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3:1~8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사람에게 하듯이 말할 수 없고,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직도 육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시기와 싸움이 있으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고, 인간의 방식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나는 바울 편이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볼로 편이다" 한다니, 여러분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볼로는 무엇이고, 바울은 무엇입니까?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나는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심는 사람이나 물 주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심는 사람과 물 주는 사람은 하나이며, 그들은 각각 수고한 만큼 자기의 삯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이 서신을 보내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고린도 교회 내부에 시기와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기'라고 번역된 헬라어 [젤로스]는 신약성경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인데요. 본래는 '열심', '열정'이라는 좋은 뜻을 가진 단어였어요. 그런데 그것이 과열되어 경쟁적인 양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때론 질투라는 단어로 번역되기도 하죠. 싸움은 분쟁을 의미합니다. 서로 경쟁하다 보니 다투고 싸우게 되는 것은 어쩜 당연하겠죠? 더 나아가 이 싸움은 편을 가르고, 남보다 못한 관계에까지 이르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 있어요. 원수가 되는 관계를 보면 모르는 사람이 원수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관계가 멀었던 사람 사이에 원수 지는 일은 결코 없죠. 대부분 잘 알다가, 서로 좋은 관계를 맺다가, 심지어는 죽고 못 사는 사랑의 관계였다가 원수가 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잘해보려고 하다가, 혹은 서로 최선을 다하다가 틀어지는 경우들이 대부분이죠. 이런 관계는 남보다 훨씬 못합니다. 모르던 관계보다 더 심한 상처를 주고받으니까요. 그래서 더 아프고 쓰립니다.
바울은 이것을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설명을 합니다. 사실 영과 육으로 나눠서 설명하는 것은 조심성이 필요합니다. 이는 영과 육의 분리를 통해 신앙의 길을 찾는 행동이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논쟁과 분란의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죠. 그럼에도 바울이 영과 육의 구분을 통해 설명하는 이유는, 영적인 지혜에 대한 특별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당시 헬라인들, 특별히 고린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역으로 영적인 생각의 중요성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가령 이런 경우죠.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행동이라고 하는 그대들의 행동은 사실 육적인 것일 뿐이고, 영혼의 깊이가 있는 삶은 분열과 분쟁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고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어제 저는 주일공동체예배 설교에서 건강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좋은 것은 흡수하고 나쁜 것은 배출하는 것이라고요. 우리는 먹는 것을 조심해야죠. 좋은 것만 먹고 건강한 음식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먹는 것이 다 좋을 수는 없죠. 때론 음식에 독소가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건강한 몸은 이를 걸러냅니다. 나쁜 것은 흘려보내죠. 그리고 좋은 것은 흡수합니다. 이것은 건강한 육체의 특징이고 발란스죠. 그런데 건강을 잃으면 이런 패턴이 반대가 됩니다. 나쁜 것은 몸에 남고 좋은 것은 흘러내리죠. 건강하지 못한 몸에 좋은 약은 무용지물일 때가 많습니다. 주로 흡수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좋은 보약은 그냥 배설물일 때가 많죠. 아니 오히려 좋은 약이 내 몸의 독소를 더 키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게 병든 몸의 특징이죠.
그렇다면 영혼은 어떨까요? 내 마음은요? 내 생각은 건강할까요? 병든 육체와 건강한 몸으로 비교해 본다면 내 마음은, 내 생각은, 내 영혼은 어떤 상태일까요? 좋은 것은 흡수하고 나쁜 것은 잘 배출이 되고 있을까요? 단적인 예로, 누군가 좋은 말, 좋은 이야기, 때론 아파도 나를 위해 하는 말들이 잘 흡수됩니까? 아니면 누가 하는 말마다 마음에 걸리고 그냥 하는 말에 상처받고 하지는 않습니까? 그것을 보며 내 영혼이, 내 마음이 병이 들었는지, 아니면 건강한지 체크가 되시나요?
아마도 바울이나 아볼로나 똑같은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방식, 그들의 표현력, 때론 그들의 능력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전하는 것은 다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들에게서 그리스도를 흡수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표현방식들은 흘려보내야 했는데 그게 반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흘려보내고 교리나 규율, 이념과 주장만 흡수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진영이었고, 하나 됨이 아니라 분쟁이었죠. 이유는 건강하지 않아서입니다.
몸이 나쁜 것을 흘려보내고 좋은 것은 흡수하기를 바라시죠?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요. 다만 몸이 건강하게 그런 작동들이 이루어지기 위해 운동을 하고 소중히 다룹니다. 그 소중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아시나요? 바로 내 마음에서 나쁜 것은 흘려보내고 좋은 것은 남기는 영적인 습관입니다. 마음이 병들면 몸도 병든다는 말은 시쳇말이 아닙니다. 내 영이 건강하지 않은데 건강한 육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나쁜 것은 흘려보내고 좋은 것만 남기세요. 걱정과 고민, 인상을 찌그리게 하는 것들, 분노와 미움들을 내 마음에 남기는 것들은 빨리 흘려보내세요. 생각같이 안 된다고요? 뭐든 생각같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훈련하죠. 영성도, 마음도 그렇습니다. 안 좋은 것을 알면 고쳐야죠. 나쁜 감정들이 일어나면 다른 생각을 하고, 분위기를 바꾸고, 심지어 머리라도 흔드세요. 자신에게 '멈추라'고 말하세요. 거울보고 일부러라도 웃으세요. 그렇게 나를 바꿔야 합니다. 좋은 기억을 더 많이 하고, 좋은 생각으로 머리를 채워야 해요. 그래야 공격들이 덜 합니다.
사족입니다. 우리가 여러 걱정들의 공격을 많이 받죠. 근심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런 일들이 내게 오지 않도록,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법이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어하고 준비하고 걱정을 하면서 대비를 하죠. 그러면 더 그런 걱정들의 공격이 옵니다. 적을 맞이 하겠다고 준비하는데 적들이 와야 직성이 풀릴 것 아닙니까? 걱정과 근심을 몰아내는 방법은 걱정과 근심이 아닙니다. 기쁨과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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