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이나 은을 얻으려면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정련, 혹은 제련의 과정인데요.
보통은 높은 온도에서 불순물을 걷어내는 방법이 사용됩니다.
확실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1000도 이상의 용광로에서 40일 동안 세 번 살아남아야 순금이 된다는 말도 있죠.
이렇게 정련된 금을 순금, 혹은 정금이라고 하죠.
성경에는 금의 정련 과정을 비유한 말들이 곧잘 나옵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욥기의 말씀이죠.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잘 아시는 말씀이죠.
그런데 우리가 주로 읽는 새번역 번역본으로 읽으면 조금 뉘앙스가 다릅니다.
욥23:10 하나님은 내가 발 한 번 옮기는 것을 다 알고 계실 터이니, 나를 시험해 보시면 내게 흠이 없다는 것을 아실 수 있으련만!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시나요?
순금이 되는 과정의 주체가 다르게 느껴지지 않으시나요?
암튼 지금은 이 차이를 묵상하려는 것은 아니고요.
위 두 번역의 인칭 화법이 다르다 해도 공통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정금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하는 연금술사시라는 사실이죠.
정금의 과정은 지난합니다.
깨고 부수고 태워야 합니다.
조금의 불순물도 자리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하죠.
그 전체의 과정은 가혹합니다.
완전히 태우는 과정을 풀무질이라고 하죠.
그 과정을 통해 전혀 다른 물질로 변하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런 풀무질이 있습니다.
때론 고난이 그렇고, 이로 인한 상처들이 그렇습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낙심케 하는 일들이 앞에 놓이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씩 배워갑니다.
성장의 과정이 늘 그렇습니다.
나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입는 과정이 성장이죠.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것들로 채우는 과정이죠.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
뼈를 깎는 고통 너머로 자유가 주어지고요.
그러나 이 과정은 위기이기도 합니다.
같은 고난 앞에서
어떤 이는 깊이 패인 상처로 곪아, 폐인이 되기로 하고,
어떤 이는 상처 위에 새 살이 돋아 성장하기도 하니까요.
오늘 본문도 정금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이 말씀은 마치 하나님의 하소연처럼 들립니다.
정금의 과정을 통해서조차 정금이 되지 않는 것을 보며
두손 두발 다 들었다고 낙심하시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집니다.
그리고 포기하시는 듯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이 느낌은 지금껏 하나님의 모습과는 배치됩니다.
그분은 나를 버리지도 꺾지도 않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분은 결코 내 곁을 떠나지 않으신다고 하셨으니까요.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이 느낌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들렸습니다.
내 앞에 놓인 풀무질은 너를 위한 것이라고요.
내 앞에 놓인 아픔과 상처들은 너의 성장을 위한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포기하지 말라고 외치는 외침으로 들렸습니다.
마치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선수를 위해 코치가 최선을 다해 운동을 시키는데,
그것이 힘들다고 오히려 자신의 재능마저 버리며
선수를 그만두는 것처럼 말이죠.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죠.
‘저 코치는 나를 미워해.. 나를 괴롭혀.. 내가 잘되는 걸 못 봐!’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코치는 여러분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목사인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인가요?
여러분의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상처 위에 생긴 딱지를 보며 무엇을 생각하시나요?
그것을 아픔의 상징으로 보며 긁는다면 흉터로 남고요.
그것을 나음의 상징으로 보며 기다리면 새살이 돋습니다.
나의 상처를 괴로움으로 받아들일수록 상처는 아픔이 되고요.
나의 상처를 새로움으로 받아들일수록 상처는 감사가 됩니다.
아픔 없는 인생은 없어요.
괴로움 없는 인생 또한 없고요.
우리의 인생은 아프고 괴롭고, 힘듦의 연속이에요.
그러나 그게 인생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죠.
어제의 피부를 찢고 자라야 하고,
어제의 생각을 버리고 넓어져야 하죠.
그렇게 아프면서, 버리면서, 새로워지면서 걷는 것이 인생이에요.
그러니 인생에서 아픔을 묵상하지 말고, 성장을 묵상하세요.
어제의 아픔으로 살지 말고 오늘의 새로움으로 사세요.
하나님은 아픔에 머물지 않고 기쁨에 머무시는 분입니다.
풀무질하시는 하나님은 정금을 꿈꾸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아픔 속에서 정금을 꿈꾸길 소원합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을 꿈꾸고,
홍해 앞에서 열리는 길을 꿈꾸며 살길 바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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