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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06 - 어떤 모든 상황 속에서도 나는 기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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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2~25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바울의 역설 이론이 등장합니다. 당시 바울에게는 두 가지 세계관이 존재했는데요. 그것은 유대인과 그리스인의 세계관이죠. 선민사상이 강한 유대인들은 주로 현상적인 것, 증거주의라고나 할까요?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반면 당시 주류였던 그리스인들은 철학적 사고에 심취되어 있었죠. 그런데 그 세계관으로 십자가는 이해가 불가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렸는데요. 그들에게 메시아는 자신들이 중심이 되는 세상으로의 전환을 말하는 것이었죠. 식민지에서의 해방은 물론이려니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세계사적 재편이 그들이 그리는 그림이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는 강한 힘과 능력으로, 눈에 보이는 거대한 역사로 임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거예요.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유명세를 탔을 때 그의 초라한 배경과 행색에 적잖이 놀랐을 겁니다. 그리고 생각했겠죠. 그가 메시아 일리 없다고 말이죠. 사람들이 속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이것은 메시아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을 거예요. 그러니 예수가 걸림돌처럼 느껴졌겠죠. 그리곤 빨리 정리하고 올바른(?)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 맞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귀결된 셈이죠. 반면 지적 탐구에 열심인 그리스인들로서는 삶과 죽음의 길에서 약하고, 지고, 죽는 것은 미련한 선택이었을 테죠. 그것은 끝이었으니까요.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정서입니다. 눈으로 보아야 믿는 사람들이 있죠. 성공해야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무언가 손에 잡혀야 은혜가 흐르는 것처럼, 나에게 이익이 있어야 사랑받은 것처럼 여기죠.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사상은 교회에도 흐릅니다. 주님이 주신 가장 큰 선물인 죽음은 저주의 산물로 여기고, 나를 뛰어넘어 성장하는 발판으로 주신 광야의 고난은 피하고 싶은 어리석은 시간 낭비로 여기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눈에 보이게 받을까? 어떻게 하면 고생하지 않고 짧은 시간 안에 쉽게 얻을까? 고민하는 우리들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다스리십니다. 마치 안 보이는 사이 이른 새벽 일어나 밥을 지어놓으시고, 우리가 없는 사이 깨끗하게 방을 청소해 놓으시는 엄마의 손길처럼, 아내의 수고처럼 말입니다. 밥과 청소가 여자의 몫이라는 말씀은 아니니 오해 마세요. 남자들은 보통 그렇게 조용히 하는 법이 없어요. 온갖 생색을 다 내죠. 이것도 남자들에 대한 비하인가요? 제가 남자임으로 드리는 말씀으로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고와 헌신을 못 보죠. 당연한 줄 알아요. 화장실이 늘 깨끗한 것은 본래 그런 줄 알죠. 아무렇지 않게 양말을 꺼내 신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힘들게 빨래를 해 놓았고, 하나하나 개서 접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손길을 있다는 사실을 쉽게 지나치죠. 믿음은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도 이 속에 있어요.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나를 위해 일하는 손길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믿음이 나오고 사랑이 돋죠. 

 

하나님께는 죽음마저도 전화위복의 불쏘시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아픔마저도 삶의 자양분이 될 수 있고요. 우리의 실패마저도 존재 가치의 시작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 너머에 계시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 속에 계시며, 우리 머리 위에서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더 넓으시고, 우리의 마음보다 더 깊으시며, 우리의 능력보다 더 강하시죠. 그래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섣불리 예측할 수도 없어요. 우리의 지혜로, 우리의 경험으로 한정 지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변화죠.

 

그래서 저는 결정했습니다. 어떤 모든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기로 말이죠. 내 눈에 어리석어 보여도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면 반전이 있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귀에 미련하게 들려도 내 안에 주님이 역사하시면 역설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하기로, 모든 문제에 기뻐하기로 했어요. 내가 연약해도 괜찮습니다. 내가 미련해도 괜찮아요. 내가 연약해서 더욱 하나님의 강함이 빛나고, 내가 미련해서 주님의 지혜가 활동할 영역이 커지는 것이 축복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미련한 것이 오히려 감사하고, 부족한 것이 오히려 기쁩니다. 

 

오늘도 이 아침에 결정하세요. 어떤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죠.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어떤 문제가 닥쳐도 우리는 미리 결정하자고요. 오늘 나는 기뻐하기로 말이죠. 오늘 나는 감사하기로요. 어떤 일인들 주님의 손을 벗어나는 일이 없음을 알기에 말입니다. 어떤 문젠들 주님이 놓치실 일은 없기 때문이죠. 나의 기쁨이 내가 선 자리를 따뜻하게 만들고, 나의 감사가 주위 사람들에게 에너지가 되는 능력, 더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이끄는 능력으로 작용하는 오늘 하루 되시길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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