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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예레미야묵상25-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모순과 정의에 눈 감아서는 안 됩니다. 예레미야 9: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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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예수를 믿을까요?
예수 믿는 우리의 목적과 결과는 무엇일까요?
아침부터 외람된 질문으로 출발해 죄송합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왜 예수를 믿는지,
그 목적이 분명해야 우리의 가는 길이 뚜렷하지 않을까요?

은연중 우리에게는 인생이 잘 되는 것,
가령,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자리에 오르는 것이
신앙의 결과라고 믿는 경향들이 많습니다.
죽어가는 와중에 살고,
망해가는 와중에 흥하는 것,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다른 사람보다 힘이 있는 것이 축복인 줄 알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금식을 하시면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은 떡과 천하만국, 그리고 영광을 빌미로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예수께서 그 유혹을 이기시는 것이 주제이긴 하지만
이 장면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사탄이 거래로 제시한 것들이죠.
즉, 경제력과 명예, 그리고 권력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그런 것들은 사탄도 줄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잘 나가고, 잘 벌고, 잘 되는 것이
꼭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주장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되죠.

오늘 본문 2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9:23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이 말씀은 신앙의 목표가 지혜나, 힘
그리고 자신의 부가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랑할 것이 따로 있다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신앙의 목적이 따로 있다는 말이죠.
감사하게도 오늘 본문은 그것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렘9:24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점이 여기 있습니다.
나의 신앙이 회복되고 주님께 돌아가는 방법이 여기 있죠.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아는 것이냐면,
바로 “긍휼과 공평과 공의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구약 미가선지자는 이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3:1,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아모스기자도 같은 말을 합니다.
암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암5:24,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오늘 본문의 긍휼과 공평, 공의는
히브리말로 각각,
‘헤세드’, ‘미쉬파트’, ‘체다카’입니다.

헤세드는 긍휼, 인애, 사랑과 은혜 등으로 해석되는 단어입니다.
우리 마음이 굳어지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이 헤세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헤세드가 사라지면,
우리는 온전한 반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래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응답하라 시리즈] 드라마였는데요.
거기에서 제게 인상적인 장면 하나가 있었습니다.
성동일에게는 고집스런 작은아버지가 있습니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성동일의 아버지 제사를 챙기는,
아들도 잊는 그 제사를 무섭게(?) 챙기는 동생이죠.
제사를 마치고 성동일은 작은 아버지는
버스터미널에 앉았습니다.
배웅하기 위해서죠.
거기서 나누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에요.
성동일이 작은아버지에게 묻습니다.
“그리 형님이 좋으셨어요?”
그런데 작은아버지의 대답이 뜻밖이었습니다.
“내가 느그 아버지 무쟈게 미워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형제가 컸습니다.
어머니는 똑똑한 장남만 좋아하셨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카스테라를 하나 얻어오셨는데
그것을 형님에게만 주셨답니다.
동생인 작은 아버지는 그것이 먹어 싶어서
온갖 아양을 다 떨었는데 형님은 안 주더래요.
그날로 작은아버지는 결심했답니다.
남부럽지 않은 부자가 되겠다고 말이죠.
그리고 정말 고생해서
자신이 일하던 타이어 공장을 샀답니다.
어엿한 사장님이 된 거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옷 입고, 매일 카스테라 먹었답니다.
형님은 그리 공부해서 면사무소에서 등기나 밀고 있었데요.
그런데 사업에 경험 없던 작은아버지는
얼마 가지 못해서 사기를 당하고,
쫄딱 망했답니다.
망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빚더미에 앉았데요.
이제 경제사범으로 감옥에 갈 처지에 놓여
구치소에 있을 때 형님이 찾아왔더랍니다.
형님은 집 팔고, 논 팔고,
아는 친구들 모두에게 돈을 빌리고 해서 빚을 갚아 주었데요.
그런데도 작은아버지는 형님이 얄미웠답니다.
그래서 찾아온 형님에게 고래고래 소리 질렀데요.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게 살았는지,
얼마나 차별받고 살았으며, 형에게 눌려 살았는지,
얼마나 설움 받고 살았는지 소리 지르며 따졌데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 듣고 한 형님의 한마디,
“내가 미안하다…”

단촐한 에피소드인데, 제 뇌리에 크게 남았습니다.
헤세드를 잃으면 우리의 마음이 굳어집니다.
마음이 굳으면, 고마움을 고마움으로 받지 못해요.
마음이 굳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않고,
마음이 굳으면, 사랑이 오히려 얄밉죠.
메마른 우리 영혼을 갈아엎는 것은
가장 먼저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헤세드에 비해 미쉬파트와 체다카는 좀 낯설죠.
낯선 만큼 그 개념도 설명하기 힘들어요.
미쉬파트는 성경에 400번이 넘게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말로는 제각각으로 번역이 되었어요.
‘공의’(42회) ‘공평’(31회) ‘심판’(26회) 등으로 번역되었죠.
그만큼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체다카도 비슷합니다.
‘의’라는 단어로 번역되지만,
‘공의’, ‘공평’이라는 뜻으로도 곧잘 번역되었죠.
이렇게 보면 거의 뜻이 비슷해 보이는데
히브리어는 이 단어를 나눠놓았습니다.
이 둘 사이에는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미쉬파트’는 법률적, 사회적 정의를 의미합니다.
반면, ‘체다카’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의미의 정의를 말하죠.
미가서의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미6:8,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 등장하는 공의가 바로 ‘미쉬파트’입니다.
우리의 착한 일이란,
미쉬파트를 실천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정의, 지역적 파별과 구조적인 모순,
약자의 문제에 침묵하지 않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선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논쟁거리를 일으키셨습니다.
거지와 창녀의 친구라는 비아냥을 들으셨고,
안식일에는 탈곡을 하여 먹을 것을 만드셨으며,
선생들이 앉는 높은 자리가 아니라 늘 낮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이는 사회적 모순을 뒤집는 행동들이셨어요.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함은 아니셨어요.
오직 사회적 약자와 차별의 모순들에만 반응하시는
행동이셨습니다.
종들만의 전유물이던 세족을 예수님이 하십니다.
약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시는 것이죠.
약자에 대한, 생명에 대한,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강하게 맞서셨죠.
그 행동의 결과가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모순과 정의에 눈 감아서는 안 됩니다.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나만을 위한 신앙은
마음을 굳어져 버리게 만듭니다.
미쉬파트를 잊으면, 교회가 굳어 버립니다.
자신만을 위한 이익집단으로 전락하죠.
돈보다 생명이 더 소중하고,
힘보다 약자를 대변하는 사회적 정의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의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마지막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긍휼과 공평과 공의가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는 것은, 이 땅에 긍휼과 공평과 정의가 세워지는 일입니다.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인 된 이유고,
그것이 내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이죠.
이렇게 사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그리스도인으로 사세요.
내가 살아, 이 땅에 긍휼과 공평, 정의가 세워지도록,
내가 살아, 내 삶의 자리에 주님의 거하시도록,
자리를 까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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