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6~9 그러나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 가운데서는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나 멸망하여 버릴 자들인 이 세상 통치자들의 지혜가 아닙니다. 우리는 비밀로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스럽게 하시려고, 영세 전에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 가운데는, 이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한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는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죽음은 저주일 뿐이죠. 성공이 축복으로 여겨지는 이들에게는 초라한 삶의 모습은 불행한 것입니다. 인류 보편의 진리들은 간혹 극단적이죠. 높은 건물, 많은 인파, 들끓는 인기와 막대한 부, 이것이 성공의 증표이고 행복의 척도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제일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 회장일지도 모릅니다. 그가 가진 부와 권력은 부러움의 대상이죠. 그런데 가끔 뉴스에 등장하는 이야기를 보면 의아하기도 합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그는 현재 향정신성 의약품, 그러니까 마약류의 의약품을 불법으로 처방받은 혐의로 재판 중입니다. 돈이 많아도 행복하지만은 않은 모양이에요.
바울은 사람들의 지혜로 십자가를 설명할 수 없음을 지금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의 의미는 우리 사회에 흐르는 보편적인 진리를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주신 성령의 힘으로 깨달을 수 있음을 말하죠. 이런 설명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아마도 당시 고린도 교회에 강하게 불어닥친 일반적인 철학 논리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사회의 일반적인 기준, 특별히 행복하게 되는 조건이나 이루고자 하는 욕망에 대한 가치들을 논하는 이론들에 교회가 흔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은혜로 복음을 접하고, 십자가의 구원과 가치를 깨달았던 이들은 점점 당시 사회가 추구하는 기준에 따라가는 경향을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다가오는 시험이죠. 분명히 아무 조건도 없이 값없이 받은 사랑인데 이제 남을 사랑하는데 조건이 붙고 대가가 없으면 화가 나는 나의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성공의 조건이 내 안에 그리스도의 평안이었던 우리가 점점 그래도 교회가 커야 하고, 그래도 돈도 있어야 하고, 그래도 이름도 내야 하는 쪽으로 바뀌는 것처럼 말이죠. 작은 행복은 이제 행복도 아니게 되고, 소소한 나눔과 사랑은 그리 중요한 것이 못되어 가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나누는 사랑은 시시해지고, 하루하루의 작은 변화들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더 큰 변화, 한방에 끝나는 축복, 일거에 이루는 성공에 목말라가는 우리의 모습이 현재 교회에도 만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바울은 인용을 통해 이렇게 결론을 내리죠.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라고 말입니다. 주로 구약을 인용할 때 바울이 쓰는 표현인 "기록한 바"라는 말을 보면 이 구절은 구약의 인용 본문인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어떤 책의 인용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사야서 64:4의 말씀이 아닐까 예측만 할 뿐이죠. 그러니까 정확히 같은 본문은 아니란 뜻입니다. 다만 이 구절을 인용한 의미는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설명이 아닐까 싶어요.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알고, 듣지 못한 것을 들으며,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마음에 품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우리가 아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알 수 없죠.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해가 사라진 것이 아니듯 우리가 알지 못하는 너머의 세계에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씀도 드렸죠? 진짜 지혜는 내 생각 너머에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밀이에요. 숨겨져 있는 하나님을 찾는 것, 그것이 신앙이고요. 이 신앙은 창조입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찾아내는 것, 그것이 창조죠. 그래서 우리는 한계를 두면 안 됩니다. 우리가 한계를 짓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딱 거기까지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한계를 두는 순간, 우리에게 벌어지는 것도 딱 거기까지이기 때문이죠. 그때 우리에게 창조는 사라지고 눈에 보이는 것만을 쫓게 되죠.
숨은 보물찾기 해 보셨죠? 어제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주변인데요. 그곳에 숨은 보물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 평범했던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살펴보게 되죠. 어제와 똑같은 그저 지극히 일반적이고 습관적이었던 그 주변에 비밀이 있음을 아는 이들은 다른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기대와 희망으로 바라보죠. 그렇게 찾고 구하고 두드립니다. 비록 그곳에 아픔이 있어도 그 아픔 속에 숨은 보물을 찾고, 비록 슬픔을 당할지라도 그 슬픔은 한낱 슬픔이 아닌 비밀을 머금은 슬픔임을 깨닫죠. 그렇게 찾는 이에게 보물이 주어지고, 구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슬픔이 슬픔일 뿐이라고 한계를 지으면 딱 거기까지, 슬프고 마는 거죠. 아픔이 재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면 딱 거기까지가 내가 얻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너무 많이 나를 규정하고 살아요. '나는 못해.'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본래 그래.' 그렇게 어제의 나로 나를 규정짓고 한계를 두니 오늘도 나는 그렇게 살죠. 뿐만 아닙니다. 다른 사람도 그렇게 규정해 버려요. '네가 그러면 그렇지' '그뿐인가요? 자녀들에게도 이런 말을 잘하죠.'너는 아빠 닮아서, 엄마 닮아서 이래.' '너 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뻔하다'
그렇게 규정하면 그 사람은 나에게 그런 사람이 됩니다.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못해요. 남이 정해준 기준대로 살아가고, 그렇게 들은 말을 곱씹으며 눌려 살죠. 그런 한계가 변명거리가 되고, 그런 규정 안에서 안주하며 살아갑니다. 마치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외쳤던 제자들처럼 말이죠. 그러나 우리는 더 넓고 높은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나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땅을 넓혀야 해요. 내 생각을 넓히고 내 기분을 넓혀야 합니다. 내가 밟은 땅이 내 것이 되듯 넓힌 마음만큼 우리는 세상을 품게 될 것이고, 내가 넓힌 기분만큼 우리는 행복하게 될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비밀을 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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