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07 - 잘 살고 싶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반응형

고린도전서 1:26~31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으며,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비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셨으니 곧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시려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습니다. 이리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며, 의와 거룩함과 구원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역설이라고 하죠? 흔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납득되기 어려운 모순과 같은 논리를 말하는 데요. 때론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시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역설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그 전형을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데요.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그 역설에 있다는 주장입니다. 약한 자를 선택하여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낮고 비천한 이들을 통해 잘났다고 하는 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여기에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월성, 그러니까 잘나고 똑똑한 것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어리석고 연약하며 비천함이 하나님의 세계를 세워나가는 데 더 쓸모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이는 우리가 연약해야 한다거나 가난하고 고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약한 자로 강한 자들을 이긴다는 말씀은 우리가 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죠. 그렇다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런데 강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자신의 힘을 믿는 경향이 강하죠. 반대로 약할 때 우리는 주님께 엎드리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이미 경험한 바가 있죠? 잘 나가고 승승장구할 때는 아쉬움이 없습니다. 믿음의 간절함이 사라지죠. 그런데 아픔을 당하거나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고난이 몰려오면 우리는 그제야 엎드립니다. 약함의 능력은 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릴 줄 알기 때문이죠. 가난함의 능력은 가난이 아니고 비천함의 능력은 낮은 자리가 아닙니다. 가난하기에 주님께 마음을 열고, 낮은 자리에 거하기에 겸손할 줄 알아서 능력입니다. 결국 싸움은 주님 앞에 겸손할 수 있는 능력이 진짜 능력 되는 것이죠.

 

마치 이것은 시소게임과 같습니다. 내가 낮아지면 상대방이 높아지고, 내가 높아지면 상대방이 낮아지는 것과 같아요. 우리의 높은 자리가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을 잃게 만든다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에게 유익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반면 우리의 낮은 마음이 주님 앞의 겸손이라면 그 굴욕과 설움조차 우리의 유익 임도 알아야 하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약간의 말장난을 동원해서 우리의 길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여기 1,000만 원이 든 허름한 가방이 있습니다. 그 옆에는 100만 원이 든 멋진 가방이 있어요. 여러분은 어떤 가방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너무 쉽나요? 이런 질문 앞에 가끔 고민하는 이들이 있죠. 돈을 선택할까? 아니면 멋진 것을 선택할까? 뭐 이런 고민이죠. 그런 고민에 빠진 사람 중에 저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민을 무색하게 하는 이들도 있더라고요. 당돌하기 그지없는 젊은 친구들의 선택은 화끈합니다. 그들의 대답은 '둘 다'였거든요. 그 대답에 저는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왜 나는 하나만 선택하는데 골몰했을까? 싶기도 했고요. 그러고 보니 저는 늘 이분법적이었던 것 같아요. 돈을 선택하면 진리에서 멀어진다고 여겼죠. 가난해야 의로운 것처럼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도 저는 늘 이분법적이었습니다. 잘나고 높은 사람은 주님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죠.

 

그런데 오늘 제 눈에 들어온 가장 큰 단어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일 마지막 구절인 31절의 말씀입니다.

 

고전 1:31,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 한 대로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외치는 바울의 핵심은 약한 것도 강한 것도, 부유도 가난도 아닙니다. 지혜롭거나 어리석거나, 비천하거나 잘난 그 대비도 아닙니다. 그 말씀이 핵심이 아니에요. 정말 하고자 한 말씀은 그 누구라도, 그 어느 자리에 속한 이들이라도,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선택의 기준은 강함도 약함도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어리석음도 지혜도 아니에요. 높은 자리, 낮은 자리도 아닙니다. 높다고 다 교만하지도, 낮다고 다 겸손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누구든지' '어디 있든지' 주님을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우리 가족들이 주님을 자랑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엎드릴 줄 아는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님을 자랑하는 자가 잘 되고, 주님께 엎드리는 자가 형통한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과 가까운 이들이 더 복되고, 주님을 의지하는 자들이 더 건강하다는 사실을 믿었으면 좋겠어요. 이것은 무슨 기복신앙도, 어떤 축복론도 아닙니다. 그냥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고 평안하기를 원하시니까요. 그러니 무슨 신학적 논리나 교리, 심지어 진리 운운하면서 가난, 고난, 좁은 길, 낮은 자리 이런 말 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고행의 자리에 머물며 고생시키시는 분이 아니심을 믿으세요. 내가 진짜 주님을 자랑할 줄 안다면, 낮은 자리건 높은 자리건, 부유하건 가난하건, 진짜 주님을 자랑할 줄 안다면 어떤 자리든 무슨 문제이겠습니까? 잘 살고 싶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부자 되고 싶은 것도 잘못이 아니에요. 내가 주님을 자랑하는 마음을 잃는 것이 죄일 뿐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