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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6 -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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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서6:31~36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좌우명(座右銘)이란 말을 아시죠?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내 오른쪽 자리에 새겨져 있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늘 옆에 갖추어 두고 가르침으로 삼는 말이나 문구를 의미하죠. 그래서 개인이나 단체들은 대부분 자신의 철학을 담은 좌우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내가 그 좌우명을 얼마나 따르고 실천하느냐와는 다른 문제죠. 우리가 하고자 해도 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린다면 안 되겠죠? 그런 의미에서 좌우명은 늘 우리의 중심을 잡아주고 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기초가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좌우명을 가지고 계신가요? 이따 목장모임 하실 때 자신의 좌우명을 나눠보세요. 만약 뚜렷하게 좌우명을 갖지 못하셨다면 이번 기회에 자신만의 좌우명을 한번 만들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우리 교회에도 좌우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이웃을 기쁘게]입니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결정을 하기 원하고, 또한 이것이 우리의 이웃,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결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표현이죠. 이는 제가 말씀을 해석하고 묵상하는 기초이기도 하고, 어떤 결정이나 행동의 시작이 되기도 하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제 안에 형성되는 이념이나 가치에도 가장 많이 영향을 미치는 말씀이기도 하죠.

 

이 좌우명은 마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어요. 서기관 하나가 예수님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묻죠.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시죠.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 또한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라고 말이죠.

 

이 말씀을 우리 교회의 모토로 삼은 이유는, 이 말씀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의 기초라고 여기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이웃과 더불어 사는 일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면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또한 이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분의 은혜와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원리죠. 그 원리를 깨닫기에 우리는 이 말씀을 교회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 중에서도 아주 유명한 본문입니다. 황금룰이라는 별칭을 가진 본문이죠. 
“너희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여라.” 

 

이 말씀에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의 방법론적 해석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의 무게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대체로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자신들은 남을 대접하며 산다고 생각합니다. 먹을 것을 주고, 때때마다 선의를 베풀죠. 소위 구제라는 것을 합니다. 남을 구제하는 것, 정말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임은 틀림없어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말씀과 같지는 않습니다. 여기에는 이해와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구제는 물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제에는 나도 너와 다르지 않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내가 너와 다르고, 내가 너 같지 않게 좀 가져서, 좀 잘 살아서, 좀 나아서 너를 구제한다는 식이라면 그것은 구제가 아니라 차별입니다. 차별이 억압하고 업신여기는 데만 있지 않죠. 베푸는 척하며 나의 공로를 드러내고 생색을 낸다면 그곳에는 상처만 남기게 되니까요. 전도할 때 보세요. 나의 것만 주장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은 무시한 채, ‘내가 너를 위해 하는 거야?’ 이런 태도라면 어떨까요? 마치 너는 죄인이야…. 내가 너를 해방시켜줄께.. 이런 태도라면요? 만약 입장 바꿔본다면 내가 그런 대접을 받고 싶을까요? 그래서 교회가 구제와 봉사를 많이 하면서도 욕을 먹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웃사랑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이웃사랑이죠.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으로 유명한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의 고민 가운데 대부분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고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인간이라는 한자의 간은 사이 간자로 관계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니 인간의 구성요소에는 관계가 필수적인 것은 틀림없어 보여요. 어쩌면 이 황금룰은 이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가장 기초적이고 핵심적인 말씀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 말씀을 정말 무겁게 받아들이고 깊이 묵상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정말 지키고 세워야 할 가장 귀한 말씀으로 여기기를 소망해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이해받고자 하는 대로 이해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대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제1의 계명이라고 말입니다.

 

자! 여기까지만 듣고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참으로 변명거리가 많은 사람들이죠. 이웃 사랑을 말하면, 이웃이 누구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인지를 묻죠. 이웃 사랑이 대접받고 싶은 만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 또 우리는 남 탓을 합니다. ‘대접할만해야 대접하지…’ 혹은 대접해도 대접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죠. 그렇게 우리의 변명은 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를 더 깊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오늘 본문 32절 이하는 31절의 말씀을 보충해 주는 설명으로 쓰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아는 사람끼리만 사랑을 나누고 대접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오늘날 자기만, 내 가족만 중요하다고 여기며 사는 현대인들에게  뼈아프게 다가오는 말씀이기도 하죠. 이 비유의 말씀은 다른 복음서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도 중요하게 다루어진 말씀이라는 뜻이죠. 그런데 유독 누가복음만 첨가된 구절이 있습니다. 그것은 34절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누가복음6:34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누가복음에서 주님은 우리가 황금룰을 지키는 한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죠. 어쩌면 진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은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대가를 바라는 마음임을 아셨기 때문이죠. 혹시 여러분은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어떤 결과를 드러내는지 알고 계십니까? 어쩌면 모든 분쟁, 모든 다툼의 정점에는 바로 이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왜 미움이 싹텄을까요? 이유야 다양하겠죠?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중심에 내가 바라던 대가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던 반응, 내가 원하던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미움이 싹트죠. 조금 구차한 예를 들어볼게요. 혹시 누군가에게 선물하신 적이 있으신가요? 요즘 같으면 주로 택배로 보내죠. 보내고는 연락이 오길 바라죠. 잘 도착했는지, 선물은 잘 갔는지 궁금한 것은 저만의 일은 아닐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단지 선물의 전달을 위한 궁금증만일까요? 선물을 받고도 아무 연락이 없다면 여러분 마음은 어떠신가요? 연락이 있어도 감사를 표시하지 않는다면요?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면요? 여러분 마음은 어떠세요? “잘 받았으면 됐어!” 그러십니까? 아무 반응이 없다면 어떨까요? 그 사람에게 나중에 또 선물 보낼 마음이 생길까요? 진짜 이상한 것은 그런 선물을 주고받지 않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는 그런 다툼이나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잘해보려다가, 오히려 잘해주려다가 미움이 생기고 아픔과 상처가 생기죠. 왜요? 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가 베푼 선한 행동을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죠. 그러지 않으면 섭섭함을 느낍니다. 

 

제가 몇 년 전에 고백했던 내용인데요. 저는 집안일을 잘 안 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젊은 집사님들 보면 정말 아이에게도 집안에서도 잘 도와주시죠. 그런데 저는 안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집안일은 집사람이 하는 것인 줄 알았으니까요. 혹시 이런 말에 화내실 분 계실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랬습니다. 오죽하면 제 아들이 5살 때쯤인가? 집에 들어온 저를 보고 어쩐 일로 집에 왔냐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래도 저도 가끔 설거지했습니다. 그런데 설거지할 때마다 마음이 불편한 거예요. 왜냐하면 제가 설거지를 하고 나면 칭찬을 받아야 하는데 칭찬이 없어요. 때론 집 안 청소를 열심히 합니다. 청소할 동안 어떤 생각 했는 줄 아세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닦아 놨으니, 아내가 놀라겠지?’ 그런데 아무 말이 없어요. 그러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아십니까? 서운해요. 다시는 안 하고 싶어지죠. 이게 참 웃겨요. 생각해 보세요. 아내가 청소하고 남편 칭찬을 바라던가요? 아내가 밥을 하거나 설거지하고 남편 칭찬을 바라요?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왠지 아세요? 그 일이 자기 일로 여기기 때문이죠. 자기 일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저는 대가를 바래요. 왜요? 설거지는 내 일이 아니니까요. 집 안 청소는 내 일이 아니니까요. 어쩌다 하는 남의 일이니까요. 그러니 생색이 나야 하고, 그러니 뭔가 보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사랑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죠?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라면 언제나 생색을 내야 합니다. 다림교육을 하면서 제일 힘들고 어려웠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어요. 가난한 교회가 막대한 돈과 열정을 드려서 성심을 다해 섬기고 가르치는데 감사는커녕 당연한 듯 여기고, 오히려 더 큰 요구를 할 때 참 견디기 힘들었어요. 그때마다 못난 제 마음속에서는 차라리 때려치울까? 이 힘과 열정을 우리를 위해 사용한다면 훨씬 편하게 살 텐데…. 이런 마음이 얼마나 몰려왔는지 몰라요. 그때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이 ‘우리의 사역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었어요. 이게 나의 일이라고 말이죠. 마치 설거지가 도와주는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듯이 말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가 섭섭했을 것 같아요. 진짜 섭섭했던 것은 집안 일을 안 도와주는 것이 아니죠. 아시겠지만 제 아내는 제가 뭘 시키지 않습니다. 설거지 안 한다고 섭섭하지 않았을 거예요. 진짜 섭섭한 것은 집안일이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내 마음이었을 거예요. 그러니 제가 그런 마음으로 뭘 해도 그게 기쁘지 않았겠죠. 교회의 봉사가 그래요. 무슨 구제를 하고 자신들의 이름이 드러나길 원하죠. 그게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의 일 도와주는 것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교회에서 일을 하다가 화 내는 분들 계실지 몰라요. 이런 거죠. 왜 나만 일해? 뭐 그런 겁니다. 사실 일은 하는 사람만 하죠. 그런데 그렇다고 그게 화가 난다면 그건 아마도 내 안에 대가를 따지는 마음 때문일지 몰라요. 
진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요. 그 이후로 지금은 집에서 물론 가끔이지만 설거지할 때 마음이 달라지더라고요. 이것이 내 일이 되니까 일단 귀찮지가 않아요. 미루지 않게 되고요. 당연한 것이 되더라고요. 근데 가장 큰 변화는 뭔지 아세요? 칭찬을 바라지 않더라고요. 대가를 바라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러니 불평이 사라지더라고요.

 

저는 자발적 가난을 추구합니다. 가난한 삶을 찾는 원리는 성경의 원리이기도 하죠. 그랬더니 사람들이 가난한 삶이란 돈이 없는 삶이라고 착각합니다. 돈을 모으지도, 소중히도 여기지 않는 것처럼 생각해요. 저는 여러분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돈도 많이 벌기를 원해요. 그 이유는, 많이 가진 것은 많이 베풀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크게 자란 나무는 그 그늘에 쉬는 사람도 많은 법이죠. 자기만을 위해 큰 사람은 없어요. 자기만을 위한 재능도 없습니다. 크고 많은 재능은 누군가를 섬기는 데 쓰이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주변에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는 증표이고, 축복입니다. 진정 가난해진다는 의미는 돈이나 재능을 버리라는 의미가 아니라 내 안에 깃든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라는 뜻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가 없이 살면 안 될까요? 대가 없이 믿으면 안 될까요? 대가 없이 주면 안 될까요? 꼭 뭔가를 받아야 하나요? 그냥 내게 주신 이 삶을 대가 없이 살면 안 될까요? 그게 내 일이어서, 그게 내 소명이어서, 그렇게 줄 수 있어서 감사하면 안 될까요? 세상에 주고 싶어도 못 주는 사람 많아요. 나누고 싶어도 나눌 것이 없어서 못 나누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데 나는 지금 적어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있잖아요. 줄 수 있어서, 나눌 수 있어서, 함께 할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겠다는 부담도 갖지 마세요. 그것도 어쩌면 대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랬거든요. 뭔가 더 줘야 하고, 뭔가 더 좋게 해 주고 싶어서 오히려 마음이 힘들 때가 많았어요. 그냥 그저 내게 지금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아무런 대가 없이 나눌 수 있다면 좋겠어요. 

 

그래도 좀 억울하신가요? 뭔가를 주었는데 받지 못하면 섭섭하세요? 염려하지 마세요. 하늘의 상급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난주간 매일 묵상에서 우리는 오늘과 같은 본문을 다뤘죠. 31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2가지 제목으로 묵상을 나눴습니다.  하나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나의 사역이다’였고, 다른 하나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것이었죠. 
우리에겐 바라는 것들이 있죠. 원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런 바람은 우리가 받아야 하는 것으로만 여기죠. 그런데 사실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내가 그 바라는 것에 재능이 있다는 말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게 그 일을 하라고 주신 마음이라고요.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면 이래요. 내가 사랑 받기를 너무 원해요.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마음을 주셨구나’라고요. 또 이런 사람있죠? 다른 사람의 말투에 민감한 사람이 있어요. 그런 사람은 귀신같이 남의 말에 의미를 알죠. 나쁜 말에 민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들은 대부분 그런 자신의 재능을 비판하는데 쓰죠. 생각해 보세요. 왜 이 사람은 말투에 민감할까요? 다른 사람 비판하라고요? 아닙니다. 그에게는 말의 중요성이 재능으로 주어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분들은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을 잘 하도록, 좋은 말을 하도록 사명을 주셨구나’라고요. 이해가 되시나요? 

 

그런데 이들에게는 동일한 원리가 작동합니다. 그런 재능을 주신 것에는 은혜가 있다고요. 오늘 말씀을 보면 큰 상이 있을 것이라고 하죠. 내가 받은 재능을 사용하면, 그러니까 불평하지 않고 내 사명으로 여기면 큰 상이 있다고 말이죠. 재능이 있는 사람, 문제가 눈에 보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불평을 합니다. 왜 더러워? 왜 시끄러? 왜 저런 말을 해? 그런 식으로 말이죠.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상을 발로 차는 일입니다. 그렇게 나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사역으로 여기면, 불평하지 않고 사명으로 여기면 주님의 상이 있다고요. 그래서 내가 치워야지, 그래서 내가 좋은 말을 해야지, 그래서 내가 먼저 사랑해야지.. 하는 자에게 상을 주시죠. 대가를 바라지 않고, 되돌려 받으려는 조건부가 아닌 그저 나의 일처럼, 나의 사명처럼 여기며 내 재능을 사용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주님의 상이 있다고요. 

 

우리 사랑하는 아름다운주님의교회 가족들의 사랑은 모두 열매로 거듭나기를 빕니다. 마음을 비우세요. 되돌려 받을 것을 포기하세요. 대가를 바라지 마세요. 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돌려 받을 마음을 던지면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을 던져버리면, 내 속에 자유가 펼쳐져요. 그 위에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평화와 자유함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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