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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내 안의 거짓 예언자를 진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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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14:11~14,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백성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나에게 기도하지 말아라. 그들이 금식을 하여도, 나는 그들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겠다. 또 그들이 번제물과 곡식제물을 바쳐도, 나는 그것을 받지 않겠다. 나는 오히려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전멸시켜 버리겠다.” 그래서 내가 아뢰었다. “그렇지만 주 하나님, 저 예언자들이 이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기근이 오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께서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화를 주신다’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예언자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예언자로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그들의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이다. 미국의 한 교회에서 성도가 간증을 했다. 그 간증자는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도였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나는 주님께 주차할 공간을 달라고 기도하죠. 그러면 주님은 언제나 그렇게 해 주십니다.”
이 간증을 통해서 우리는 주차 공간까지 준비해 주시는 섬세하신 하나님을 본다. 물론 이 간증에 틀린 구석은 없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그분 스스로 결정하신다. 그런데 이 간증을 듣던 목사는 그 여 성도의 마음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만일 그 시간 아픈 아이를 응급으로 데리고 온 다른 여인이 주차 공간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대답이 무엇이었는지 아는가? 그녀는 씩씩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 여인은 나보다 기도를 덜 한 겁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호모 인쿠르바투스 인 세 homo incurvatus in se  : 사람은 자신에게 몰입한다.
이것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의 본질을 잃은 신학의 결과다.
마7:7~11,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이 말씀의 의미를 우리는 2가지 차원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1)아버지에게 너의 필요를 구하기만 하면 주신다.
(2)어떤 것을 구하더라도 좋은 것으로 주시리라.
이 느낌은 마치 주셔야만 하는 아버지와 받아야만 하는 자녀의 권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말씀의 결론부에 가면 사뭇 의미는 달라진다. 결론부는 12절이다.
마7:12,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그러므로”는 위의 말에 대한 결론, 즉 핵심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관문이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대로”는 '내가 가지고자 하는대로' 혹은 '받고자 하는대로'라는 뜻이다. 이어 결론으로 들어간다.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즉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먼저 주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받고자 하는 마음만큼 남에게 먼저 주라는 말씀이다. 결국은 말씀의 핵심은 남에게 주기 위해 아버지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다.
어느 남자가 버스 타려고 지갑을 꺼냈는데 돈이 한 푼도 없었다. 둘러보니 어여쁜 아가씨가 곁에 서 있었다. 남자는 아가씨에게 말을 걸었다.
“저... 죄송하지만 차비를 좀 빌릴 수 있을까요?”
한참을 쳐다보던 아가씨가 남자에게 살며시 말했다.
“저... 시간 있으세요?”
남자는 흠칫 놀랐지만 그 말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뜻밖에도 여자로부터 데이트 신청을 받는 횡재한 기분이었으리라. 그리고 아주 행복하고 단호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네! 시간 많습니다.”
그 말에 아가씨는 방긋이 웃으며 다시금 남자에게 말했다.
“.... 그럼 걸어가세요.”
남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 끝까지 듣지 못하면 왜곡되기 쉽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지다.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 불신앙이다. 내가 받고 싶은 것만 받는 것이 불신앙이다.
자녀를 키울 때 부모는 고민을 한다. 훈육訓育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엄하게 해야 하는지 언제 유해야 하는지 헛갈린다. 그 차이가 자녀교육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아이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하여 훈육을 중단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이에게 듣기 좋은 소리만 하면 어떻게 될까? 진짜 훈육은 싫은 소리도 들을 줄 아는 자녀로 만드는 것이다. 어떤 소리도 자신에게 약이 되게 만드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 며칠전 함께 사역하는 목회자와 영화를 보고 토론을 했다. ‘노아’라는 영화였는데 보기 전에 논란이 많았다. 반 성경적인 이야기니, 반 그리스도적인 영화니 말이 많았다. 이 땅에는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린다. 그것을 경험하지 않고, 그 위험에 노출되지 않고 살기란 어렵다. 그렇다면 그런 위험이 닥칠 때마다 우리는 도망가야 하는가?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이유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 좋은 상황만 만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려움 중에도 견디고, 위험을 이기는 건강함을 갖기 위해서다.
요즘 나의 매일 묵상 본문은 사무엘서다. 그 중, 사무엘상 28장의 이야기에는 블레셋과 전쟁을 앞둔 사울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사울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님께 묻는다.
삼상28:5~6,  사울은 블레셋 군의 진을 보고, 두려워서 마음이 몹시 떨렸다. 사울이 주님께 물었으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예언자로도, 대답하여 주지 않으셨다.
사울이 '주님께 물었다'는 본문의 묻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쏴알la;v'이다. 이 단어는 사무엘상 초반에 등장하는 한나Hannah가 하나님께 '구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것와 동일한 단어다. 그리고 사울King Saul이라는 이름도 이 쏴알이란 단어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사울 자체는 하나님께 늘 구하는 자였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시기 않았다. 물론 하나님의 영이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울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의 영이 떠났다는 것은 사울이 회개해도 소용없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누구든 당신 앞에 서기만 한다면 죄인의 기도도 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와 구하기만 한다면 주홍빛 같은 죄도 도말하신다. 그런데 사울의 기도에는 응답이 없다. 사울이 온전히 하나님 앞에 서지 않았다는 것을 배제하고, 응답이 없는 다른 이유는 뭘까 궁금해진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듣고, 원하는 것만 행하는 것은 그것이 말씀에 근거한 일이어도 불신앙이다.
당신이 교육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신이 돈을 버는 이유는 뭔가? 하나님은 남에게 주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을 주신 이유다. 그러나 만약 교육자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가르친다면 어떻겠는가? 만약 소설가가 자기의 부富를 위해 글을 쓴다면 어떨까? 만약 예술가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예술을 한다면 어떻겠는가? 그것이 바로 타락墮落인 것이다. 우리의 재능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데 쓰이도록 되어 있다.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1:8는 말은, '나의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주라'는 말씀이다. 목숨까지도 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진리를 바꾸어 버렸다. 사람들은 본질을 쉽게 잊는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귀중한 존재인지를 잊어버린다. 아버지의 은혜가 얼마나 값진지보다 그 손에 들려있는 재물을 탐낸다. 그리고 본질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만 좋아한다. 자신이 관심 갖는 일을 인정해 주는 사람만 좋아한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표어가 붙어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24시간 대기중!”
예배를 마치 내 느낌이 시원해야 하고, 내 기분이 상쾌해야 온전한 줄 안다. 내가 알고 있고, 내게 듣기 좋은 이야기에만 ‘아멘’을 한다. 십자가보다는 삶의 위로가 더 필요하고, 하나님의 꿈보다는 내 꿈이 더 중요한 시기에 놓였다. 그렇게 목사의 설교를 듣는다. 하나님의 경고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메시지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불러야하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의미가 나의 미래여야 한다는 설교는 끔찍해 한다. 작은 예수가 되라는 메시지는 거의 저주에 가깝게 느낀다. 어떻게 하면 쉽게, 어떻게 하면 편하게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메시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약 2,600년 전, 예레미야가 딱 그랬다. 예레미야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당시 흐르고 있는 신앙의 흐름과 정반대에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괜찮을거야!”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겠어? 자식인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계신 분이야...”
이런 신앙의 흐름 속에서 예레미야의 설교는 돌 맞기 딱 좋다. 오늘날과 너무도 흡사하다.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목소리는, 성공주의 목회와 축복주의 신앙에 묻혀버린다. 십자가의 도는 축복의 도구가 되고, 내 삶의 윤활유로 전락해 버렸다. 이런 현대에 소리치는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있다.
렘14:14,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그 예언자들은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예언자로 보내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명하지도 않았고, 그들에게 말하지도 않았다. 그들이 이 백성에게 예언하는 것은, 거짓된 환상과 허황된 점괘와 그들의 마음에서 꾸며낸 거짓말이다."
나는 목회자의 아들로 자랐지만 목회에는 관심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선교사를 꿈꿨지만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다. 아니 안 하고 싶었다. 사람과 관계되어서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고 자란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을 돕는 일, 봉사하는 일을 하라면 하겠는데 그들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의 일은 못하겠다 싶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해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기 전, 일주일간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다. 이 말씀이 나를 통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근거가 되었다.
겔13:19, 너희는 몇 줌의 보리와 몇 조각의 빵 때문에, 내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나를 욕되게 하였다. 너희는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죽어서는 안 될 영혼들은 죽이고 살아서는 안 될 영혼들은 살리려고 한다.
나의 길지 않은 목회기간 가운데에도 온갖 유혹을 받는다. 그 중의 제일은 바로 “돈”이었다. 자녀가 있는 가정을 가지고 있으며, 보다 풍족한 삶을 영위하고픈 욕망이 가득한 내 안에 돈의 문제는 빠지지 않는 유혹거리다. 그런데 목회자가 어떻게 돈을 벌겠는가? 목회는 돈이 벌릴 컨텐츠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회자가 돈을 버는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다. 바로 거짓 환상을 말하고, 거짓 점괘를 선포하는 일이다.
내 친구녀석 하나가 S대 철학과를 나왔다. 본래 괴짜인 이 녀석은  학교 다닐 때 주역周易을 독파했다. 한번은 식당에 갔는데 식당 아줌마 관상을 보니 식당에서 일할 분이 아니더란다. 식당에서 일할 분이 아니신데 왜 여기있느냐고 한마디 했더니 그 아줌마가 갑자기 자기를 붙잡고 어떻게 알았냐고 하더란다. 알고봤더니 말하면 알만한 재력가의 둘째부인이었는데 가정문제로 집을 뛰쳐나와 남편 속을 끓이게 하려는 심사로 친구 집에 숨어 지내다 그 친구 식당에서 그날, 잠깐 간단한 일을 도와주다 만난 것이었단다. 그러니 그 아주머니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친구녀석을 찾아온 것이다. 강의실을 다 뒤지다시피하며 물어물어 그 친구를 찾아왔다. 그리고는 그 친구 앞에 지도를 펴가며 하는 말이 돈은 얼마든지 줄테니 내가 어떤 땅을 사면 좋은지 봐달라고 했단다. 게다가 그녀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소개로 여타 다른 사람들이 줄지어 그 녀석을 찾아오는 바람에 그는 졸지에 S대에서 유명한 도사가 되어버렸단다. 물론 그로인해 많은 돈도 벌었단다.
최근에 확인되지 않은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나돌았다. 경기지역의 급성장한 대형교회의 목회자가 심방을 하면서 기도값으로 천만원에서 천오백만원의 돈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언듯 이해불가의 이야기이지만 성공보장과 보험 성격의 기도에 그만큼의 돈을 지불하는 이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것이 목회자만의 일인가? 우리모두는 하나같이 하나님의 부름받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 이런 거짓들의 속삭임이 있다. 환상을 보는 것이 말씀보다 더 우선하고, 점괘를 보듯이 하나님보다 사람의 말에 현혹되는 경향들이 많다. 신앙은 말씀이 아닌 마음으로 꾸며낸 거짓말로 가득하다.  이런 메시지들이 기독교를 빙자해서 선포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도 당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예수 믿는 당신은 특별한 복을 받게 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굶주려 죽어나가도 당신은 배가 부를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전쟁의 공포에 놓여도 당신은 안전하게 될 것이다.”
“상대적 박탈감에 허덕이는 수많은 아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도우시는 당신의 자녀들은 1등을 할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 가운데 빠질지라도 주를 믿는 당신만은 BMW를 타고 다니는 영광도 누릴 것이다.”
혹시 이런 말이 왜 틀린지 고개를 갸우뚱 하고 있는 독자가 있을지 모른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네게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주셨어? 그럼 나도 예수님을 선택할래!”
이것은 우상숭배이지 복음이 아니다. 이것은 전도도 아니며, 이것은 복음증거도 아니다. 이것은 싸구려 복음이고,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치를 추락시키는 믿음이다. 진짜 예수님의 가치를 높이는 상황이 무언지 아는가?
어떤 집사가 아이를 가졌는데 검사를 해 보니 다운증후군Down's Syndrome 판정이 나왔다. 한마디로 장애아를 가진 셈이다. 다운증후군이 어떤 장애인지 아는가? 소위 몽골리안병이라고 불렸던 이 병의 수명은 30년이 채 되지 못한다. 얼굴모양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지능도 현저히 떨어진다. 백혈병이나 심장 기형 등의 합병증이 유발되는 대표적인 장애 질병이다. 그런 아이를 내 배 속에 품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사전에 장애 검사를 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유산” 그것도 합법적 유산이 가능하다. 그런 판정 앞에서 이 두 집사의 고백은 이런 것이었다.
“팔 다리 없는 것보다 감사하다. 하나님 주시면 감사히 감당하겠다.”
나는 이 고백을 듣고 놀랐다. 당신은 형용할 수 없는 고통, 말할 수없는 아픔 앞에서 이런 고백이 가능한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충분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시며, 가장 소중한 분이십니다.”
아니라면 당신이 부르짖는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닐지도 모른다.
시73:25,26    내가 주님과 함께 하니, 하늘로 가더라도, 내게 주님 밖에 누가 더 있겠습니까? 땅에서라도,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이 다 시들어가도, 하나님은 언제나 내 마음에 든든한 반석이시요, 내가 받을 몫의 전부이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누리려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해 이 땅에 선포하는 메신저다. 주님이 말씀하신 포도원농부의 비유를 아는가? 주인이 때가 되어 포도원을 되찾기 위해 그들의 종을 보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를 때리고 박해하고 쫓아내고 죽였다. 바로 주인의 부름을 받아 그곳에 가는 종으로 우리는 부름 받았다. 그 농장을 주인에게서 빼앗으려고 서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것이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예비하는 자들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자들이 있는 한 사기꾼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내 안에 거짓복음, 거짓 십자가가 있는 한 거짓예언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부와 건강의 메시지를 좋아하는 한 거짓예언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예수님께 부와 명예는 없었다. 그에게는 십자가만 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 많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려 들어간 곳에서 맞고 박해받고 그리고 죽임을 당했다. 복음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복음은 자신의 부를 늘려주는 도구도 아니다. 복음은 나를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복음이다. 결국 복음은 남을 위한 것이다.
나를 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나의 부와 명예와 건강의 도구로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내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는 하나님을 나의 생각과 계획의 종으로 삼지는 않았는지 내 믿음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는 나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깨비 방망이로 하나님을 사용하지는 않았는지 내 영성을 돌아보아야 한다.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 되게 내 안의 거짓 예언자들을 진멸하라. 아버지는 나의 도구가 아니라 나의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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