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묵상합니다.
연속적으로 구약성경을 읽게 되네요.
묵상의 순서는 제가 임의대로 정하는 것은 아니고요.
예전부터 썼던 묵상자료집인 GT가 정한 대로 저희도 따라가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임의대로 정했다면 다른 본문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신명기를 어렵게 읽어왔기 때문이죠.
이제는 조금 편하게 묵상을 하고 싶은데...
세상에 묵상이 편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묵상은 나의 폐부를 찌르는 것이 정상이죠.
본시 묵상이라는 것이 나를 뒤집어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연속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는 것은 힘이 들 것 같아요.
우리는 이 책의 저자인 예레미야 선지자를 곧잘 '눈물의 선지라'라고 부르는데요.
그것만 보더라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어떨지 예상이 되시죠?
그래도 순종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이죠.
아마도 누군가 이 순서를 정했겠죠?
그러나 저는 이것이 우리 교회에 전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리고 신명기서에서처럼 전혀 새롭고 색다른 감동의 말씀이 펼쳐질 것을 기대합니다.
여러분도 함께하시죠.
포기하지 마시고요.
아시다시피 우리의 매일 묵상은 공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역사적 배경이나 신학적 문제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물론 제가 잘 모르는 것도 있으니 다루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 다루는 것입니다.
그래도 예레미야서를 들어가기 전 예레미야가 누군가는 알고 가야 할 것 같네요.
예레미야는 유다왕국의 요시야왕 때 선지자로 세워졌습니다.
요시야왕은 남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으로 기록된 왕입니다.
요시야 이후 남유다는 급속도로 악해지죠.
그리고 멸망으로 길을 걷습니다.
그러니까 예레미야는 꺼져가는 불꽃을 바라보며 사역했던 인물인 셈입니다.
그가 한 말들은 멸망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다간 멸망할 것이라는 진실을 너무도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한 거죠.
저는 예레미야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말 사람들이 듣기 싫었겠구나..."
많은 사람이 위로와 격려의 말을 원합니다.
자신을 직시하길 두려워하죠.
물론 사회적으로 누군가를 직설적으로 보고 말하는 것은 예의 있는 행동은 아닙니다.
가급적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말한다느니, 직설적으로 말한다느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솔직한 것인지, 옳은 것인지, 혹은 직설이 정말 직설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동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누군가를 다독여주고, 격려해 주세요.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려와 위로에 익숙한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남 앞에서가 아니라 내 앞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이죠.
자신 앞에서도 자신을 직시하지 못 하는 일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 앞에서는 자신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자신 앞에 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직시하고, 올바로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쓴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기 때문이죠.
목회자로서 죄송한 이야기지만, 교회서만큼은 쓴소리를 갈망하세요.
누구도 우리에게 쓴소리하지 못하는 세상입니다.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들고, 억누르는 것은 쓴소리가 아니에요.
쓴소리란 우리가 잘못된 길이 아닌 올바른 길을 걷게 하려는 뼈아픈 잔소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쓴소리의 절정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지 않는 것을 보고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던지셨습니다.
우리에게 전기적 충격을 주신 것이죠.
그처럼 쓴소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마치 나를 대신해 누군가 대신 죽는다면 어떻겠습니까?
그 사실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겠어요?
예레미야는 그런 선지자입니다.
너무 서론이 길었죠?
오늘 본문에서 제게 깊은 인상의 구절은 하나님과 예레미야의 대화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태어나기도 전부터 선택하셨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레미야의 반응은 겸손입니다.
자신은 아직 어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리다는 말은 실제로 예레미야가 어렸기 때문인 듯 합니다.
보통 선지자들은 나이가 지극했습니다.
사무엘처럼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신이 아직 아니라고 하죠.
이는 다른 말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죠.
무슨 물리적인 음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는 누군가를 위해 나를 헌신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죠.
어느 때는 내 성공이 아닌 남의 성공을 위해 살고자 하기도 합니다.
마치 바쁜 와중에 쓰러져 있는 이를 볼 때 드는 생각과 같습니다.
저를 도와야 하는데...
그런데 그 생각이 마침표도 찍기 전에 우리의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떠오릅니다.
"너 말고도 도울 사람은 많아.. 너는 경험이 없잖아.. 너보다 더 잘 도울 사람 있을 거야"
저는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유대에는 보통 어리다고 이야기할 때, 생물학적인 나이를 일컫지 않습니다.
주로 선악에 대한 분별력 유무에 따라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솔로몬도 자신을 작은 아이로 표현했었죠.
그것은 나이가 어리다는 의미가 아니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죠.
모세도 자신은 말이 어눌하다고 고백하죠.
아이와 같다는 의미입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너는 아직 너무나 어리다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로 가고, 내가 너에게 무슨 명을 내리든지 너는 그대로 말하여라."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리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영적으로 미숙하다고 변명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고 회피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명하신 대로 가면, 주님이 일하게 하시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말하면, 주님이 책임지실 것입니다.
주님이 명하시면, 누구라도 선지자가 되고,
주님이 정하시면, 누구라도 사역자가 됩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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