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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55 - 나를 위해 편견을 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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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7:36~39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 들어가셔서, 상에 앉으셨다. 그런데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었는데,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의 집에서 음식을 잡숫고 계신 것을 알고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등 뒤에 발 곁에 서더니, 울면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발랐다. 예수를 초대한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오늘은 [나를 위해 편견을 버리세요.]라는 제목으로 우리 공동체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마음을 열고 내게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시간 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청하여,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하였다.’ 이것이 좀 특이하죠. 이미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서에는 바리새파 사람이 등장합니다. 기억하시죠? 각 지역에서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 학자들이 몰려와서 예수님을 따랐죠. 물론 순수하게 따른 것은 아닙니다. 뭔가 문제를 찾고 트집 잡을 것이 없을까 생각하며 따랐던 거죠. 그런 이유는 아마도 예수께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언제나 기득권은, 또 다른 세력에 의해 밀려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죠. 그러니 갈릴리 지역에서 난 예수의 소문이 그들은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그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합니다. 아마도 이 바리새인은 갈릴리 지역에 사는 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가 왜 예수님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는지 그 의도는 불분명합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다 보니 그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생겨서 초대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모략을 위해 자기 집에 초대했는지 본문은 자세히 기록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죠. 그 기록이 없다는 것은 이 에피소드에서 그 부분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겠죠? 오히려 저의 눈에 띄는 것은 예수께서 그 초대에 흔쾌히 응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적혀있지만, 생각을 해 보면 이게 좀 쉽지 않죠. 생각해 보세요. 계속 따라다니면서 딴지를 걸고 시비를 거는 이가 있다고 해 보자고요. 늘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며 뭔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나를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겠습니까? 내 직장에, 내 동료 중에 나를 늘 갈구고 시비를 거는 이가 있다면 여러분은 좋겠습니까? 그가 밥 먹자고 하면 흔쾌히 따라가시겠어요? 뭐 예수님이니까 하시겠지만 예수님도 사람입니다. 이게 괴롭지 않을 수가 없죠.


그런데 예수님은 그 초대에 응하십니다. 왜요? 예수님이어서요? 사랑을 전파한 사람이어서요? 목회자인 저에게도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과 밥을 먹으면 밥이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목회자라고 참고 견디다 보면 그게 병이 됩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그런 적 많아요. 그런데 그게 정답은 아니더라고요. 상대방을 위한 일도, 또 나를 위한 일도 아니더라고요. 억지로 한다고 상대방이 감동하지도 않아요. 마음에도 없는데 사역이 될 수도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때 주신 주님의 음성이 있었어요. 내가 건강해야 온전한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음성이 이랬어요.


“너는 내 은혜를 받을 만한 그릇이니?” 


그 음성이 제가 크게 다가왔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은혜를 받을만한 그릇인가가 문제죠. 아무리 은혜를 주셔도 밑 빠진 독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 느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하는 사역은 사역이 아니라고 말이죠. 이것을 이기심이라고 말해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건강해야 이웃이 건강하고, 내가 행복해야 공동체가 행복하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달라졌다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저도 제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중의 핵심이 바로 제가 나를 위해 사역을 하고 목회를 한다는 점이에요. 예전에는 여러분의 처지나 상황을 보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았습니다. 이게 저는 사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사랑이 아니라 걱정이더라고요. 잘 안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 말이죠. 게다가 이 걱정은 더 쪼잔하고 치졸한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런 거죠. ‘내가 목회자인데 우리 가족이 잘못되면 내가 영성이 부족한 거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진짜 이기심이더라고요. 지금은 걱정하지 않습니다. 잠 못 이루는 일들은 여전한데요. 대신 잘될 것을 생각하고, 나아질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밤을 지새웁니다. 이러쿵저러쿵 판단하고 비판하며 걱정하기보다 사랑스럽고 아름답게 여러분과 주위를 바라보죠. 좋은 눈을 가져야 좋은 것을 본다는 것을 이제 압니다. 그게 제가 건강해지고 단단해지는 것이라고 말이죠.


지난주에 교회학교 어린이 가운데 한 아이가 엄마한테 그러더래요. ‘엄마, 내 귀에 대고 사랑해라고 말해 주면 안 돼?’ 제가 주일마다 우리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꼭 껴안고 기도해 주면서 귀에 대고 ‘사랑해’라고 속삭여 주거든요. 그게 기분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아이에게는 마음에 담겼나 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우리 아이들 마음에 그 작은 소리가 큰 울림이 될 것을 말이죠. 그건 제가 능력 있는 목사여서가 아닙니다. 별 능력 없는 것은 여러분이 더 잘 아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진짜로 우리 아이들이 잘될 것을 기대하거든요. 이 아이들의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보기 좋거든요. 설령 사람들이 나쁘다고 하는 짓도 제 눈에는 보기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이 모여서 그 아이에게 좋은 영향으로 이끄는 거름이 될 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떤 모습도 밉지 않아요. 내 자식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하셔도 상관없어요. 저는 우리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있는 모습 그래도 사랑합니다. 그게 내가 좋아서입니다. 그때가 내가 제일 행복하기 때문이에요. 판단하고 걱정하고 나쁜 상상을 한다고 자녀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지만 가장 문제는 내 마음이 상하고 깨지고 뭉글어지기 때문이에요. 나의 영성이 닫히고 은혜의 통로가 막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 나로 흐르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해요. 그래서 나를 은혜롭게 하는 일이 가장 큰 믿음생활입니다. 저는, 기도하는 제가 행복하면 우리 아이들도 행복할 줄 믿어요.


바리새인의 초대에 응하신 예수님 이야기를 하다가 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린 이유는 있는 모습 그래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에 대해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편견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몰라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수많은 모욕과 의심을 받고도 그의 초대에 응하신 것은 단순한 사역이 아닙니다. ‘그들을 잘 대해 주어야지’라는 마음 때문도 아니에요. 그분에게는 오로지 편견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라서 이럴 것이다라는 마음, 저 사람이 또 무슨 꿍꿍이가 있을까? 이런 마음이 없으셨기 때문이죠. 이게 편견이 없는 모습입니다.


자유는 편견이 없을 때 가능합니다. 지레짐작도, 엉뚱한 예상도 없이 모든 상황에는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주님의 섭리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죠. 예수님은 단순하셨습니다. 바리새인도 주님에게는 그저 사랑스러운 자녀였고요. 그의 대접에 무슨 의도가 있든지 상관없이 그 대접을 대접으로 받으시는 주님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의 마음에 평안을 유지하는 일, 그것이 주님이셨고, 그것이 건강한 영성임을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핵심은 이제부터입니다. 그곳에 한 이름 모를 여인이 들어옵니다. 그녀는 옥합에 향유를 담아 들고 왔죠. 그리고 조용히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그녀의 머릿결로 그 발을 씻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상황이 아니죠. 뭔가 사연이 있어도 특별한 사연이 있는듯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 여인을 오늘 처음 보시는 듯하죠.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그 집의 주인이었던 바리새인의 말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죠.


"이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저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여자인지 알았을 터인데! 그 여자는 죄인인데!”


그러니까 자신은 저 여인을 아는 겁니다. 그녀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죠. 물론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여인이 이 자리에 온 것이 탐탁잖아 보인 것은 분명하죠. 그러면서 예수께서 예언자라면 그녀가 누구인지 알았을 것이라 말하죠. 이 말은 예수님은 그녀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거죠. 그런데 만약 예언자, 그리니까 시쳇말로 말하면 영발이 있는 자라면 그녀가 누구인지 짐작했을 것이라는 거죠.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것은 여기 나온 향유 옥합의 여인이 마태나 마가, 그리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머리에 부었던 여인과는 다른 여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나 마가는 그녀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라고 적시하고 있죠. 당시 마리아는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많은 마리아가 등장하는 데 대표적인 분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죠. 구분을 위해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는 베다니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더 익숙한 마리아가 등장하는데요. 그녀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우리가 헛갈리는 사실 하나가 등장하죠. 찬송가  211장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이 가사는 엄연히 성경을 오독한 오류의 가사입니다. 막달라 출신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시달려 고생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를 예수께서 고쳐주셨죠. 그리고 그녀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알린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죠. 그런데 그녀가 향유를 주님께 부었다는 기록은 성경에,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장사되었을 때 그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 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죠. 그럼에도 오늘 본문의 여인을 마치 막달라 출신 마리아라고 확정적으로 말했던 이유는 기원후 1세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잘못된 설교 때문입니다. 그는 누가복음 7장의 여인과 막달라 마리아를 혼합해서 해석하므로 잘못된 인식을 준 것이죠. 이는 1,500년이 지난 1969년이 되어서야 교황청의 공식 오류 인정과 사과로 일단락이 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인식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찬송가 211장이 아직도 수정되지 않는 것 역시 유감스럽죠.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잘못된 설교는 단순한 착각이 아닌 의도된 오류였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막달라 마리아의 영향력 때문이죠. 예수님 당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 공동체에 중요 멤버였을 것이라는 게 신학자들의 중론이죠. 심지어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이 없는 예수님의 십자가 자리를 지켰던 사람입니다. 게다가 부활의 장면을 목격한 최초의 사람이었죠. 이게 단순하지 않아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이가 그녀였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이후 다른 외경들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의 가르침이 컸던 것으로 보이죠. 이는 당시 사회적 관습에서는 결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여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편견이 초대 기독교에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소위 막달라 마리아 죽이기의 일환이 교황의 설교에서 작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죠. 그 작전은 대성공을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목격하고 여자로서 주님의 귀한 제자가 되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아니 오히려 죄인이며 창녀로, 더 나아가 예수님과 인간적 관계를 맺는 여인으로 묘사되며 끝도 없이 추락시키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타락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권력도 물질도 아닙니다. 그 시초가 바로 편견이에요. 내 마음에 편견을 두는 순간, 우리의 영은 망가집니다. 예수님은 수없이 우리에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죠. 그 비판으로 우리가 비판받을 것이라고도 하십니다. 이미 우리는 누가복음서 6장을 읽으면서 남을 비판하는 것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돌아온다는 사실을 묵상한 바 있죠. 그 비판의 원천이 바로 편견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편견, 나보다 못하다는 편견, 내가 더 잘났다는 편견, 너는 안 된다는 편견, 그 편견들이 모든 미움과 다툼의 시작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내 안에 견고한 편견을 깨셔야 합니다. 절대로 안 된다고, 지금까지 경험으로 봐서 안 된다고, 내가 살아 봤는데 안 된다고, 그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넌 어려서 안 되고, 넌 못 배워서 안 되고, 넌 여자여서 안 되고, 넌 출신이 안 좋아서 안 된다는 편견, 그것을 버려야 내 영혼이 맑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인간이라는 편견, 죄인이라는 편견, 못 믿을 존재라는 편견을 버리셨기에 가능했던 거죠. 주님의 사랑은 그 편견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셨기에 놀라운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가장 편견이 많은 사람 아닙니까? 이방인이어서 안 되고, 신분이 낮아서 안 되고, 우리 편이 아니어서 안 되는 그런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으시고 그저 하나님이 만드신 고귀한 생명으로만 보십니다. 이게 진짜 강한 멘탈이고 세상을 품는 마음 아닙니까? 그 집에서 바리새인들이 그리도 혐오하는 죄인을 만납니다. 경시하는 여자를 만나시죠. 사람들이 수군거림에도 끄떡하지 않으시고 그녀를 축복하십니다. 그 축복의 장면은 이번 주 매일 묵상을 통해 더 자세히 나누기로 하죠.


여러분에게는 편견이 없으신가요? 여러분들은 매일 자녀들을 보죠? 그들을 보면서 어떤 생각하시나요? 아이들이 어려서 잘 모르죠? 그래서 가르칠 것이 많다고 생각하죠? 그래서 나보다 못하다고 느끼십니까? 그게 편견입니다. 과연 자녀들은 여러분보다 못할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이 듣지 못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자녀들은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우리 딱 보면 알죠? 이웃이 나보다 못 배우고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학교 어디 나왔나 묻죠. 그것으로 선입견을 품습니다. 그게 편견이에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판단하고 편견을 가진 사람 안에 주님의 은혜가 흐를 수도 있다는 사실, 그 사람을 주님이 쓰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우리의 편견으로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죠. 그래서 우리 그러잖아요? “저 사람도 되는 데 왜 나는 안 돼?” 그게 편견이에요. 저 사람이 뭐 어때서요?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낫지 말라는 법 있어요? 그게 딱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을 수도, 읽을 수도 없어요. 그곳에는 주님의 말씀이 흐르지 않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왜곡되고 오염되어서 다른 괴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공동체 가족들은 편견에서 자유하길 기도합니다. 나를 위해서 편견을 버리시길 바랍니다. 내 영혼을 위해서 어떤 편견도 가지 않으시길 빌어요. 편견에서 해방된 이가 평화를 얻고, 편견에서 자유한 이에게 주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하나님은 편견이 없으시기 때문이죠. 금 그릇 은그릇보다 귀한 그릇은 편견이 없는 그릇입니다. 편견은 그릇을 깨뜨리기 때문이에요. 우리 공동체 가족들 모두 편견을 버리고 온전한 그릇으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채우는 축복이 임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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