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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48 - 멈추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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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7:11~15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사람이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오늘은 [멈추세요]라는 제목으로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마음을 열고 내게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 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나인성에서 있었던 놀라운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이 놀라운 이유는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3명의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마르다, 마리아 자매의 오라비 나사로와 가버나움의 회당장이었던 야이로의 딸, 그리고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인성 여인의 아들, 이 3명이죠. 사실 나사로나 야이로의 딸에 비해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일지도 모릅니다. 일단 그들의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조금 성서 해석학적 고찰을 할 필요가 있어요. 아마도 목회자들이 주일 설교를 할 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무턱대고 하지는 않을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생각과 고민, 그리고 공부가 필요하죠. 저의 설교와 묵상 방식은 명확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대원칙이죠. 우리는 성경 지식을 자랑하고자 말씀을 배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은 그 말씀이 살아서 나의 삶이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렇다고 성경의 배경이나 역사적 사실을 외면한 채 말씀을 묵상할 수는 없습니다. 이 초라한 말씀 가운데에도 부족하지만 신학적이고 해석학적 의미들을 담고, 역사적 고증에 대해 애쓴 흔적들이 있음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 한 예로 이 에피소드를 묵상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누구도 그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역사적 기록 책이 아니기 때문이죠. 또한 주인공이 사람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놀라운 사건, 그러니까 부활의 사건이 일어난 현장에 이름이 없다는 것은 특이합니다.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 또 새로운 삶을 시작한 이들이 말없이 사라지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죠. 이 말은 이 사건이 창작이라거나 혹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는 의미는 전혀 아니에요. 오히려 이 사건이 주는 다른 메시지에 ‘누가’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이 부활 사건을 통해 주시는 주님의 숨은 메시지를 찾는 데 함께하고자 합니다.


사건은 나인이라는 성읍에서 일어납니다. 이곳은 가버나움에서 직선거리로 남서쪽 34km, 나사렛에서는 남동쪽 9km 정도에 위치한 곳이죠. 지금도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성경에는 이 본문에서만 유일하게 기록된 곳입니다. 거기 한 여인이 있었는데요. 그녀는 남편을 일찍이 잃고 외아들과 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잃은 셈이죠. 그러니 얼마나 아프고 힘들었겠어요. 그런 여인을 불쌍히 여기신 예수께서 그녀를 위로하십니다. 


“울지 말아라.”


예수님의 위로는 말에만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죽어서 장사를 치르러 가는 그 아들의 관에 손을 대시고 또 이렇게 말씀하시죠.


“일어나라.”


이 단어는 헬라어로 [에게이로]인데요. 이 단어는 부활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을 의미하고 주저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을 의미하죠. 조금 전에 언급했던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신 세 번의 사건 모두 예수님은 이 단어를 사용하시죠.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혹시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분은 기시감이 들지는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내용처럼 보이지 않으셨나요? 그러고 보니 이와 비슷한 성경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와 사르밧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사르밧의 여인도 과부였죠.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병이 들어 결국 죽고 맙니다. 그때 엘리야가 그의 아들을 다시 살리는 기록이 열왕기상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며 이 엘리야를 떠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16절에 보면, "우리에게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고 소리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이는 엘리야의 이적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의 대답 가운데 ‘엘리야와 같다’는 대답이 있을 정도였죠.


최근 누가복음서를 읽으면서 주님께서 제게 지속적으로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매일 아침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있는데요. 그 지속적인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 주님의 복을 누리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이죠. 우리가 세상의 풍파를 이기고 어둠을 이기며, 주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지난 주일 설교 제목으로 나눈 바 있습니다. ‘좋은 눈을 갖는 것’이라고 말이죠. 좋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웃을 보며, 상황을 보는 것이라고요. 그때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영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이죠. 


그리고 우리는 7장으로 넘어왔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을 통해 여전히 주님은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낮추는 일, 겸손과 순종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왜 우리가 겸손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셨죠. 그리고 오늘 본문을 대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지금까지의 말씀과 연결하지 않고 동떨어진 단독적 말씀으로 보았다면 아마도 제목은 이랬을 것입니다. ‘울어도 괜찮아! 울음 뒤에 일하시는 주님을 만날 거야!’였을 거예요. 그토록 오늘 본문은 아프고 상처 입고 억울하고 힘든 우리의 삶을 위로하시는 주님의 축복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구원 역사가 그렇죠. 힘겨운 인생길을 가는 우리, 넘어지고 쓰러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의 아픔을 씻으시는 주님의 긍휼에 초점을 맞췄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주신 말씀, 그 메시지에 근거하여 오늘 본문을 바라보니 조금 다른 본문이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의 말씀은 매우 짧습니다. 그런데 그게 다 명령어죠. 그것도 단호하고 명쾌한 어조입니다. ‘울지 말라’와 ‘일어나라’가 그것입니다. 이전에는 제게, 이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이 2개의 명령어만 들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명령어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라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재미 삼아 여러분에게 퀴즈를 내겠습니다. 제가 오늘 본문 중 13~14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여기에는 3개의 명령어가 있습니다. 이미 ‘울지마라’, ‘일어나라’는 정답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답이 더 있겠죠? 그것을 찾는 분에게는 선물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맞춰보시죠.


누가복음서7:13~14   주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가엾게 여기셔서 말씀하셨다. "울지 말아라.”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서, 관에 손을 대시니, 메고 가는 사람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젊은이야, 내가 네게 말한다. 일어나라.”


찾으셨습니까? 정답은 무엇일까요? 정답은 ‘멈춰라’입니다. 이 부분이 제게 중요하게 다가왔어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시 분문 처음으로 가야 합니다. 11절을 보시죠. 같이 읽습니다.


누가복음서7:11   그 뒤에 곧 예수께서 나인이라는 성읍으로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과 큰 무리가 그와 동행하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는데 예수님께서 나인성에 가십니다. 그것은 육하원칙에 입각한 서술이기에 필요한 기록이죠. 그러나 큰 무리가 함께 동행했다는 부연 설명은 그다지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기록이 있다면 이는 어떤 의도가 있음이 틀림없죠. 그렇다면 그 의도는 무엇일까요? 계속 본문을 읽어보죠. 12절입니다. 이도 같이 읽겠습니다.


누가복음서7:12   예수께서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사람을 메고 나오고 있었다. 그 죽은 사람은 그의 어머니의 외아들이고, 그 여자는 과부였다. 그런데 그 성의 많은 사람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예수님은 장례 행렬을 만나죠. 그 장례가 어떤 장례인지는 이미 설명 드렸습니다. 그 또한 기록의 기본인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된 것이죠. 그런데 이번에도 부연 설명이 있습니다.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그 여자와 함께 따라왔다고 하죠. 이는 11절의 예수님의 많은 무리와 분명 연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면을 상상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행렬과 장례 행렬이 만난 거죠. ‘누가’는 이 두 행렬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의 말씀을 들고 새롭고 산길을 열기 위한 행렬이고, 다른 하나는 슬프고 아픈 죽음의 행렬이죠. 어쩌면 늘 패배했던 습관의 행렬이기도 합니다. 그 행렬 중간에 주님이 계시죠. 그리고 그가 죽음의 행렬을 멈춰 세웁니다. 마치 반복되는 죽음의 저주를 끊듯이 말이죠. 


새로운 길을 가길 원하시나요? 새로운 삶을 원하십니까? 주님의 축복을 받기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지금까지 걸었던 그 길을 멈춰야 합니다. 습관적으로 당연한 듯 무심코 행하던 일들을 멈춰야 합니다. 인생은 고달프고 어렵고 힘들고 아프다는 생각을 끊어내야 하죠.


오늘 본문과 비슷하다고 말씀드린 샤르밧 여인의 이야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 속에 내가 걸었던 어둠의 행렬을 멈추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사르밧 여인은 과부입니다. 이는 남편을 잃는 아픔을 가졌다는 뜻이죠. 뿐만 아니라 당시 과부에게 행해졌던 사회적인 폭력에 시달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가난하기까지 해서 먹을 것이 바닥난 경험도 합니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아세요? 저도 개인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시기가 바로 내일 먹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때입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나죠. 엘리야의 축복으로 그녀의 집에 먹을 것이 끊이지 않는 말도 안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보통 사르밧 여인의 이야기를 여기까지 기억하죠.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다음입니다. 그녀의 아들이 병으로 갑자기 죽게 되었기 때문이죠. 아직 엘리야가 그 집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때, 만약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가난을 해결한 엘리야의 기적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엘리야에게 무슨 말을 하셨을까요? 아마도 그 놀라운 기적을 기억한다면 엘리야에게 이 아픔도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고 매달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뜻밖에도 다른 이야기를 전합니다. 샤르밧 여인은 오히려 엘리야를 저주하죠. 엘리야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어요. 직접 그녀의 말을 들어보시겠습니다.


열왕기상 17:18   그러자 그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이신 어른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렇게 저에게 오셔서, 저의 죄를 기억나게 하시고, 제 아들을 죽게 하십니까?"


여기 자신의 죄가 기억났다고 말하고 있죠? 그 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는 항상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죠. 늘 불안하고 뭔가 안 될 것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거죠. ‘나 같은 것이 잘 살 수 있을까?’ ‘나에게 좋은 날이 오기나 할까?’ ‘나 같은 인생에 해 뜰 날이 있겠어?’ 온통 그런 생각에 지배를 받았던 겁니다. 그리고 아들이 죽자, 그것이 폭발한 거죠. 이미 놀라운 기적을 눈으로 보았고, 실제로 경험했으면서도 그녀는 그런 기적과 감사를 송두리째 날려버립니다. 왜요? 그녀가 걷고 있던 죽음의 행렬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내가 가는 길에 예수님이 첨부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생각에 한 바가지 예수님의 생각을 섞는 것이 아니라고요.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죽음의 행렬, 그 부정의 행렬에서 나와 새로운 생명의 행렬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끊어내야 합니다. 상식이라고 하는 일반적인 경험들, 인생길은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고, 늙는 것은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우리의 과거보다 빛나는 미래는 없다는 인식을 멈춰야 해요. 나 같은 것이 뭘 하겠어라는 생각, 내 인생은 망했다는 생각, 지금까지의 결과로 나의 미래는 끝났다는 생각을 멈춰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자입니다. 내 안에 잠재된 죄의식, 죄책감을 버려야 합니다. 내 인생은 잘 안될 것이라는 패배감, 난 뭘 해도 안 된다는 낙심, 세상은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절망, 그 저주와 죽음의 행렬을 멈춰야 합니다. 나에게는 울 날보다 웃을 날이 훨씬 많고, 나에게는 아픈 날보다 기쁜 날이 훨씬 더 많습니다. 어렵고 힘든 일보다 감사하고 복된 일들이 훨씬 많습니다. 비록 힘들어도 이겨낼 것을 믿는 자에게 믿음대로 됩니다. 안 되면 어쩌지? 이렇게 되면, 저렇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고 근심하고 낙심하는 그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생각을 끊고, 이제 생명의 행렬로 옮겨가야 합니다. 그때 부활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반석 위에 올라타야, 그 위에 집을 지어야 주님이 일하시기 시작해요. 주님의 ‘일어나라’는 옛사람으로는 죽고, 새 사람이 되라는 부활의 명령이죠. 죽어야 부활을 맛봅니다. 멈춰야 돌아설 수 있고요. 끊어내야 새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새 생명의 행렬에 동참하여 주님의 거듭난 자로 부활하는 우리 공동체 가족들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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