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정탐꾼 두 사람을 보내며 일렀다. "가서, 몰래 그 땅을 정탐하여라. 특히 여리고 성을 잘 살펴라." 그들은 그곳을 떠나, 어느 창녀의 집에 들어가 거기에서 묵었다. 그 집에는 이름이 라합이라고 하는 창녀가 살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한 주간을 시작하는 이 아침, 보다 새로운 마음과 기분으로 상쾌하게 출발하시길 기도합니다.
세 번째 같은 본문으로 묵상을 나눕니다. 그동안 '싯딤'이라는 장소와 '정탐꾼'이라는 주제로 묵상을 나눴는데요. 오늘은 '라합'이라는 여인에 대한 묵상을 나누려고 합니다. 어쩌면 이 여인이 여호수아 2장을 이끄는 핵심 인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히 상세한 설명들이 이어지죠. 이런 상세한 설명은 성경에서도 그리 흔치 않은데요. 읽어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내용들처럼 보이기 때문에 더욱 눈길을 끕니다. 다만 이는 라합이라는 여인의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시다시피 라합은 이름을 가진 인물입니다. 특히 여인으로서 성경에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인데요. 라합은 후에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 오벳을 낳습니다.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죠. 이는 마태복음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라합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인물인 셈이죠.
이 족보에 특이한 점은 또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아브라함에서 예수님까지 족보가 42대를 거치는데요. 그중에 여인의 이름이 딱 네 번 나옵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마리아, 그중에 라합과 룻은 이방여인이죠. 라합은 가나안 족속으로 여리고에 살았고, 룻은 모압족속으로 시모 나오미와 유대 땅 베들레헴에 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대민족은 이방민족에 대한 적대감이 강한 민족이죠. 이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유일신 사상을 가진 신앙관이 강한 때문이었죠. 그래서 대단히 배타적인 민족입니다. 그래서 율법에는 이방 민족과의 결혼을 불허하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민족의 뿌리인 족보에 이방 여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들을 숨기지도 않아요. 당당하게 그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를 통해 주시는 메시지가 있는 듯하죠. 그것은 민족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들의 관계가 훨씬 강하다는 것이죠.
우리는 민족과 나라, 인종과 혈통의 중요성을 강조하죠. 아무리 세계화된 시대에 살지만 여전히 인종차별이 횡행하고 여전히 나라 간의 다툼이 존재합니다. 민족 간의 혈투는 처참한 도륙으로 이어지기도 하죠. 민족뿐만이 아닙니다. 성별이나 사회적 차별 등이 여전하죠. 양성평등이니 양극화 해소니 많은 수사들이 등장하지만 우리 깊은 내면의 뿌리 박힌 가치관을 뒤집지 않고는 해결하기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직업적 차별은 또 어떻습니까? 라합은 여성이면서 특히 성경에는 창녀라는 불편한 단어로 그의 직업을 등장시키죠. 물론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문헌에는 기생이라고도 하고, 어떤 역사가는 여관 주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당시 여러 사회적 여건으로 보아 인정받는 직업은 아니었던 듯하죠. 그럼에도 성경은 그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그럼에도 그의 핏줄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죠.
직업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어떤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어느 나라 사람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해요. 내가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가졌든, 내가 어떤 인종, 성별, 신분이든 그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생명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내가 비천한 직업을 가졌다고 옳은 일을 하지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가문의 출신이라 해도 그가 다 옳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법이죠. 그래서 신분으로, 직업으로, 성별이나 학벌, 지역이나 심지어 그의 과거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입니다. 지금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어떤 꿈이 있는지, 어떤 마음과 시선을 가졌는지가 중요합니다. 비천해도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고, 못 배워도 주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무시하는 사람이어도 주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일 수 있고, 모두가 버려도 주님이 버리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되었어도 사회적 편견과 잣대는 하나님을 앞서지 못합니다. 아무리 견고해도 인종과 민족, 나라와 성별 등이 하나님 판단의 기초가 될 수는 없어요. 하나님은 오직 나를 귀한 생명으로만 보십니다. 오늘도 우리는 편견과 차별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주님이 만드신 생명으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역사로 오늘을 바라보며 살길 원합니다. 주님이 새롭게 창조하신 하루로 오늘을 맞이하는 우리이길 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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