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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51 -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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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7:18~23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 요한은 자기 제자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선생님께로 보내어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악령으로 시달리는 사람을 많이 고쳐주시고, 또 눈먼 많은 사람을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가서 요한에게 알려라. 눈먼 사람이 다시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먹은 사람이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복된 하루 주심을 감사하며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의 마음으로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좀 어려운 본문입니다. 소위 '세례요한의 의심'으로 제목이 붙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조금은 생뚱맞게 등장하는 본문이기도 하죠. 말씀의 묵상을 위해서 말씀 속의 상황들에 대한 해석에 있어 개인적인 견해가 작용되었음을 전제하고 말씀을 이어나가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고 하는 상황을 전하면서 시작하죠. 요한의 제자들은 당시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례요한이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죠. 예수의 12 제자 가운데도 요한의 제자 출신이 있을 정도였으니 예수님의 주변에는 요한과 여러모로 연관된 이들이 많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18절의 표현은 특정한 사건이 아닌, 종합적인 보고 형식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이죠. 그 보고를 받은 세례요한이 그 제자들 중 두 명을 불러 예수께 보내며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 오실 그분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매우 도전적인 질문이죠. 이 질문만으로 놓고 보면 '세례요한의 의심'이라는 제목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아 보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질문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왜 세례요한이 이런 의심을 품었을까요? 일단 그는 지금 헤롯에 의해 감옥에 갇힌 상태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러 염려와 걱정이 그를 짓눌렀던 것일까요? 그러기에는 그는 이미 예수님을 확실히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그의 말에서도 입증이 되죠.

 

마가복음서 1:7~8   그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이가 내 뒤에 오십니다. 나는 몸을 굽혀서 그의 신발 끈을 풀 자격조차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는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1:29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물론 아무리 세례요한일지라도 극한 상황에 봉착한다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에게 오류가 없다고 할 수 없죠. 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오해나 의심 등을 전혀 하지 않는 성인으로 세례요한을 칭송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에요. 오히려 세례요한이 이런 질문을 한 이유에 대해 조금 진전된 해석을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의 시작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요한에게 알렸다고 했죠. 무엇을 알렸을까요? 왜 알렸을까요? 단순히 옛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의 근황을 전하는 것이었을까요? 그러기에는 좀 생뚱맞죠? 그런 보고를 할 필요도 없으려니와 이미 세례요한의 선포대로 자신의 권위를 모두 예수께 이양한 이후이기에 따로 보고를 들을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요한의 제자들은 굳이 보고를 했을까요? 예측이 되시나요? 

 

그렇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그런 보고를 한 이유는 세례요한이 아니라 그 제자들에게 의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세례요한의 제자들 중에는 급진적인 이들이 다수 있었을 거예요. 썩어 빠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뿌리 뽑고, 더 나아가 지긋지긋한 식민지배를 끝장내고 싶은 마음들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모든 관직이나 권위를 뒤로하고 광야에서 홀로 옳은 소리, 바른 소리를 하는 세례요한을 따랐던 것이죠. 그런데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너무 한가로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을 쓸어버리고 로마의 군대를 물리쳐야 할 텐데 예수님은 시골을 전전하시며 이름도 없는 이들, 힘도 없고 권세도 없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불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옛 스승인 세례요한을 찾아간 것이죠. 

 

세례요한은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을 나무라기 전에 그들에게 예수님을 대면할 기회, 그리고 그들의 의문에 해답을 얻을 기회를 제공하죠. 그는 자신의 질문이 아니라 제자들의 질문을 대신 예수께 전하며 그들의 마음을 예수께서 돌보시도록 하죠. 

 

의문을 품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각과 다름을 불편해하는 것은 죄가 아니에요. 오히려 주님의 생각에 불만이 있다는 것은 나에게도 생각이 있다는 뜻이니 어쩌면 다행스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의문을 다른 데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정면으로 질문하지 않는 데 있어요. 

 

우리들의 의심이 그렇습니다. 의심을 품으면 그것을 정확하기 묻고 듣고 해결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의심을 다른 곳에 말하죠. 그리고 해결보다는 자신의 의심을 더욱 견고하게 인정받으려고 합니다. 당사자가 아닌 잘 모르는 제삼자의 동조를 받아서 자신의 의심이 타당하다고 합리화하려고 하죠. 

 

[땅끝으로 가다]의 작가 김성일 씨는 그의 간증을 담은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그는 신을 믿지 않았다고 하죠. 아니 신을 거부했을 만큼 무종교주의자였답니다. 그런 그가 아내의 병으로 인해 교회에 다니게 되고 성경을 접하게 되었는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의문만 더해지더랍니다. 도대체 믿어지지 않더래요. 그때 그는 그 의문을 하나님께 직접 고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새벽에 나가 기도하면서 자신의 의문들을 주님 앞에 털어놓았데요. 끈질기게 기도했답니다. 그랬더니 성경을 읽을 때마다 깨달음과 새로운 생각, 새로운 통찰력을 주시더래요. 

 

정직하게 대면해야 합니다. 의문은 당사자에게 직접 묻고 해결할 용기를 가져야 해요. 엉뚱한 사람에게 해답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대답을 해 줄 사람에게 가야 해요. 부부의 문제라면 부부가 직접 대면해야 합니다. 자녀의 문제라면 자녀와 이야기해야 하고요. 친구의 문제라면 친구와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의 의문에 답해줄 이를 찾아야 하죠. 

 

신앙의 문제입니까? 그렇다면 혼자 끙끙대지 마세요. 주님과 대면하세요. 그분께 묻고 또 물으며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기도가 열려 있고, 묵상이 열려 있습니다. 말씀을 대면해야 하고, 주님과의 시간을 통해 그분의 생각과 대면해야 합니다. 그렇게 온전한 해답을 주실 주님 앞에 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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