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32:36~41,
“이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너희는 이 도성을 두고, 전쟁과 기근과 염병을 만나서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 들어간 도성이라고 말하지만, 똑똑히 들어라. 내가 분노와 노여움과 울화 때문에 그들을 여러 나라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이제 내가 그들을 이 모든 나라에서 모아다가, 이 곳으로 데려와서 안전하게 살게 하겠다. 그러면 그들이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과 삶을 주어, 그들이 언제나 나를 경외하여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길이 복을 받게 하겠다. 그 때에는 내가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고, 내가 그들에게서 영영 떠나지 않고, 그들을 잘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마음 속에 나를 경외하는 마음을 넣어 주어서, 그들이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게 하겠다. 나는 그들을 잘되게 함으로 기뻐할 것이며, 나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이 이 땅에 뿌리를 굳게 내리고 살게 하겠다.”
작년 말 침례교회 김관성목사의 [본질이 이긴다]라는 책을 읽었다. 거기에 부록으로 이런 글이 나온다.
[목회 성공하고 싶으냐? 형이 몇 가지 팁을 알려주마]
부제는 [사역을 하면서 주님과 확실히 이별하는 방법]이다. C.S.루이스Clive Staples Lewis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와 오스 기니스Os Guinness의 [악마의 비밀편지를 훔치다]라는 책의 유형을 본 따서 쓴 이 글은 오늘날 목회현장을 풍자한 글이다. 좀 긴 글이어서 줄여서 소개한다.
첫째, 신학적인 방향을 잘 잡아라. 개혁주의 신학이니, 재 침례파 신학과 같은 것에는 귀도 기울이지 마라. 사람들 모으는 일에는 거의 도움이 안 된다. 오히려 부흥시키려고 하는 의욕을 상당히 꺾어버린다. 애당초 맛을 보지 마라. 잘못하다가 그쪽 분야의 대가들을 통해서 성경 중심적인 신학을 형성하게 되면 너의 신세는 그날로 끝난다. 신학교 시절에 신학 공부 쪽으로 너의 방향을 잡지 말고 기타나 드럼 등을 수준 있게 배우고, 컴퓨터나 교회성장 프로그램에 익숙한 전문가가 되라. 그것이 실제적인 힘을 제공해준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지식과 능력을 배양해라. 그래야 졸업 후에 살아남는다.
둘째, 전도사로 사역할 때 무조건 큰 교회로 가라. 취직되면 죽기 살기로 일해라. 어떤 한 분야에서 너의 주특기를 동원해서 담임목사의 눈에 너라는 존재를 확실히 각인시켜야 한다. 그 교회를 물려받겠다는 생각은 무리수를 두는 것이지만, 담임 목사님에게 인정받게 되면 개척 나올 때 거금의 개척자금과 알짜 성도들을 데리고 나올 수 있다. 조금 과한 이야기 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에게 실제적인 주님은 담임목사님이다. 형이 사역하러 가니까 첫 질문을 던지는데 기절하는 줄 알았다. 질문이 뭔 줄 아냐? "이 교회에서 사역할 때 전도사님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1번 하나님, 2번 담임목사님" 너라면 뭐라고 대답할래? 이런 질문 앞에 당당히 2번을 외칠 수 있어야 인정받으며 사역할 수 있다. 담임목사님도 1번인 줄 알지만 네가 2번을 크게 외칠 때 웃으면서 너를 인정하게 된다. ㅎㅎ. 형이 별것 다 가르쳐 준다. 명심해라. 일정 부분의 뻔뻔함은 핑크 빛 고속도로로 가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양심에 약간 걸리냐? 그러나 순간의 아부와 충성이 평생의 목회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라. 알겠냐?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개척에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좋게 말해서 순수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큰 교회로 사역하러 가라고 권하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 성공을 꿈꾼다면 사모를 잘 만나야 한다. 큰 교회에는 장로님이나 권사님의 따님들이 많다는 사실 ㅎㅎ. 이것은 피부로 직접 체험해 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특급 비결이다. 신학교 시절에 철없는 사랑하지 말고 기다려라. 성공을 원한다면 결혼도 전략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가능하다면 외국 유학한 번 다녀와라. 성경을 더 깊이 더 정확하게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 같은 이상적인 생각은 집어치워라. 일단은 자격조건을 잘 갖추어 놓아야 한다. 똑같은 설교를 하더라도 외국 학위를 가지고 선포하는 것과 쓸데없는 국내 신학교 나와서 전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다. 설교 내용의 격과 수준이 다르다는 말이 아니고 듣는 사람들이 선입견을 좋게 품어준다는 말이다. 솔직히, 요즘 유학 가는 놈들 성경에 대한 목마름 때문에 가는 놈이 어디 있냐? 형이 외국물을 한번 마시고 오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규모 있는 교회에 청빙 지원을 할 때에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국내 신학교 박사학위 가지고 있어봐야 그런 서류는 청빙 위원회에서 눈길도 안 준다. 그러니까 달러 빚을 내서라도 외국으로 나갔다 와라.
다섯째, 성경보다도 처세술과 인기 도서를 많이 읽어라. 나도 순진하게 신학교 시절에는 성경을 죽도록 읽었거든. 그거 다 소용없더라. 설교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야. 인마. 형님 말 들어라. 요즘 돈 주면 설교 원고 알아서 다 보내준다. 네가 그 사람들의 수준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으냐? 그 원고들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제법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 작성한 원고들이다. 그런 원고에다가 사람들의 심리에 만족을 줄 수 있을법한 세상이야기, 경험 등을 믹서 하면 설교는 홈런을 칠 수 있는 거야. 처세술과 관련된 책들과 인기 도서에 그런 내용이 많이 있다. 그래서 권하는 것이다. 너 생각에는 성도들이 성경이야기 풀어주는 것을 좋아할 것 같지? ㅎㅎ. 천만의 말씀 그것 착각이다. 일단은 울리든지 웃기든지 해야 된다. 너에게 웃기는 재주가 있다면 설교의 50%는 그냥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원어에 대한 감각이나 성경 주해 능력보다 개그감이 더 중요하다. 물론 웃기는 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울리는 거다. sentimentalism은 설교에 있어 핵무기라는 사실만은 꼭 기억해라. 눈물만 뺄 수 있다면 설교 준비가 필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여섯째, 교회에서 사역하다 보면 어른들과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된다. 피하고 싶어도 어쩔 수가 없다. 젊을 때 야당 아닌 놈이 어디 있냐? 그런데 설령 너의 정치적인 입장이 야당이라고 하더라도 여당을 지지한다고 말해야 한다. 공든 탑도 한방에 무너질 수 있다. 특히 교회 어르신들 이런 것에 굉장히 민감하거든. 교회 중직자들 앞에서는 철저하게 반공주의로 나가야 된다. 색깔이 좀 애매해 보이는 정치인이 보이거든 "장로님. 저 사람 종북 좌파 아니에요? 그래서 저는 저 사람 마음에 안 들어요" 이렇게 먼저 치고 나가라. 그러면 너는 사랑받는 사역자가 된다. 형이 임상실험 거쳐서 확인한 사항이다. ㅎ. 어른들 앞에서 아는 척한다고 경제민주화니, 보편 복지 확대니 하면서 떠들지 마라. 한방에 훅 간다. 담임 목사님이 아무리 너를 밀어 주려고 해도 중직자들이 브레이크 걸면 엄청 피곤해진다. 신앙적인 색깔이 너와 비슷해서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용인해줄 것 같으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다. 오히려 그 반대다. 신앙적인 색깔은 좀 못 마땅 해보였지만 정치적 입장이 같을 때 그 모든 것을 다 덮어준다. 사실이라니까. 못 믿겠냐?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정치는 허다한 허물을 덮어준다." ㅎ.
일곱째, 교단을 잘 선택해라. 너 성공하고 싶으면 이 교단 떠나는 것이 좋다. 진지한 마음으로 하는 충고다. 예를 들어 설명할게. 맥도널드와 롯데리아가 있다면 너는 어디로 가서 햄버거 사 먹겠느냐? 당연히 맥도널드로 가겠지? 그와 마찬가지 원리다.
여덟번째, 너 혼자 가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라. 너 혼자 가는 길이라면 순수, 정직, 소신 뭐 이런 단어들을 너의 가슴에 중요한 가치로 삼아야 하겠지. 그런데 너의 옆에 아이들과 사모가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라. 네가 초라한 목회를 계속하게 되면 너 때문에 그 사람들의 인생도 망치게 되는 거다. 형은 사모들의 얼굴만 봐도 그 교회의 성도 수를 대략 파악할 수 있다. 큰 교회 사모들은 거의 다 얼굴에 광선이 나온다. 개척교회 사모들은 얼굴에 그늘이 깔렸어. 너도 잘 관찰해봐라. 내 말이 틀린지. 너 솔직히 너 자신에게 물어봐라. 아이들과 사모를 죽을 때 까지 개고생 시키면서 그 길을 갈 수 있겠는지 말이다. 말같이 쉬운 것이 아니다. "너무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 법이다"는 말 알지? 뭐든 적당히 해야 되는 거다.
더 있는데 너무 적나라해서 여기까지 한다. 이 글이 수긍이 가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현실에 절망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영적 현실은 참담할 정도다. 영적인 능력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경영의 능력에 더 비중이 가 있다는 것을 오늘날 부인하지 못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재난이 일어나면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안전해서 감사하다며 마치 자신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었든 나는 지켜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하는 신앙인들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죽은 자는 저주받은 것이라고 하거나, 회개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신앙은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났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십자가는 교회에 없는가? 왜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우리의 구원에 집착하신 그 긍휼은 우리 안에 없는가?
이 글은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6가지 경고의 말씀을 담고 있다. 그 말씀의 기초는 예레미야서1:10이다.
예레미야1:10,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우리의 밭에 세워진 거짓 경건과 신앙, 거짓 말씀과 묵은 심령을 무너뜨리고, 그곳에 새로이 하나님의 공의와 그리스도의 삶을 심기워야 한다. 예레미야를 통해 우리는 이 말씀을 경고처럼 듣는다. 싸움터의 처절함이 있어야 승리가 있듯이, 밤을 지나야 새벽이 오듯이, 아픔이 있어야 성숙이 있듯이, 십자가가 있어야 부활이 있듯이, 우리 안에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새로운 것을 세울 수가 없다. 당신은 옛 것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이 되었는가? 옛날 믿던 미신을 벗어버리고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불교에서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고, 무교에서 마음을 다잡고 종교를 가지게 되었는가? 그것이 새사람이 된 것인가?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에베소서4:22~24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바울은 옛 사람의 정의를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한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 새로운 영을 품었다는 것은 개종改宗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종교를 바꾸거나 신념을 바꾸는 것이 새사람이 아니다. 새사람이란 ‘생활방식을 바꾼 사람’이다.
신앙은 믿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고서도 당신의 계획을 수행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한 분이시기에 말씀 하나로 모든 것을 바꾸실 수 있다. 그분의 생각만으로도 세계의 흐름은 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왜 인간으로 오셔야 했을까? 왜 친히 인간의 모습을 입고 인간의 나이를 살며 생애를 보내야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지만 어떤 이유이든 그 이유는 “인간의 삶”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다. 예수님은 우리의 메시야시고, 신앙의 대상이다. 그리고 또한 삶의 모델이자 표본이다. 예수님이 만약 신앙의 대상으로만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눈에 보여지신 분이라면 그 옛날 아론이 만들었던 금송아지와 다르지 않다. 금송아지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만든 것이었다. 더욱이 그렇다면 굳이 예수님은 그렇게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셔도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13:14,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신앙의 대상으로써의 주님이시고, 삶의 표본으로써의 선생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마땅히 이 땅에서 이웃들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삶을 사셨기 때문이고,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앙이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믿는 방식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래서 개종이 아니라 새사람인 것이다. 새로운 삶, 새로운 방향인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신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렘32:39,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한결같은 마음과 삶을 주어, 그들이 언제나 나를 경외하여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들까지도 길이 복을 받게 하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2가지가 있다. 그것은 “마음”과 “삶”이다. 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ble다. 더 정확히 번역하면 ‘속사람’이라는 뜻이다. 삶이라고 번역된 데렉%r,D,은 '바른 길', '정도'를 의미하는 단어다. 그러니까 마음은 중심이고, 삶은 행동, 곧 인생이 걸어가는 길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틀리지 않았다. 중심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날 교회가 마음을 잃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과 올바로 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 믿는다. 끊임없이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나무라셨다. 그들의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픈 마음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삶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에 가장 큰 문제는 예배가 없어서도 아니고, 기도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신앙에 가장 큰 문제는 교회도 아니고, 설교도 아니다. 바로 삶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 우리 안에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머리에만 있고 삶으로는 없기 때문이다. 말씀이 마음에만 머물고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죽은 믿음이다. 마음에만 머물면서 마치 행동으로도 하고 있다는 착각이 거짓신앙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지신 이유를 생각하라. 사람들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너무도 힘들어 한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찌 그 일이 쉽겠는가? 그럼에도 말씀은 말씀이어서 그 말을 입에 올리며 마음에 두지만 이미 행동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한다. 그런데 보라!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시는 것을 몸으로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외치신다.
"어렵다고? 아니다. 할 수 있다. 내가 선생되었으니 너희도 나와 같이 하라."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심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죽은 것이다. 세상과 똑같이 살면서 마음으로만 믿는 신앙은 죽은 것이다. 그것은 능력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음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 삶으로 말하는 것만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길임을 보여주셨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위인이 아니시다. 바울이나 베드로는 성자가 아니며, 슈퍼맨은 더더욱 아니다. 그분들은 나의 삶의 길을 보여주신 이정표시다. 나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분들이시다. 잘못된 신앙은 그분들이 그저 동경의 대상일 때 일어난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다. 진짜 신앙은 그분들의 마음을 품고 이 땅에서 그분들처럼 사는 것이다.
노예 해방하면 링컨을 떠올리지만 정작 노예제도폐지는 영국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그 놀라운 일에 등장하는 인물은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다. 그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의 작사가 존 뉴튼John Newton의 영향을 받았다. 한때 노예상이었던 존 뉴튼은 회심 후 목사가 되어 평생을 노예폐지운동에 헌신했다. 그의 영향을 받은 윌리엄 윌버포스는 24살에 하원의원이 된 후, 46년간 죽음을 무릅쓴 기득권과의 싸움을 통해 기어코 노예폐지 서명을 받아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의 땅에서 펼친 것이다.
나는 감리교인이다. 감리교Methodist Church라는 교단을 시작한 요한 웨슬리John Wesley는 단순한 목사가 아니었다. 그는 영국 내 자본주의의 부당성을 평생 역설한 인물이었다. 가난한 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위해 기득권과 싸웠다. 윌버포스와 함께 노예제도 폐지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부의 세습을 비판하며 상속반대와 이웃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이끌기 위해 사력을 다한 목사였다. 그는 그저 침묵하고 회개만 하는 목사가 아니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했고, 그들을 돕기 위해 기득권과 싸웠다. 목숨을 걸고 사회의 부조리와 싸워 나갔고, 약자들의 편에 섰다. 나는 그 웨슬리의 후예인 감리교인이다. 대천덕신부는 매일 기도모임에서 사람들에게 그날의 신문기사들을 복사해서 나눠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인들은내세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이 땅을 변화시키고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하고 기도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또 다른 영적인 멘토인 톰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개인의 영적 진보를 구하거나 우리의 깊은 감정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아픔 가운데 서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뭐라 할 말이 없을 만큼 마음이 어렵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마치 만천하에 까발려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내 현 주소가, 내 밑천이 다 드러난 듯한 안타까움이 들었다. 수많은 보도와 소식들을 일일이 챙겨보기 힘들만큼 마음이 어려웠다. 그 가운데 한 소식이 내 시선에 들어왔다. 세월호에서 자녀를 잃은 어느 어머니의 인터뷰 기사였다. 그녀는 성실히 교회를 다니던 기독교인이었다. 이해를 돕고자 기사를 그대로 적는다.
세월호 침몰 1주일, 지지부진한 정부의 수색작업은 "남부럽지 않게 키웠다"고 자부하던 한 엄마를 "내 새끼도 지키지 못하는 부모"라며 자책하게 바꿔놓았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모(50·여) 씨는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의사 공부를 하는 큰 딸, 판사가 꿈이라며 전교 1등을 놓친 적 없는 작은 딸을 위한 기도였다.
"1주일 전만 해도 내 자식들에게 유능한 부모라고 생각했어요. 발버둥 쳐서 이렇게 왔는데, 정말 남 부럽지 않게 내 딸 인재로 만들어놨는데…".
지금 김 씨는 진도항에 있다. 단원고 2학년인 작은 딸이 저 바다 깊이 가라앉은 세월호에 있기 때문이다. 세월호 침몰 후 사흘 동안 김 씨는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울부짖었다. 견디다 못한 남편이 쓰러졌다. 말을 더듬고 눈이 풀린 채 온몸이 경직된 남편 앞에서 김 씨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
"남편 때문에 눈물을 참다 더는 참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숨어서 수건으로 입을 막고 울어요. 화장실에서 울고 눈물을 닦는데 눈을 뜨자마자 '아직도 우리 딸이 저기 있네'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확 쏟아져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마음이 추슬러지지 않아요".
아무리 독한 마음을 먹어도 딸 얘기를 할 때마다 김 씨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했다. 옷 한 번 사달라고 한 적 없던 딸이다. 용돈을 달라 할 나이에 공부 열심히 해서 받아온 장학금을 엄마 보약 먹으라고 내밀던 딸이다.
"딸이 TV 틀어놓고 스마트폰 만지면 제가 '전기 먹는 하마'라고 놀렸거든요. 그때마다 '엄마 미안해'라고 말했는데… 내가 이제 집에 돌아가면, 며칠 전에 봤던 그 모습을 이제 볼 수 없잖아요".
"내 친척이든 친구든 주변에 멀쩡하게 자식 살아있는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것 같아요. 솔직한 심정으로 누구라도 날 건드리는 사람 있으면 칼 가지고 찔러 죽이고 싶어요".
그렇게 진도항과 체육관을 오가며 보낸 1주일. 김 씨의 결론은 "나는 내 새끼도 지키지 못하는 못난 부모"였다.
"내가 참 못난 부모구나, 자식을 죽인 부모구나. 이 나라에서는 나 정도 부모여서는 안 돼요. 대한민국에서 내 자식 지키려면 최소한 해양수산부 장관이나 국회의원 정도는 돼야 해요. 이 사회는 나 같은 사람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사회에요".
"저 동정받을 사람 아니에요. 나 60평짜리 아파트 살아요. 대학교에서 영문학 전공했고, 입시학원 원장이고 시의원 친구도 있어요. 이 사회에서 어디 내놔도 창피할 사람 아니라고요. 그런데 이제는 내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저주스러워요. 우리 딸 나오길 기다리는 한 시간 한 시간이 피를 말려요".
김 씨는 이제 더는 정부도 믿을 수 없었다.
"능력이 없어서 못 하면, 한 명이라도 구하겠다고 애쓰면 저 사람들도 귀한 목숨인데 감사하죠. 그런데 구조 매뉴얼도, 장비도, 전문가도 없다면서 아무것도 안 했어요. '헬리콥터 10대를 띄웠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어서 가족 대표가 가보면 1대도 없었어요".
"박근혜 대통령이 와서 잠수부 500명을 투입했네 해도 거짓말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내 자식을 놓을 수가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다리면 또 거짓말이에요. 그렇게 날이 지나서 애들 다 죽었어요".
꼼짝도 않는 정부에 던진 달걀이 바위를 더럽히지도 못하는 심정. 김 씨는 대한민국을 버리겠다고 말했다.
"다 정리하고 떠날 거에요. 나 대한민국 국민 아닙니다. 이 나라가 내 자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내 나라를 버립니다".
못 믿기는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남들 눈에는 뻔한 거짓말이라도, 확인받고 싶은 부모 마음을 미개하다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답답했다.
"부모들이 오보에 놀아난다는 식으로 보도해요. 정부는 정말 잘하는데 부모들이 조바심이 난다고요. 290명 넘게 갇혀있었는데 한 명도 못 구하면 이상하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구조하겠다는 의지도 없이 구조한다고 발표한 걸 그대로 받아서 방송에서는 열심히 구조하고 있다고 거짓보도 했어요".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탓하던 김 씨는 '이 나라에서는 언제든지 당신도 나처럼 자식을 잃을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가 30대 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어요. 사연 들으면서 많이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뒤로 제가 한 일이 없는 거에요. 10년마다 사고가 나는 나라에서 제도를 바꾸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서 제가 똑같은 일을 겪었어요. 지금 SNS하면서 울고만 있는 젊은 사람들, 10년 뒤에 부모 되면 저처럼 돼요. 봉사하든 데모하든 뭐든 해야 돼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가 예수처럼 살지 못해서, 내가 비굴하고 비겁하게 사회의 정의와 문제에 눈감고 있어서 그래서 나의 자녀들이 죽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의 자녀답게 살았더라면 이 땅은 이렇게 황망치 않았을 것이다. 80년대, 하나님께서 이 나라에 기회를 주셨을 때 정의롭고 정직하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서 이 땅에 공의를 심었더라면 이런 황당한 나라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해서, 내가 그렇게 예수를 보여주지 못해서 이런 모순과 문제들이 우리의 생떼같은 아이들을 사지로 몬 것이다. 울고불고, 이 소리 저 소리 하고는 몇 개월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듯 잊어버리는 삶은 살지 말라. 나에게 지금 주어진 곳에서 예수님처럼 살라. 이웃의 발을 닦아주고,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라. 오래지 않은 인생, 원수들을 만들지 말고, 지금 손 내밀어 사랑하라. 틈 날 때마다 말씀을 전하고, 고아와 과부를 도우라. 언제 죽을지 모르는 이들이기에 지금 기회 있을 때 복음을 전하라. 우리의 영이 운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슴 졸인다고 다 된 것이 아니다. 미루지 말라. 나에게 마음 주신 것은 지금 행동하라. 나에게 주어진 눈물을 삶으로 만들라. 그것이 신앙이다.
태초에 동물들은 아담을 보면 하나님이 생각났다. 그래서 동물들은 아담에게 복종했다. 아담이 능력이 있어 복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에 복종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나를 보면 예수가 생각나야 하지 않겠는가? 세상이 나를 보면 예수를 보는 것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의 능력이 아니라 내 안에 보이지는, 내 삶에 보여지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나의 말과 행동에 권세가 주어지지 않겠는가? 설교하지 말고, 폼내지 말고, 예수님의 삶을 살아라. 예수님을 당신의 삶으로 보여드려라. 그것이 우리가 부름받은 목적이다. 그것이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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