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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여호수아서묵상일기 47 -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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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서 7:6~9   여호수아는 슬퍼하면서 옷을 찢고, 주님의 궤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저녁때까지 있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도 그를 따라 슬픔에 젖어, 머리에 먼지를 뒤집어썼다. 여호수아가 아뢰었다. "주 하나님, 우리 백성을 요단 강 서쪽으로 잘 건너게 하시고는, 왜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기어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차라리 우리가 요단 강 동쪽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좋을 뻔하였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이 원수 앞에서 패하여 되돌아왔으니, 이제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나안 사람과 그 땅에 사는 모든 주민이 이 소식을 듣고 우리를 에워싸고, 이 땅에서 우리의 이름을 없애 버릴 터인데, 주님께서는 주님의 위대한 명성을 어떻게 지키시겠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비 소식이 있네요. 환절기 비를 맞는 것은 안 좋으니 출근길 우산 하나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비가 와도 좋은 날, 비가 와서 기쁜 날, 모든 상황 속에서 주님을 찬양하는 하루 되시길 빕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수아의 탄식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이성에서의 패배가 몹시 아쉬웠던 것 같아요. 탄식은 원망에 가까운 진한 아쉬움을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아하니 여호수아는 아이성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어제 묵상에서 그런 말씀을 드렸죠? 아이성의 패배는 정탐꾼의 보고가 잘못되었거나 혹은 아이성을 얕잡아 본 이스라엘의 교만이 원인이 아니라고 말이죠. 오늘 본문이 그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 겁니다. 3,000명만 간 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거죠. 
 
사실 그렇습니다. 아간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몰래 도둑질한 것을 여호수아가 알 수 없는 노릇이죠. 그러니 여호수아의 입장에서 보면 마른하늘의 날벼락같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뭐가 문제인지 모를 때가 가장 답답하죠. 이제 이어지는 본문에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무엇인 문제인지, 어떤 점을 해결해야 하는지 알려주시는데요. 그것은 그때 가서 묵상하기로 하고요.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수아를 통해 보게 되는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묵상하기로 하겠습니다.
 
여호수아의 억울함은 능히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여호수아는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있죠.
 
여호수아서 7:7   "주 하나님, 우리 백성을 요단 강 서쪽으로 잘 건너게 하시고는, 왜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기어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차라리 우리가 요단 강 동쪽에서 그대로 살았더라면 좋을 뻔하였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소리죠? 그 비슷한 소리를 제가 찾아보았습니다.
 
출애굽기 14:11,12   "이집트에는 묘 자리가 없어서, 우리를 이 광야에다 끌어내어 죽이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내어, 여기서 이런 일을 당하게 하다니, 왜 우리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이집트에 있을 때에, 우리가 이미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광야에 나가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 사람을 섬기는 것이 더 나으니, 우리가 이집트 사람을 섬기게 그대로 내버려 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출애굽기 16:3   "차라리 우리가 이집트 땅 거기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배불리 음식을 먹던 그때에, 누가 우리를 주님의 손에 넘겨주어서 죽게 했더라면 더 좋을 뻔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나와서, 이 모든 회중을 다 굶어 죽게 하고 있습니다."
 
처음 구절은 홍해 앞에 섰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하던 소리이고, 두 번째 구절은 광야에서 굶어 죽게 생겼다고 모세와 아론을 향해 불평을 늘어놓던 것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에게 잘못을 전가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죠. 여호수아의 오늘 본문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억울하다손 치더라도 그는 이렇게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온전한 순종과 전술로 전쟁에 임했다고 해도 문제가 생기고 가로막힘이 있다면 거기에는 주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다시금 자신들을 돌아보는 것이 맞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 모습은 여호수아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어떤 일이 벌어지면 우리는 남의 탓을 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 남에는 하나님도 포함되어 있죠. 나는 잘했는데 하나님이 잘못했다는 식의 투정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잖습니까? 분명 아간의 잘못 때문 아닙니까? 혹여 몰랐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문제 아닙니까?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막힐 때는 막힌 이유가 있고, 안 될 때는 안 되는 이유가 다 있어요. 나는 잘한 것 같아도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그 이유 가운데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다 안다고 화살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진정한 교만이죠. 내가 모르는 문제가 내 안에 있습니다. 다 잘했는데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빠뜨리기도 하죠. 보통 무심결에 넘어가는 습관들이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뱉는 말이 그렇고, 아무 생각 없이 하는 행동들이 그래요. 
 
걸림돌이 앞에 놓일 때 우리는 불평하기 이전에 내 안에 잘못된 작은 일들은 없는지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욕심들이 움직이고 있지는 않은지, 나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무심코 지나갔던 잘못된 관습은 없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그때 해결의 실마리를 풀 수 있죠.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며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는 것으로는 패배를 승리로 바꾸지 못합니다. 남 탓을 하며 기분을 푼다고 내가 성장하는 것도 아니죠. 오로지 나도 모르는 내 안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발견하고 찾아 고쳐야 새로운 영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끝없이 나를 고쳐 나가야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죠. 그렇게 오늘도 어제와 다른 나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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