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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누가복음서묵상일기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9 - 우리에겐 오직 응원할 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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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6:39~42   예수께서 그들에게 또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자기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다.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친구야, 내가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줄 테니 가만히 있어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해야 그때에 네가 똑똑히 보게 되어서,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가 오더니 많이 추워졌습니다. 오늘은 조금 두툼한 옷을 꺼내 입으셔야 할 것 같네요. 옷은 두터워져도 마음은 가볍고, 날씨는 추워도 가슴은 따스한 오늘을 시작하시길 빕니다.

 

또 다른 비유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아마도 유대 속담에 그런 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면 어떻게 되는지에 관한 속담 말이죠. 그 속담을 가지고 비유를 하시죠. 자신의 눈에는 들보가 있으면서 남의 눈에 티를 빼 주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거죠.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들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대들보라는 말은 들어 보셨겠죠? 대들보란 건축 구조물 가운데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가로질러 지붕을 떠 받치고 있는 구조물을 뜻하죠. 어떤 단체에서 중요한 사람을 주로 그 단체의 대들보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그 단체를 책임지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건물의 가장 중요한 구조물이 바로 대들보입니다. 그러니까 들보는 그런 크고 무거운 목재를 뜻하는 말이죠. 그런데 그런 목재가 어찌 눈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 큰 허물을 뜻하는 말이겠죠. 

 

그런데 이에 대비되는 '티'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티는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이 또한 티는 확실치 않아도 티끌이라는 단어는 익숙하실 겁니다. 티끌은 티와 먼지를 합친 말이죠. 이 티는 나무를 다듬다 보면 생기는 목재 가루를 뜻하는데요. 먼지보다는 조금 큰 잔 부스러기를 말합니다. 

 

사실 눈에는 먼지가 들어가도 아프고 따갑죠. 그래서 티도 들어가기 힘듭니다. 그러나 들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겁니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비유인 셈이죠.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자기는 들보를 눈에 넣고 남의 눈의 티를 꺼내겠다고 하는 이들이 있다는 거죠. 그런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을 예수님은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이 말씀에 저의 가슴이 다 뜨끔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목회자로 다른 이들에게 설교하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죠. 사실 생각해 보면 내 눈에 더 큰 들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교인들보다 지혜가 낫지도 않죠. 어리석기로 말하면 더할지도 몰라요. 그런데 목회자라고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고 내 생각을 주입하려고 할 때가 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면서 자신을 돌아볼 때 회개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젊은 혈기로 세상을 섣불리 판단하고 사람을 획일화하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했던 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죠. 알면 얼마나 안다고 가르쳤는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인생을 논하고, 깨달았으면 얼마나 깨달았다고 마침표 찍듯이 확신하고 정죄하고 판단했는지, 돌아보면 아찔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를 확신의 종교로 착각합니다. 확신이란 뜻을 내 생각을 주장하고 고집하는 것으로 알죠. 그러나 확신은 내가 지금 다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확신은 내가 산 시간이 전부 다라는 뜻이 아니에요. 확신은 지금 나도 자라고 있고, 아직 하나님이 나에게 하실 일이 많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내가 모르는 모든 일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드러내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맞다고 고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뭘 알아서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줄 수 없어요. 우리에게는 누군가를 가르칠 힘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에게 조언할 능력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를 응원하는 것뿐입니다. 누군가를 가르치고 바꾸는 일이 우리의 일이 아닙니다. 그저 응원하고 사랑하고 기다려주고 축복하는 일만이 우리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한 것으로, 우리가 아는 것으로, 우리가 느낀 것으로 우리는 오늘도 하고 싶은 말이 많겠죠? 내가 그렇게 경험하고 알고 느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말해 준다고 사람들이 변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가르쳐서 바뀌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사역이 아니죠.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오직 그저 응원해 주는 것뿐입니다.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믿어주는 것이고요.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 주는 것뿐이죠. 격려와 축복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의 다짐과 고백으로 묵상을 마칠까 합니다. 저의 목회는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내 경험을 알려주는 목회가 되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오직 나에게도 지금 일하시고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시는 것처럼 우리 공동체 가족들 모두에게도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으며 그저 같이, 함께, 서로 격려하고 응원하고 축복하며 함께 자라나는 목회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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