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30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고 하지 말아라.
좋은 아침입니다. 웃을 일 없는 삶에 웃음을 창조하고, 좋을 일 없는 현실에 좋은 생각과 말을 거듭나게 하는 믿음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 공동체 가족들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짧은 구절을 묵상합니다. 그만큼 한절 한절이 귀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에 한 구절의 격언을 외듯 말씀을 가슴에 새겨보면 좋겠습니다.
연이틀 저항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한 저항이라고 이름을 붙였죠. 그 저항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인 최소한의 저항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반응, 똑같은 분노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죠. 우리는 권리를 침해당하거나 자존심이 긁힐 때 분노합니다. 누군가 무시하거나 모욕을 줄 때 상처를 받죠. 때론 덜 갖고 덜 얻으면 불만이 쌓입니다. 이는 누구나 똑같죠. 대부분 반응이 같습니다. 마치 똑같은 교육을 받아서 똑같이 반응하는 것처럼 기계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일률적인 반응에 저항하시죠.
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모욕을 해도 반응이 다를 때가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나의 기분과 관련되어 있죠. 우리의 기분이 좋은 때는 모욕쯤은 가볍게 넘어갑니다. 아니 들리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상처도 덜 받죠. 기분이 좋으면 마음도 넉넉해집니다. 내 손에 들은 것을 남에게 거저주는 일에 인색하지 않죠. 그럼에도 우리는 상처, 공격, 모욕과 차별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고 여깁니다. 오히려 봐주고 넉넉한 마음을 바보 같다고 말하기도 하죠. 어쩌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저항은, 메마른 내 마음에 촉촉한 은혜와 감사를 심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만들죠. 내용은 간단합니다. 달라는 사람에게 주라고 말씀하시죠. 또한 가져가는 사람에게는 도로 찾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에는 서로 다른 의미가 있어요. '달라'와 '가져가다'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부탁의 의미가 강한 반면에 다른 하나는 강제성이 보이죠. 그런데 뒤에 이어진 말씀을 보면 또 다른 의미가 떠오릅니다. '달라'는 사람에게는 그저 '주라'고 하시죠. 여기에는 '달라'는 사람보다 '주는' 사람의 입장이 훨씬 큽니다. 다시 말해서 주고 싶어서 주는 것과 같죠. 반면 '가져가는' 사람에게는 돌려받지 말라고 하시죠. 이는 '가져가는' 사람이 돌려주겠다고 말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빌려가는 의미가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도로 찾으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서로 다른 두 문장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달라고 해서 주던, 갚겠다고 해서 주던, 주는 사람은 전부 주고 싶어서 주는 일로 하라는 거죠.
저는 일주일의 삶 가운데 일정한 루틴이 있습니다. 그중에 교회 공동체 가족들을 위해 하는 것이 있어요. 식물에 물을 주고 가꾸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이미 클 대로 큰 식물들을 다루기는 쉽지 않죠. 게다가 식물이다 보니 여러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죠. 시들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게 참 힘들어요. 그런데 그런 힘듦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감사하고 행복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공동체 가족들이 자연과 함께 숨 쉬고, 푸르른 잎들을 보며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꿈꾸기 때문이죠. 이것저것 준비하고 청소하고 관리할 일들이 있죠. 이 또한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에 의미가 있어요. 어린 자녀들이 위험하지 않게, 더 깨끗하고 편할 것을 생각하면 모든 준비 과정이 감사할 따름이죠. 아마도 어머니가 그러셨을 것 같아요. 아침 일찍 일어나 따순 밥을 차리고 대접하는 일이 어디 쉬웠을까요? 어디 엄마라고 말만 하면 척 밥상이 차려졌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수고와 고생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먹고 기뻐할 사랑하는 자녀들, 가족들 때문이겠죠. 그 사랑이 자신을 거저 주게 만드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젊은 남자 집사님들은 집안일을 잘 도와주시죠?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세대를 논하기 전에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탓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이라고 깨닫고 집안일 잘 도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다 보니 느끼는 점이 많아요. 그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자발적인 것입니다. 예전에도 저는 가끔 설거지 같은 일을 했는데요. 그때 제 마음이 어땠는지 아세요? '이렇게 설거지하면 칭찬받겠지?' 이런 마음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칭찬이 없으면 화가 났죠. 속으로는 '다시는 안 한다.'며 짜증을 내기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았어요. 제가 왜 그러는지... 그게 다 내 일이 아니어서 그랬습니다. 내 일이 아닌데 도와주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니 생색을 냈던 겁니다.
요즘에는 내 일처럼 하려고 해요. 아니, 내 일을 합니다. 그랬더니 칭찬받거나 생색낼 그런 마음이 없어지더라고요. 내 일에 누구의 칭찬을 바랍니까? 오히려 이제 일하는 것이 기뻐요. 나로 인해 누군가 웃을 수 있는 것이 기쁘고, 나로 인해 누군가 편하게 쉴 수 있다면 그게 뿌듯하죠. 자발적인 헌신은 그런 기쁨을 줍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기쁨을 주님께서 아신다는 거죠. 말씀드린 적 있잖아요? 주님은 나의 기쁨을 보신다고요. 우리의 중심에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분이 하실 일을 믿고 의지하며 안심하고 기뻐하는 그 중심을 주님이 보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기쁨으로 인해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체하지 못하시고 은혜와 복을 부어 주시죠. 그렇게 우리의 자발적인 수고, 자원하는 심령의 헌신은 주님의 축복을 부르는 가장 귀한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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