비행기 딜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살 때 꼭 그러죠. 이 종류의 차를 사려고 마음먹고 방문을 하지만 이것 저것 옵션을 추가하면 그보다 윗급의 차와 가격이 비슷해 집니다. 어느새 우리의 눈은 윗급의 차에 가 있죠. 이런 상술을 펼치는데 자동차회사는 최고입니다. 마치 우리가 미래를 아는 것처럼, 지금보다는 나아질 것을 예측하고 선택을 하지만 그것은 나의 선택이 아니라 분석과 통계, 혹은 상술의 타인이 정해준 선택을 따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선택이라는 뜻의 영어단어는 여러가지입니다. elect, select, choose 등이 있죠. 그러나 단어가 풍부하기로 유명한 헬라어에는 선택이라는 뜻의 단어가 하나뿐입니다. [에클레고]인데요. 교회라고 부르는 에클레시아가 이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이라는 뜻이죠. 그것이 교회이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말을 듣고 삶을 살아갑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구의 의견에 맞춰 여러분의 인생을 설계하고 비전을 품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다시 읽으면 이렇습니다. 이번에는 개역성경본으로 읽어보겠습니다.
에스라6: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길입니다. 그 말씀을 선택할 때 우리의 길이 형통합니다. 그 말씀을 따를 때 우리를 통한 하나님의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시119:105, 주님의 말씀은 내 발의 등불이요, 내 길의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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