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23. 15:29ㆍ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최근 어떤 분과 대화 가운데 질문을 하나 받았습니다.
“당신의 교회 교인들이 성장했다고 생각하는가?”
뜬금없는 질문에 저는 한동안 말을 못 했네요.
잠시 생각을 해 봐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교회 가족들은 예년에 비해 얼마나 성장했을까?’
그 짧은 시간 동안 제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저는 일단 질문자의 의도를 먼저 파악해야 했습니다.
‘그분이 말하는 성장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겠죠.
믿지 않던 이들이 변화되어 교회에 헌신하고,
사람들이 알아볼 만큼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며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그런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 생각을 바탕으로 보면 저부터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 시각에서 자랑할만한 것이 없는 거죠.
그렇다고 성장이 없었을까요?
오래전 교회 가족들의 기도 제목들을 저는 기억합니다.
제발 남편이 주일만이라도 교회에 나온다면
원이 없겠다고 기도하던 집사님이 계셨어요.
그 남편은 현재 집사님으로 주일을 빠지지 않으시죠.
무턱대고 사회에서 사귄 좋은 형 따라 교회에 왔던 어느 분이 있죠.
형한테 미안해서 교회에 나와주던(?) 그분은,
제일 믿음 가는 집사님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이
어느덧 남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삶으로 바뀌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던 사람이
어느덧 교회의 리더가 되어있습니다.
강한 자기 열정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던 사람이
어느덧 남의 열정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자신이 드러나기 원하며 일하는 사람이
어느덧 뒤에서 섬기고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이 되었어요.
이 정도면 아름다운 성장 아닌가요?
그런데도 언뜻, 성장이라는 말에 대답하지 못한 이유가 뭘까요?
어쩌면 성장이 느리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느리게 성장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에 길들여진 우리는
빠르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며 살죠.
아니, 더 나아가 느린 것은 실패라는 인식까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초고속 성장은 놀랍습니다.
서구사회에서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루었던 결과들을
우리나라는 몇십 년 만에 이루어 냈으니까요.
소위 이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르죠.
또 그 기적을 우리는 좋아합니다.
기적이란 한 마디로 빠른 시간 내에 이루는 초고속 성장을 말하죠.
성장의 표어 가운데 ‘하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학교 칠판 위에 걸렸던 표어입니다.
이는 행동을 강조한 문화입니다.
행동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행동하는 신앙, 행동하는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행동이라는 말에는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입니다.
생각이 없는 행동은 오히려 독이죠.
문제는, 생각보다 행동을 강조하는 문화입니다.
이는 효율성에 집착하는 문화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되든 결과만 만들어내면 된다.’는 사고죠.
이는 속도전을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장에도 속도가 필요했던 거죠.
외람됩니다만 우리 육체적인 성장에는 속도가 없습니다.
육체는 1년을 살아 10년의 성장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적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병’입니다.
본래 성장은 느립니다.
본래 성장은 시간이 필요하죠.
다만 우리는 비교의식과 경쟁의식 때문에
시간에 집착하게 되어 버립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는 이방 사람의 풍습을 배우지 말아라.”
사도바울도 비슷한 말씀을 했습니다.
로마서12:2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다 우상에 빠지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이를 보면 의문이 듭니다.
‘왜 이스라엘은 그렇게 우상에 집착했을까?’
오늘 아침에 이 문제를 곱씹어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스라엘은 지리적으로 묘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래로 이집트문명, 위와 옆으로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있어요.
소위 세계 3대 문명이라고 하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이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 3대 문명 중 두 곳이 이스라엘과 접경을 이루죠.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주변 국가들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습니다.
세계 최강이라 함은 빠른 변화와 발달을 기초로 하죠.
비교할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은
그들의 풍조와 풍습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겠죠.
그것이 바로 이방 우상숭배와 연결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는, 우상의 기초가 바로 속도가 아닐까 싶어요.
무엇이든 빠른 것이 진리고,
무엇이든 경쟁에서 우선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생각 말이죠.
경쟁 시대에서는 1등이 존중받았습니다.
그리고 공동체는 낙수효과를 기대하며 살았죠.
그러나 오늘날은 다양화된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양화란, 모든 사람이 존중받는 시대입니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빠른 사람도, 느린 사람도,
다 저마다 존중받고 가치 있는 사회죠.
그들이 다 함께 어깨동무하며 더불어 사는 사회입니다.
이제 속도가 아니라 방향입니다.
같은 방향이라면 함께 가야 하죠.
그래서 때로는 기다려줄 줄도 알아야 하고요.
때로는 손을 잡고 도움을 받아 걸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빠른 것만이 성장은 아닙니다.
느려도 성장은 성장입니다.
작아도 성장은 성장이에요.
느리게 성장하는 법을 배우세요.
빠르게 뛰면서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는 것보다,
느리게 걸으면서 주위 사람들과 함께 걷는 성장을 배우세요.
우리는 함께 갈 때 방향을 잃지 않습니다.
속도보다 방향입니다.
다른 이들의 속도에 비교하지 마세요.
오직 나는 나에게 허락하신 그 길을 걷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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