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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묵상22- 신앙은 자정 능력이에요. 예레미야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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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정능력(自淨 purification)이라고 하죠.

홍수가 나거나 폭염이 일면,
강물은 흙탕물이 되거나 녹조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또다시 맑은 물로 변하죠.
오염되었던 강물이 스스로 정화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미세먼지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사실 미세먼지 문제는 어제오늘 일만은 아닙니다.
1970년대 영화관에서 필수적으로 상영되었던 대한뉘우스에
미세먼지 심각성이 보도되었던 것을 보면
미세먼지 문제는 늘 있어왔던 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늘 있어왔던 미세문제를 주로 해결해왔던 것은
어떤 대책이나 인위적 방법이 아닌 숲이었습니다.
숲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하죠.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쓰레기들을 땅에 묻었죠.
놀랍게도 땅은 그 불순물들을 스스로 정화하고 분해해서
비료로 만드는 놀라운 기술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땅에 쓰레기를 묻거나 버리면 잡혀갑니다.
플라스틱이나 비닐 등의 썩지 않는 물질들로 인해
땅의 오염이 심각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말이
100년이 걸린다는 등의 시간 계산이죠.
어디선가 보니
생활 쓰레기가 땅에서 분해되는 시간을 적어놓았더라고요.
사과 등의 먹거리는 2주 정도,
옷가지 등은 1년,
비닐은 수십 년,
알루미늄 캔은 수백 년,
심지어 폐건전지는 수백만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놀랍죠?
그런데 이 말을 뒤집어 보면,
몇백년, 몇만년이 걸려도, 결국에는 정화된다는 말이잖아요?
물론 땅이 썪는 고통이 따르지만
결국에는 땅이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는 말이죠.
이는 결코, 그러니 땅에 쓰레기를 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
오해는 없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하시면서
가장 공을 들이신 것이
제 생각에는 바로 이 정화작용이 아닐까 싶어요.
좋은 환경, 좋은 시간만 존재하지 않을 것을 아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쁜 것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심지어 원치 않고, 맞지 않는 것이 일어나도
스스로를 회복시키고, 정화시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사람에게도 이 정화작용이 존재합니다.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하는 분들이 계시죠.
보통 우리는 잘 먹어야 건강할 것 같은데요.
사실 우리가 먹는 것으로 인해서 얻는 영양분보다는
음식을 섭취해서 소화하느라 장기가 지쳐버려
건강을 잃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하더라고요.
가만히 보면, 야생동물은 아프면 무조건 굶죠.
약도 없고, 치료 방법도 따로 없으니 어쩔 수 없겠죠.
그런데 굶으면 몸은 스스로 치유능력을 발휘합니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아프면 약 먹고, 또 음식을 먹죠.
먹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정확한 정보는 아닌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인데요.
사람의 몸은 24시간 아무것도 먹지 않을 경우,
스스로 자가치유 능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 또한 단식을 권장하는 말이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다만 우리의 몸은 자연치유 능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다고요.

이 정화작용은 몸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오염된 공기가 맑은 공기로 바뀌는 숲의 작용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나쁜 말과 나쁜 감정들이
좋은 말과 좋은 반응으로 바뀌는 자정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죄를 의로 바꾸며,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우는 일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죠.
때로는 양심으로, 때로는 인격과 지성으로,
안 좋은 의도들이 정화됩니다.

어제 수요영성예배에서 바울의 가장 위대한 점은,
학식도, 가문도, 경력도 아니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꿈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어려움이 와도, 고난이 와도, 가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부유해져도, 많은 박수를 받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아도,
권력의 회유와 유혹을 받아도,
변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가장 위대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상황이 나빠져도 마음이 변하잖아요.
우리는 조금만 유리해져도 생각이 변하고요.
소위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듯 말이죠.
그러나 바울은 어떤 때, 어떤 상황에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쓰임 받는 자가 되려는 꿈을 버리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쓰임 받는 자로 살아가기에
부유해져도 욕심부리지 않고,
잘 나가도 교만하지 않았고요.
가난해도 낙심하지 않았고,
고난이 와도 포기치 않았던 것이죠.

신앙은 자정 능력이에요.
나쁜 것이 와도 좋은 것으로 바꾸는 능력이죠.
원수도 사랑으로 바꾸는 능력 말입니다.
악을 의로 바꾸고, 죄인을 의인으로 만드는 능력,
위험을 기회로 삼고, 고난을 의의 길로 삼는 능력 말입니다.

그런데 그 자정 능력이 사라지면 그것이 곧 죽음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자정 능력이 없으니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딱 그 꼴입니다.
넘어지면 일어날 줄 알아야 하고,
떠났다면 돌아올 줄 알아야 하죠.
그런데 그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뉘우치지 않고,
잘못된 길을 가도 잘못인 줄 모르는 거예요.
양심에 화인 맞은 상태인 거죠.

사랑하는 여러분,
기쁨만 있는 인생은 없어요.
다만 고난을 기쁨으로 바꾸는 자정 능력이 발동해서
우리에게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이산화탄소를 먹고 산소를 배출하듯,
우리의 신앙은 죄를 의로 바꾸는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멀리 떠난 것이 죄가 아닙니다.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오늘 내가 저지른 실수가 핵심적인 죄는 아니에요.
그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고 돌아오지 못하는 것,
회개하고 다시 시작하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기를 바래요.
나를 정화시키는 필터가 있기를 바랍니다.
나쁜 말을 좋은 말로 정화시키는 필터 말이죠.
고난을 감사로 바꾸는 자정의 능력,
아픔을 성장으로 바꾸는 치유의 능력이 있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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