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이 세상의 풍조를 평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11장 말씀인데요.
마태복음11:16~19,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길까? 마치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 하고,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 한 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이해가 안 가죠?
일단,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는 대목은 좀 익숙할지도 모릅니다.
많이 인용되는 말씀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이 말씀이 인용은 되어도 잘못 해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이 말씀을 예수님의 불평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그렇죠.
이 시대가 기뻐도 기뻐하지 않고, 슬퍼도 슬퍼하지 않는,
그야말로 공감이 없는 세대라는 식의 해석입니다.
틀리지 않은 말입니다.
이 시대가 공감 능력이 떨어지죠.
슬퍼하는 자와 같이 울어주지 못하는 세대이고,
기뻐하는 자를 시기하는 세대이기 때문이죠.
예수님은 탁월한 공감 능력의 소유자셨습니다.
그의 사랑의 원동력은 곧 ‘공감’이셨죠.
그의 용서의 출발점 역시 ‘공감’입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하시죠.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말, 좋은 해석이라도
그 말씀의 의도와 다르다면 왜곡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말씀은 비유의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연상하신 장면이 있는데요.
그것은 장터에 놀고 있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이 노는 곳에서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너희에게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을 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해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이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이들이 모여서 역할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한 아이는 피리를 불면, 다른 아이는 그에 맞춰 춤을 추는 거죠.
한 아이는 곡을 하면, 다른 아이는 그에 맞춰 땅을 치며 우는 행위를 하는 겁니다.
그런 놀이를 만들어 하는데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을 해도 울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장면이 무척 불공정합니다.
한 아이는 앉아서 피리만 붑니다.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아이는 장단을 맞춰야 하죠.
어릴 적, 우리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면 재미있었습니다.
동생이 오빠에게 역할을 시켜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심지어 대사까지 가르쳐 줍니다.
근데 또 그걸 오빠가 또 받아주고 그대로 합니다.
모든 상황은 동생이 조정하는 거죠.
그걸 오빠는 이리하고 저리 하며 맞춰주고요.
저는, 불평 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오빠를 착하다고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모든 시나리오를 짜고 계획을 하는 동생의 창의력을 칭찬해야 할지 몰라서
난감한 적이 있어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바리새인들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멋대로 정해놓은 역할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죠.
자신들은 피리만 불면서
그것에 따라 하지 않는 이들을 지적하고, 힐난하는 겁니다.
심지어는 이단으로 만들어 버리기까지 하죠.
겉으로는 역할분담을 해서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불공정한 관계들을 만들고,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사람들인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가난한 삶을 살면,
가난하고 찌질하게 산다고 욕을 하고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웃과 먹고 마시면,
잘 먹는다고 뭐라고 하는 거죠.
우리가 저지르는 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스스로 범죄 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죄를 짓는 자범죄(Sin of commission)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죄죠.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지 않아서 저지르는 죄입니다.
이것을 태만(Sins of Omission)이라고 부르죠.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죄를 의미합니다.
야고보 기자는 이렇게 말하죠.
야고보서4:17. 그러므로 사람이 해야 할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됩니다.
태만 죄가 일으키는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안 해도 된다는 착각입니다.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마치 가족들에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식입니다.
그래도 사랑할 것이고, 그래도 봐줄 것이라는 식이죠.
마치 내가 그들을 잘 안다는 식입니다.
이는 하나님께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죠.
이것쯤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가 안 해도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실 것이라는 식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합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린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것은 뿌리 깊은 문화입니다.
쉽게 버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께 익숙해 있는 민족이죠.
그럼에도 우상을 숭배하고, 그렇게 살았던 이유는,
그저,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봐주실 줄 알았던 거죠.
그래서 마음대로 하고, 마음대로 구는 것입니다.
그것이 태만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악한 것'을 하지 않아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한 것'을 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욕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다고 사랑이 싹트지 않아요.
사랑은 오직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고,
좋은 마음을 주면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도 그렇습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관계를 만드는 것은
마치 미신과 같아요.
하나님은 사랑을 원하십니다.
아무 문제없다고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만나고, 함께하고, 애쓰고,
더 나아가 수고도 해야 하고, 땀도 흘려야 하죠.
때론 돈도 써야 하고, 때론 고생도 해야 합니다.
마음도 써야 하고, 인내도 해야 하죠.
그렇게 나를 써서 만드는 것이 사랑이고,
그렇게 행해서 형성되는 것이 관계입니다.
우리의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닐지도 몰라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께 사랑받을 것이라는 생각,
아니 내가 마음대로 하면서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우상일 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날이 흐립니다.
감기 조심하시고요.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그것은 저의 마음이고요.
여러분은 언제나 좋은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분들이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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