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3:9~15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요, 여러분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건물입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혜를 따라, 지혜로운 건축가와 같이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그 위에다가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집을 지을지 각각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도 이미 놓은 기초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또 다른 기초를 놓을 수 없습니다. 누가 이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으면, 그에 따라 각 사람의 업적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날이 그것을 환히 보여 줄 것입니다. 그것은 불에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각 사람의 업적이 어떤 것인가를 검증하여 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든 작품이 그대로 남으면, 그는 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작품이 타 버리면, 그는 손해를 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불 속을 헤치고 나오듯 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리 다툼이나 경쟁으로 인한 분열을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 바울은, 이제 이를 건축에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집을 지을 때 우리는 터를 닦고 기초를 세운 뒤 건물을 짓습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자신이 닦은 것은 그리스도의 기초라고 말하죠. 그리고 그 기초 위에 각자가 건물을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건물을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짓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 이들이 있다는 거죠. 이는 곧 검증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불이 나면 타고 없어질 것과 그대로 남아 있을 것에 대한 비유를 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어떤 심판과 검증이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깊은 설명이 없습니다.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 검증보다 우리가 짓는 집의 재료에 대해 더 주목한 이유일 테죠.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가 집을 지을 때 잘못된 재료로 집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내가 남겨야 할 것과 흘려보내야 할 것의 차이라고 말하는 거죠. 그러니까 바울은 시기와 질투, 경쟁과 다툼, 분노와 갈라짐으로는 집을 지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나무나 풀, 짚과 같이 불에 다 타고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반면 화해와 일치, 이해와 사랑, 용서와 하나 됨은 어떤 심판에도 남을 것이라고 말하죠.
어제 저는 나쁜 것은 흘려보내고 좋은 것은 남겨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좋은 것만 안전하고 끝까지 남을 것이기 때문이죠. 분노로 이룰 미래는 없습니다. 복수로 만들어질 아름다운 결과물도 없어요. 간혹 이런 착각에 우리가 빠질 때가 있죠. 큰 상처를 받거나 분노로 각성하여 새로운 길을 시작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런 류의 영화들을 많이 봤죠. 누군가에게 배신당해서 상처받고 각성해 성공하여 복수하는 장면들을 종종 봅니다. 어떤 이는 그저 그렇게 살다가 어떤 창피나 망신을 당해 분노로 공부하거나 사업에 성공해서 보란 듯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들의 대부분을 보면 복수로 영화가 끝납니다. 보이는 이들은 어쩌면 통쾌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 영화 이후를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그렇게 해서 자신을 분노로 달구고 성공의 의지를 불태웠던 일을 마치고 나면 그의 삶은 어떨까요? 누군가를 부수고 깨고 복수를 마치고 나면 아무 일 없듯 자기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남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나의 인생은 없습니다. 동기는 될 수 있지만 결국은 내가 책임지고 만드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필요하고 나를 평안케 하는 것으로 나의 삶과 미래가 만들어져야 하죠. 그것만이 어딜 가도, 어떤 상황이 와도 흔들리지 않는 나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동원해야 할 금과 은은 무엇일까요? 금과 은이라고 하니까 돈을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바울은 금과 은, 보석을 재물의 가치로 등장시킨 것이 아니라 아마도 불에 타지 않는 재료로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불에 타지 않는 것, 없어지지 않을 것, 나의 몸을 건강하게 하는 도구, 남아서 내 몸에 흡수가 되고 영양분이 될 것들로 우리의 집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랑? 이해? 용서? 다 좋습니다. 너무 좋은 것들이죠. 그런데 저는 이 좋은 말들이 좀 허무하게 들립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이 들은 추상적인 개념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마치 교회 강대상에서나 울리는 단어들처럼 여겨질 때가 많아요. 듣고는 아멘 하지만 돌아서면 각자의 방식으로 변질되는 그런 단어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엄청 고급지고 멋진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현실 적용은 그리 잘 안 되는 그런 단어가 되어버려 마음이 아파요.
우리는 지금 오늘을 살 말씀 묵상을 하고 있어요. 내 머리를 키울 말씀이 아니라 내 몸에 적용할, 내 삶에 적용할 말씀을 묵상 중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내 삶으로 해석할 직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통역자인 셈이죠.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집으로 오늘 나를 지으시겠습니까? 여러분에게는 금과 은, 보석은 어떤 건가요? 금도 은도 보석도 없으시잖아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가진 것을 동원해 보세요. 사랑, 용서 뭐 이런 추상적인 단어 쓰지 마시고요.
저는 오늘 결정했습니다. 뭐든지 좋게 보기로 말이죠. 뭐든지 좋게 듣기로 작정했습니다. 간혹 그럴 때 있잖아요? '쟤 왜 저래?' 직장에서 집에서 눈에 거스리는 행동들이 있죠. 그때 저는 그 행동을 좋게 보기로 했습니다. '아~ 무슨 일이 있었나 보다.' '마음이 힘든가 봐~'문자를 받거나 카톡을 하다 보면 마음이 상할 때가 있죠. 아주 작지만 괜히 신경 거스리는 어투들이 있어요. 답문이 늦으면 괜히 무시당한 것 같고, 읽씹 하면 기분이 상하죠. 그때 저는 그 문자를 좋게 듣기로 했습니다. '지금 많이 바쁜가 보다~' '어떤 사정이 있겠지'
한때 유명세를 탔던 통역자가 있었죠? 기생충 감독 봉준호 씨의 통역을 맡았던 샤론 최라는 분이죠. 그분의 통역을 들어보니 참 말을 잘하시더라고요. 분명히 봉준호 감독이 한 말을 그대로 통역하는 것인데 통역이 더 이쁘고 아름다웠어요. 뭐랄까? 더 포장을 잘하고 더 세련된 느낌이랄까? 더 이해하기 쉽고 편안하게 전하더라고요. 똑같은 말인데 말이죠. 이게 좋은 통역자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해석자가 되세요. 좋은 통역자가 되세요. 똑같은 말도 좋게 만드는 해석자, 똑같은 상황도 좋게 바꾸는 통역자가 되세요.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삶으로 통역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일상의 언어들을 감사와 기쁨으로 바꾸는 고귀한 통역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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