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4:1~5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 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 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3장 마지막 부분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성전이라고 정의한 바울은, 이어서 우리의 태도에 대해 언급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고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이라고 하죠. 이 말이 주는 의미는 우리가 샘의 원천이 아니라 통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 것으로 보입니다. 일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휘페레타스]는 노예에 가까운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견해나 의견이 없는 종이라는 뜻이죠. 게다가 관리인이라는 표현은 집을 지키는 청지기를 뜻합니다. 집사라고 할까요?
이 말씀에 근거해 저는 스스로 저의 직분을 정의하기도 합니다. 목사는 어떤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영적인 스승도 아니죠. 다만 통로일 뿐입니다. 목사여서 지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목사여서 영적인 권세가 있는 것도 아니죠. 다만 기도하기에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전할 수 있고, 기도하기에 말씀의 통로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관리인에게 요구되는 것이 신실성이라고 말했습니다. 보통 믿음이라고 번역되는 헬라어 [피스토스]가 원어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충성이라고 번역되었죠. 그러니까 주님께 밀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 주시는 생각을 가감 없이 전하는 일이 그의 일이라는 뜻이죠. 주님과 가깝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것이죠. 아마도 고린도 교회에는 주님과의 밀접한 관계보다 자신의 언변과 철학을 믿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것이 주로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위세를 떨쳤던 것 같아요. 말 잘하고, 사교성 좋고, 논리적인 철학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것이 지도자의 첫 덕목이었던 모양입니다. 그에 대해 바울은 지적하죠. 지도자의 첫 덕목은 주님과의 밀접함이라고 말이죠.
외람되지만 가끔 우리는 누군가에게 충고 비슷한 것을 합니다. 옳은 말이라는 미명 하에 걸리는 문제들, 경험상 느낀 문제점들을 지적해 주기도 하죠. 그러고 보면 우리는 나름의 판단들을 다 합니다. 특별히 사람에 대한 판단이 많죠. 자신이 본 것들에 대한 판단들이 주로 내려집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는 그것을 시정해 주고자 노력하기도 하죠. 일면 좋은 가이드가 되고자 하고, 좋은 인도자를 자처한 행동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모습이 꼰대 취급을 받습니다. 물론 무조건 간섭을 꼰대 취급하는 것에 대해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꼰대 취급을 당할까를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은 아마도 내가 경험하고 판단한 것이 지극히 일부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다른 방향으로는 그 판단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방적인 판단이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그리고는 자기 스스로는 이것이 전부인 것처럼, 옳은 것처럼 맹신을 하고 지적질을 남발하는 것이죠. 나도 나를 다 모르는 데 어찌 남을 내가 다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같이 사는 내 자식도 내가 어떻게 못하는 데 가끔 보는 사람을 어찌 판단합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늘 판단을 하죠. 잠깐 본모습으로도 그 사람의 인생을 다 파악한 듯 말을 합니다. 그것이 과연 옳을까요?
저는 그렇다고 남에 대해 입 닥치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바로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에 대해 기도하고 있는지, 내가 주님과의 밀접성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내게 주신 생각이 주님의 생각인지를 떠올려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전해야 하죠. 다 알지 못해도 그분의 생각이면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의 일은 거리낌이 없어야 하죠. 저는 공동체가 이랬으면 합니다.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고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는 것, 남을 통해 나를 비춰보고 길을 묻는 것, 그것이 공동체 가족들의 모습이라고 믿어요.
그러니 함부로 이야기하지 맙시다.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남에게도, 나에게도 그저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고, 정죄하지 맙시다. 기도하고 합시다. 주님께 구하고, 주님의 마음을 품고 남도, 나도 바라봅시다. 나라고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잘 안다고 함부로 조언하지 맙시다. 오직 주님께서 주시는 마음으로 말하고 손을 내밀면 좋겠어요. 그것이 공동체의 능력입니다. 잘 알아서가 아니라 기도해서 가족인 겁니다. 시간을 많이 보내서가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서 공동체인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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