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분당의 한 교회에서 행한 설교 때문에
논란이 되었나 봅니다.
그 교회에서 한 교구를 맡아 사역하는 목사님이,
동성애와 관련된 설교를 했다가
많은 기독교 언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동성애와 같은 민감한 문제들은 설교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교회는 사회에 영향력을 가진 교회로,
많은 주목을 받는 대형교회이기에 더욱 논란이 뜨거웠던 모양이에요.
그 설교의 원문을 구해 읽어보았습니다.
무엇이 논란이 되었을지,
왜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성토했을지 알겠더군요.
설교의 요지를 단순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계의 대체적인 비판은
상식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편협되었고,
이해하고 도와줄 마음보다 공격하고 적대시하는 마음이라고 전제하면서,
좀 더 넓은 마음으로 동성애를 바라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끝내는 설교자가 교회 홈페이지에 사과문을 올렸더군요.
슬쩍 훑어봐도 여러 사람의 비판 글들이 이곳저곳에서 보였습니다.
이 설교에 대한 비판도 단순히 정리하면,
낭만적인 감성으로 악을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지,
동성애자들의 음란함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파괴할지,
서구 교회들이 이를 받아들임으로 어떤 몰락이 있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기독교는 악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고 적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른지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잘 모르겠습니다.
동성애의 현실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 그 설교자나 반대자의 입장을 깊이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설교 원문에 있는 내용 한 가지가 떠올랐습니다.
설교자는 동성애 비판에 몰두하는 기독교계에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경에는 동성애도 악이고, 탐욕도 악으로 규정하죠.
비중으로 따지면, 9;1, 아니 9.5:0.5 정도의 비율로
탐욕에 대한 경고가 월등히 많습니다.
그런데 왜 기독교계는 탐욕에 대해서는
자동차로 길을 막고, 집회를 방해하고, 삭발하지 않느냐고요.
이는 탐욕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이지만
동성애는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이기에
반대가 집중된 것은 아닌가 하는 반론이죠.
한마디로,
탐욕은 나도 바라는 일이기에 침묵하고,
그나마 동성애는 내가 하지 않는 일이니까 기를 쓰고 반대하는
그런 논리가 아니냐는 물음입니다.
이 말에 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기 때문이죠.
혹시 위 사건의 논란에 대해 짧은 코멘트로
여러분에게 오해를 드리는 우를 범할지도 모르겠다는 노파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말은 조금 깊이 묵상해 봤으면 해요.
내가 익숙하고 마음이 끌리며,
하고 있는 악은 괜찮고,
내가 하지 않는 남의 악은, 죽어라 비판받을 악입니까?
소위 ‘내로남불’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시각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죠.
렘7:9~10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9절의 말씀은 십계명에 나오는 말씀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계명을 무시합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에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죠.
주님의 말씀은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외치는 꼴입니다.
주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주일성수하는 것으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말하는 식이죠.
예배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자들의 고백입니다.
예배는 형식의 제사도, 참여하는 시간도 아닙니다.
그 속의 마음이죠.
말씀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내 마음에 새겨져 심기워지는 것이 말씀이지,
그것을 듣고 앉아있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예배 오지 않는 이들을 탓하죠.
그러면서 말씀 듣지 않는 이들을 욕합니다.
그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말씀을 품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면서 말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형식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나의 마음을 고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에 사랑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 선포가 내 마음을 바꾸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있고 마음이 없으면 그것이 ‘외식(外飾 Show-Off)’이고,
입에만 있고 마음에 없으면 그것이 ‘사기(詐欺 fraud)’입니다.
교회 다녀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를 믿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경을 읽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성경을 이 땅에 실현해서 그리스도인이고요.
남을 도와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나와 다른 그 이웃을 사랑해서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을 살기 원합니다.
유불리를 떠나, 유무익을 떠나,
상대방의 반응이나, 나의 만족까지 떠나
묵묵히 주님의 길을,
나에게 주신 소망의 길을
오늘도 걷는 우리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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