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는 다림사역이라는 것을 합니다.
다림이라는 뜻이,
위로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의 생각을 기준 삼아 사역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모든 이들에게 차별 없이
평등과 공평으로 사역하는 것이죠.
그래서 교육적 불균형 해소를 위해 교육기관을 만들었고,
차별 없는 공동체를 위해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또한 사회적 지위나 지식의 유무까지도 떠나,
생명에 대한 가치만으로 대하고 받아들이는
공평과 공의가 세워진 아름다운 도피성 같은 곳을 꿈꾸죠.
그곳에서 진정한 사랑으로 회복되고,
그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며,
보배롭고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는 자존감이 세워지길 바랍니다.
다림교육에는 어떤 정해진 프로그램이 없어요.
그저 이 철학, 이 영성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합니다.
그런데 가끔 저는 고민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 고민은 단순합니다.
“정말 이 사역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까?”
이것이 그 고민입니다.
이 고민이 생겨난 원인이 있어요.
어떤 일을 하다 보면 빠지는 함정 같은 것이 있습니다.
보통 그것을 매너리즘이라고 하는데요.
타성에 젖는다고 하죠.
타성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족으로 일을 하는 것이 타성이죠.
이미 직업은 누군가를 위해 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린 바 있습니다.
인간에게 타락은,
누군가를 위해 일하는 존재가,
자신을 위해 누군가에게 일하는 존재로 바뀔 때
드러나는 현상이라고 말씀드렸죠.
타성도 어느 순간, 남을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덧 나의 만족을 위해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혹시 좋은 일하려는 내 만족으로 다림사역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신에게만 관심하며 사역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인가 열심히 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나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어떨까요?
물론 요즘 사회가 자기애, 자기만족을 중시하는 사회죠.
자존감이라는 것을 자기만족과 연결하죠.
그런데 저는 과연 자존감이 자기만족일까 싶어요.
그런 전문가들의 의견에 동의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존감이란,
내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존재라는 개념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내가 누군가를 위해 사용되는 존재,
내가 누군가를 일으키고 살리는 존재,
하나님을 대신할 존재,
그 가치를 갖는 것이 자존감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받고 싶은 것은 제사가 아니다.”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왜 그런 제사를 우리가 드리는 것일까요?
받으시는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데…
원하지 않는 선물을 주는 사람들이 있죠.
왜 주는 것일까요?
그 사람에게 필요하지도, 받고 싶지도 않은 선물을요.
그게 자기만족 때문 아닐까요?
받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든,
‘나는 주었다.’ ‘나는 할 일 했다.’는 식으로 말이죠.
더 나아가 ‘나는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는 너 차례다.’라는
협박 아닌 협박도 등장합니다.
예레미야 7장은 [성전설교]라는 별칭이 붙은 장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 겉과 속이 다른 모습,
그러면서도 성전에 나와 마치 위대한 예배자인 양 자랑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자기만족으로 예배하면서도
마치 하나님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는 우리를 향해,
그런 모습이 우상을 섬기는 모습이라고 일갈하시죠.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큰 우상은,
자기만족인지도 모릅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예배하고,
자기만족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림교육이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해 주세요.
우리의 신앙이 자기만족에 빠지지 않게요.
다른 이들에게 반찬을 나누고, 도움을 주고,
기도하는 모든 일이 나의 만족으로 하지 않기를 말입니다.
그 자기만족은,
남을 도우나 행위만 남고 사랑은 없는 짓이니까요.
자랑만 남고, 정작 이웃을 향한 이해는 없으니까요.
딸 아이가 중학교 시절,
반 친구 가운데 이름을 대면 알만한 기업의 손녀였어요.
그 기업은 식료품을 주로 만드는 기업이었는데요.
그곳에서 라면도 만들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이 친구에게 충격적인 말을 들은 딸이
저에게 와서 전해 주더라고요.
그 친구가 하는 말이,
“할아버지가 절대로 라면 먹지 말라고 했어”라고 했다는 거예요.
재미있죠?
라면 만드는 회사에서 그것을 먹지 말라고 했다니…
우리의 신앙도 어쩜 비슷할지 모릅니다.
예배를 하지만 예배를 믿지 않고요.
말씀을 듣지만 말씀을 품지는 않아요.
누군가를 돕지만 그들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는 않죠.
이웃사랑을 외치며 다림사역을 하면서도,
정작 내 교회, 내 목장에는 불편한 사람이 들어오지 않길 바라죠.
이런 행동이 우상숭배일지도 모릅니다.
사도바울이 말했습니다.
롬12:1,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기 원하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나’이고요.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은 나의 행동이 아니라 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묵상이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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