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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묵상30- 고통이 도움의 시작입니다. 예레미야 11: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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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은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실까요?”

약 한 달 전,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유람선 허블레아니호가 침몰해 한국 여행객 등 28명이 희생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은 단지 헝가리를 여행하는 여행객이었어요.
너무도 잘 아는 세월호에는 아직 꽃을 피우지 못한 고등학생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단지 수학여행을 가는 중이었어요.
이런 사고를 접하면,
왜 이런 일이 이들에게 벌어져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가슴 떨림의 궁금증이 저 밑에서부터 올라옵니다.

헤롤드 쿠쉬너라는 분이 있습니다.
유대교 랍비로 작가인데요.
그가 오래전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은,
[왜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가?(When Bad Things Happen To The Good People)]입니다.

그는 천성적으로 선한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도와주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신망도 높았죠.
신앙인으로, 성경 교사로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시련이 찾아 왔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3개월이 채 되지 못해 병에 걸렸습니다.
그 병의 이름은 [조로증]이었어요.
일찍 늙어가는 병이죠.
아들은 10살이 되었을 때 이미 80세 노인처럼 몸이 쇠약해졌습니다.
그런 아들을 보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특히 믿음으로 선하게 살아갔던 쿠쉬너였기에 더욱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항의하며 살았습니다.
그 항의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은 왜 의롭고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까?”였습니다.

그 항의가 무르익으며 결단의 끝으로 치달을 때,
쿠쉬너는 먼저 몇 가지 후회를 쏟아냈습니다.
자신이 만난 고통받는 이들에게 해 주었던 말들이
너무나 쉽고 획일적인 대답들이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는 늘 이렇게 말해 왔습니다.
“착한 사람은 없어.. 고통은 다 죄 때문이야!”
“고통은 결국에 이익이 될 거야.. 은혜로 받아들여!”
“고통 너머에 주님이 계시니 인내하고 참아!”

그렇게 말해오던 자신에게
이 말들이 아무런 해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후회는 더욱 깊었습니다.
이 성급한 해답들은 값싸고 천박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 다른 해답을 찾았어요.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나쁜 일들을 미리 계획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창조된 세상 안에는 모든 일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인정하든, 하지 못하든,
우리가 이해하든, 하지 못하든,
더 크고 더 많은, 더 깊고, 더 넓은 일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라고요.
우리가 이해하는 생각 안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이해 밖의, 우리의 상식 밖의 일들조차 포함된 세상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또한 그 알 수 없는 고통의 세상은,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의로운 사람이든, 죄인이든,
심지어 신앙인이든 아니든
누구든지 차별하지 않고 다가온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계는
우리가 정하고 세운 도덕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약육강식이라는 비인격적 사회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자연의 질서를 지키죠.
불어 닥치는 쓰나미나 지진, 폭풍우가 악인과 의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닥치는 고난은 자연스런 이치인지도 모릅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가능성처럼 말이죠.
신앙은 특별히 그 가능성을 조절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그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돕는 능력인지도 몰라요.
나도 당할 수 있는 고통이지만,
지금은 돕고 위로할 수 있는 자리에 있기에
스스로를 겸비하여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것이
이웃사랑의 근본인지도 모르죠.

쿠쉬너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왜 착한 사람들에게 나쁜 일이 벌어지느냐’고 이유를 묻기보다,
이 세상이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내가 고난을 벗어난 자리에 있을 때
그때가 고난받는 사람들을 돕고 구할 때임을 인지하며 살아가라고요.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사실 심판을 예언하고, 잘못을 정확히 지적하는 그를 좋아할 리 없겠죠.
심지어는 그를 죽일 생각까지 하는 것을 알게 되죠.
그 음모를 꾸민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친족들입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죠.
자신이 해를 주려고 한 것이 아니라 도우려고 했는데요.
살리려고, 구하려고 한 일들인데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죽이려고 드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우리들의 억울이 다 그렇죠.
좋은 의미로 한 일이 오히려 보복을 당하고,
도우려고 한 일이 오히려 배신을 당하면, 그것이 더욱 억울함이 됩니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들이죠.

그런 고통들 앞에서 고통을 묵상하지 마세요.
왜 이런 고통이 나에게 있어야 하는지를 묻기보다
언제라도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 있음을 이해하세요.
세상은 그래요.
신자여도, 그리스도인이어도 예외 없이
벌어질 수 있는 일임을 인정하세요.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세상임도 잊지 마세요.
다만, 그런 고통 가운데 돕는 이들이 있고,
그런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사실도 아세요.
그것 또한 하나님 세상의 이치임을 기억하세요.

그러고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지실 십자가를 원망하지 않으셨어요.
억울해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냥 받아들이셨죠.
그리고 그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시작되고요.
그때부터 제자들, 이웃들, 소위 초기 기독교인이라는 이들의
도움과 참여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통이 도움의 시작입니다.
억울함이 은혜의 출발이고요.
마지막이 새로움의 첫 페이지입니다.

고통의 끝자락에서 새 희망의 시작을 보는 은혜를 갈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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