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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묵상23-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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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8:13-22

나 주의 말이다. 그들이 거둘 것을 내가 말끔히 거두어 치우리니, 포도덩굴에 포도송이도 없고, 무화과나무에 무화과도 없고, 잎까지 모두 시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준 것들이 모두 사라져 버릴 것이다." "모두 모여라. 그냥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견고한 성읍들을 찾아 들어가서, 죽어도 거기에서 죽자. 우리가 주님께 범죄 하였기 때문에, 주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독이 든 물을 마시게 하여서, 우리를 죽이려 하신다. 우리가 고대한 것은 평화였다. 그런데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이 상처가 낫기만을 고대하였는데, 오히려 무서운 일만 당하고 있다. 적군의 말들이 내는 콧소리가 이미 단에서부터 들려오고, 그 힘센 말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온 땅이 진동한다. 적군이 들어와서, 이 땅과 그 안에 가득 찬 것을 휩쓸고, 성읍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다 삼킨다." "보아라, 내가 뱀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어떤 술법으로도 제어할 수 없는 독사들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니, 그것들이 너희를 물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 땅에서 들려온다. (백성이 울부짖는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온을 떠나셨단 말인가? 시온에는 왕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백성이 또 울부짖는다.) "여름철이 다 지났는데도, 곡식을 거둘 때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구출되지 못하였습니다."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느냐? 그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현장을 손꼽으라면
홀로코스트는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홀로코스트는 독일의 나치당을 이끌던 히틀러에 의해
약 1,10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학살된 사건을 이르죠.
 그중 유태인이 약 600만 명에 달했습니다.
 당시 유럽 내 거주하던 유태인이 900만 명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약 2/3에 해당하는 숫자죠.



 

홀로코스트의 현장을 생생하게 다룬 여러 책이 있습니다.
 제가 읽은 책 가운데는,
안네 프랑크의 [안네의 일기]가 대표적이죠.
 코리 텐 붐의 [주는 나의 피난처]도 빼놓을 수 없는 책입니다.
 그중에 빅터 프랑클의 [죽음의 수용소]라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으로 봐서는 가장 수용소 생활을 잘 대변하는 책 같은데 
사실 이 책은 심리학 책에 더 가깝습니다.
 빅터 프랑클은 유태인으로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한
유명한 신경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거든요.
이 책의 제목인 [죽음의 수용소]는
한국 번역 과정에서 정해진 제목입니다.
 본 제목은, [Man’s search for meaning]
그러니까, [삶의 의미를 찾아서]가 더 정확한 제목이죠.



 

이 책은 아우슈비츠를 다룬 다른 책과 마찬가지로
수용소의 삶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저자의 관점이 조금 다르죠.
 그는 극단적인 삶에 놓인 인간에게 어떤 힘이 있는지를 관찰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 아픔 속에서 살아남는가에 초점을 맞춘 것이죠.
 그리고,
 그 극단의 삶 앞에서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만이
 반드시 살아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오히려 살아남느냐의 여부는 
그 당사자의 어떤 내적인 힘에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죠.
 그리고 그는 새로운 이론을 만듭니다.
그것은 오늘날,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
미움받을 용기로 유명한 아들러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의 3대 정신의학 이론으로 평가받는 
‘로고 테라피(Logotherarhy)’입니다.

 로고 테라피란, 헬라어 로고스(말씀, 의미)에서 유래되었는데요.
 인간 존재의 의미와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죠.
 다시 말해서 삶의 원동력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실존적 공허’가 있습니다.
 뚜렷한 삶의 목적을 찾지 못한 채 허무감에 빠지죠.
 내가 왜 존재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지, 왜 사는지 
그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경우가 많아요. 
어느 조사에 의하면,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내 삶의 목표와 의미를 찾는 것이라는 응답자가 
전체 78%에 달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삶의 목표와 의미가 불분명하다는 뜻이죠. 



 

빅터 프랑클에 따르면, 
자신의 가치에 대해 상실할 때
 여러 정신적인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합니다.
 강박과 우울, 인간관계의 위기의 원인이 
바로 스스로의 가치를 상실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고, 
또한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잃을 때
 경험하게 되는 것이라는 거죠.
 실제로 빅터 프랑클 박사는 아우슈비츠 현장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이들이 얼마나 허무하게 죽어가는지를 보았습니다.
 아무리 육체적으로 건강해도, 
자신의 가치를 잃고,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은 
한순간 모든 것을 잃는 것을 목격했어요.
 반면, 왜소하고 연약한 모습이지만
 자신이 사는 이유와 의미를 붙잡은 사람은
 끝끝내 견뎌내는 것을 본 것이죠.
 그들은 고난이 심할수록 반드시 전쟁은 끝날 것을 믿었고,
 내일의 고통을 묵상하기보다
오늘의 견딤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죠. 
“결국 그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지는
 그 개인의 내적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폭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영적 공허를 채우기 위해 우상을 섬기고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방황은, 
돈과 명예, 쾌락과 자기만족에 사로잡히게 만들죠.
 


 

나무가 땅에 뿌리를 박아야 살듯이,
 우리도 하나님에 뿌리를 내려야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니까요.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 이 자리에 표현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의 의미이니까요. 
크든 작든, 높든 낮든, 
금 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우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들이니까요.
 


 

어쩌면 신앙생활의 가장 근본은,
 나의 삶의 이유가 하나님이라는 것인지도 몰라요. 
나의 존재 이유가 그분께 있다는 것, 
나의 가치가 그분의 선택을 받은 것에 있다는 것, 
그것을 아는 것이 신앙의 근본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오늘도 하나님께 선택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셨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으로 말이죠. 
그만큼 값어치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사셔서, 그분의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거죠.
 아무리 어려워도 그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삶의 목적은 변하지 않아요. 



 

여러분은 천하보다 귀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존재예요.
 오늘도 그렇게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사세요. 
바울을 고백처럼…


 

로마서 14: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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