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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53 -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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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 7:24~28   요한의 심부름꾼들이 떠난 뒤에, 예수께서 요한에 대하여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은 왕궁에 있다.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를 보려고 나갔더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위대한 인물이다. 이 사람에 대하여 성경에 기록하기를 '보아라. 내가 내 심부름꾼을 너보다 앞서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닦을 것이다' 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가 낳은 사람 가운데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더 크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금 시간이 새벽 4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창문 너머로 한기가 들어오는 것을 보니 오늘도 어제만큼 공기가 찬 것 같네요. 기온을 보니 0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제 묵상을 마치면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을텐데요. 오늘은 더 두툼하게 입고 나가야 할 것 같네요. 날은 추워졌지만 그래도 여러분을 마음에 담고 나서는 발걸음은 따스합니다. 오늘도 마음은 따뜻한 우리 모두의 하루 되시길 빕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었을까요? 뭐 남들이 어떻게 들었든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었으면 되죠.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됩니다. 준비된 그릇에 은혜가 담기는 법이죠. 건강한 마음에 축복이 흐르고요. 기쁘고 즐거운 감정의 꽃이 피는 자리에 주님의 향기가 나비처럼 찾아옵니다. 그래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깨어있는 영성이고, 믿는 마음이며, 그로인해 맑고 밝은 감사와 기쁨의 감정입니다. 그것이 기도이고, 그 기도에 반드시 찾아오시는 주님의 섭리가 하늘나라의 원리입니다.

 

오늘은 세례요한과 관련된 에피소드의 후토크입니다. 아마도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찾아와 질문하는 과정에 어수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들의 태도는 마치 따지듯 질문을 쏟아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인지 남은 제자들에게는 세례요한과의 갈등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정리가 필요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남은 이들에게 세례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죠.

 

주님의 이야기는 세례요한의 변증에 속합니다. 혹시라도 예수를 따르는 이들이 세례요한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할까 싶으셨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그가 어떤 인물인지, 그리고 어떻게 쓰임받는지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그것을 전제하고 말씀을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시죠.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냐?"

 

광야는 세례요한으로 대표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광야에 나가 세례요한을 찾았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물으시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 주님의 날카로운 질문이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고 물으시는 것에는 세례요한이 일희일비하는 사람으로 여겨지느냐는 뜻이죠. 더 나아가 '비단 옷을 입은 사람이냐?'라는 질문은 '너희가 바라는 것이 비단옷이였느냐?'라는 거죠.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냐? 예언자가 아니었느냐?'라는 것이 예수님 질문의 내용입니다. 다시말해 세례요한은 자신의 이익에 오락가락하는 흔해빠진 자칭 예언자가 아니며, 자신의 권력이나 부를 위해 선동하는 이도 아니라는 뜻을 강하게 전하고 계신 거죠.

 

그런데 여기에서 저는 이중적인 지적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훌륭한 지도자를 원해요. 요즘에는 옳은 말을 하고 좋은 가르침을 주는 선생들에 대한 팬덤이 형성되기도 하죠. 아마도 당시 세례요한이 그랬을 것입니다. 광야의 가르침 자리가 차고 넘쳤을 정도로 유명세를 떨쳤으니까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습니다. 그의 외침이 회개하라는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래요. 오로지 많은 이들은 회개보다 독립을 원했고,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것보다는 권력을 뒤집고 정치를 바꾸는 데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물론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리는 것은 정의를 이루는 한 부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렇게 끌어내린 권력의 자리에는 누군가 또 자리하죠. 결국 원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비단옷이 되어버리기 일쑤죠.

 

여러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은 여러분에게 어떤 세상입니까? 혹시 나에게 비단옷을 주는 세상, 호사스러운 왕궁이 내 것인 세상은 아닙니까? 온전한 세상을 꿈꾸면서 바라는 것은 나의 온전함이 아니라 권력이고 힘이고 비단옷은 아닐까요? 좋은 세상을 꿈꾸며 나만 좋은 세상을 바라지는 않았는지를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그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가 꿈꾸는 세상을 함께 꿈꾸면서도 세례요한처럼 광야에서 허름한 옷을 입고 청빈하게 사는 것은 바라지 않는 우리의 이중성이 결국 우리의 길을 갈대처럼 흔들리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 때문인지도 몰라요. 

 

비단옷은 주님이 입혀주십니다. 주님의 은혜는 우리가 달라고 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거예요. 우리가 해야할 일은 오직 주님이 일하시는 계획 가운데 쓰임받도록 준비되는 것 뿐입니다. 세례요한이 사용되듯이 말이죠. 그에게는 광야가 화려한 왕궁이고, 털옷이 값비싼 비단옷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 어떤 왕보다도 높고, 그의 가르침은 어떤 학자보다 깊죠. 질그릇이라도 쓰임받을 때에 가장 귀한 그릇이 됩니다. 

 

세상이 바뀌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마세요. 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나의 생각이 바뀌면 나의 인생도 바뀌죠. 그렇게 바뀐 나를 통해 세상은 하나님이 바꾸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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