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6:29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
좋은 아침입니다. 밖에는 빗소리가 들리네요.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 속담이 있죠? 이번 주 비 소식이 있습니다. 가을비는 겨울을 준비하라는 전령처럼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올 겨울은 많이 춥다는 예보들이 많습니다. 그런 소리 들을 때마다 겁이 나죠. 그러나 우리는 즐거운 마음으로 겨울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뭐든 기쁘게 맞이하는 이들에게는 다 선물이 되기 때문이죠.
어제와 동일한 본문의 말씀을 읽습니다. 어제 묵상하지 못한 것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뺨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오늘은 겉옷과 속옷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만 당시 유대인의 의복은 우리와는 조금 다른 개념이었습니다. 주로 우리가 말하는 옷이라는 개념은 유대인에게는 속옷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보다는 훨씬 간단했지만 우리의 개념처럼 보이지 않는 옷이 아니라 일반적 옷을 의미했죠.
반면 유대인의 겉옷은 우리의 개념으로는 생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겉옷은 옷의 역할보다 기후의 변화에 따른 보호의 역할이 훨씬 컸기 때문이죠. 유대의 기후는 일교차가 큽니다. 때론 대낮에는 태양빛이 강렬했죠. 이 두 가지 경우 모두 겉옷이 필요했습니다. 밤에는 기온 저하를 막는 역할을 했죠. 마치 이불과 같은 개념입니다. 낮에는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도 했고요. 우리의 개념과는 달리 유대인의 겉옷은 생명과 직결된 중요한 도구였죠. 그래서인지 유대법에는 겉옷을 빼앗거나 압류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이는 생명을 위협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죠. 출애굽기에는 겉옷과 관련되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2:26 너희가 정녕 너희 이웃에게서 겉옷을 담보로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이처럼 겉옷은 유대인에게 중요한 재산이자 생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것을 빼앗는 자가 있다는 거죠. 사실 이 비유는 해서는 안 되는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겉옷을 빼앗는 그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죠. 그것은 살인행위나 진배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그런 무리한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당시 유대사회는 지극히 불평등한 사회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열악했죠. 일제강점기를 살지 않은 저로서는 일제강점시기 우리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요. 당시 유대사회는 우리의 일제강점기와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 최악이었죠. 빈부의 격차는 말할 것도 없고 이중으로 과세되는 세금에 등골이 휠 정도였습니다. 오죽하면 세리들을 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겠습니까?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갈 때도 세금을 내야 했죠. 민심은 흉흉했고, 곳곳에 거지들과 병자들, 조금만 으슥한 곳에는 어김없이 강도들이 판을 쳤습니다. 어쩌면 당시 유대인의 삶 자체가 살인에 가까울 만큼 처참했죠. 소위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이런 민중의 삶에 관심도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당연하게 여겼죠.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겉옷을 빼앗는 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뿐 아니라 로마를 향한 지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저항하라고 말씀하죠. 겉옷을 빼앗는 자가 있다면 속옷까지 주라고 말이죠. 이는 단순히 모든 것을 다 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힘없이 당하라는 말도 아니죠. 주님의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너희들이 나의 재산, 나의 인권, 나의 삶을 다 빼앗아 짓밟는다고 해도 나의 믿음만큼 빼앗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말하죠.
로마서 8:38,39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저항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답이고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는 터전입니다. 그 선한 저항 위에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기록됩니다.
오늘도 우리의 즐거운 기분을 빼앗으려는 시도가 작동하겠죠? 오늘도 우리의 좋은 생각을 방해하는 일들이 벌어질 거예요. 때론 그 방해들은 눈에 보이고, 직접 느껴질지도 모르죠. 가까이서 우리를 욱여 쌀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내게서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빼앗을 수 없다.'라고요.
'묵상하는말씀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7 - 내가 바라보는 것이 나의 길이 됩니다. (1) | 2024.10.21 |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6 -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0) | 2024.10.20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5 - 우리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0) | 2024.10.18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4 - 누군가 나에게 대접해 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나의 사역입니다. (0) | 2024.10.17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3 - 자발적인 수고는 축복을 부르는 가장 귀한 도구입니다. (0) | 2024.10.16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1 - 선한 저항을 하세요. (0) | 2024.10.14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30 - 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2) | 2024.10.13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29 -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합니다. (0) | 2024.10.11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28 - 가치는 역전됩니다. (3) | 2024.10.10 |
누가복음서묵상일기 127 - 저절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0) | 2024.1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