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라

2016. 6. 8. 09:35묵상하는말씀/예레미야묵상

반응형

예레미야9:23~24,

“나 주가 말한다.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영국의 시인 T.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그의 작품 황무지에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문학적 소양이 별로 없는 나는 그가 왜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 사람에게는 4월이 잔인한 달이라는 이야기가 경험적으로 동의되지 않을까 싶다. 1919년 4월 15일에는 3.1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화성시 제암리의 마을사람들 모두를 교회에 모여놓고 불을 지른 제암리학살사건이 있었다.  1948년 4월3일에는 제주4.3사건이 있었다. 그 일은 14,000여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나았다. 1960년 4월에는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시위를 하던 김주열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일이 일어났고, 이는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1975년 4월에는 인혁당사건으로 구속된 8명이 사형선고를 받은지 20시간만에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건이 있었다. 2007년 4월에는 재미교포 학생 조승희에 의한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사건이 일어나 32명이 숨지고, 29명이 부상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2014년 4월에는 진도 앞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하여 295명이 사망하고 9명이 실종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세월호의 참사는 한국 사회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우리나라에서 대형참사는 잊혀질만 하면 일어난다. 세월호가 있기 꼭 20년전, 전남 부안 앞바다에서 침몰한 서해 페리호 사건이 있었다. 292명이 목숨을 잃은 이 사건으로 해양사고에 대비한 법령들이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6년 후, 경기도 화성시 씨랜드청소년수련원에서 불이나 어린 유치원생들 23명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그 때에도 안전수칙이니 법령이니 수선을 피웠었다. 그 후, 십 수 년이 지난 2014년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때와 똑같이 안전수칙 위반이 문제의 원인으로 대두되었고, 그 때와 똑같이 정부는 우왕좌왕 강 건너 불구경하는 듯한 사태가 벌어졌다. 씨랜드화재로 6살 아들을 잃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순덕씨는 나라에서 받은 훈장과 메달을 모두 반납하고 “한국에서는 더 살고 싶지 않다”며 뉴질랜드로 이민길에 올랐다. 세월호 사태를 수습하는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그러고 싶은 심정이니 당사자들은 오죽하랴.


잊으면 역사는 반복된다. 영적 세계에도 잊으면 같은 죄에 두 번 세 번 유린당하는 것이 영적 현실이다. 그것을 성경은 이스라엘을 통해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그분을 잊으면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이 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잊으면 우리가 얼마나 비굴한 인간이 되는지, 또한 하나님의 마음을 잊으면 우리가 얼마나 잔혹한 인간이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나는 아니라고 할지 모르나 중심을 잃은 자는 똑바로 걷지 못한다. 미국에서는 음주운전이 의심되면 바닥에 줄을 긋고 걷게 한다. 취한 운전자는 줄을 따라 걷게 되는데 대부분 휘청거리며 걷는다. 그럼에도 자신들은 똑바로 걸었다고 우기는 것이 현실이다. 첫사랑을 기억하지 못하면 우리의 길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마음이 굳어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을 잊으면 종교적 형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굳은 마음을 어떻게 녹일 것인가? 나의 빗나간 예배를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렘9:23, 지혜 있는 사람은 자기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라. 용사는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 말아라. 부자는 자기의 재산을 자랑하지 말아라.


신앙의 회복은 나의 지혜나 힘, 혹은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서로 모여 의논하고 옳고 그름을 따진다. 교회의 문제가 생겨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누가 더 큰 소리를 내는지로 결판을 내려고 애를 쓴다. 어떤 이들은 교회가 작아서 성령이 안 계시는 줄 알고 교회를 짓는다. 성전이 크면 클수록 성령의 역사도 큰 줄 아는 사람들이 즐비하다. 어찌 이것이 지도자들만의 문제이겠는가? 당신의 자녀들이 좋은 대학가고, 좋은 결혼하면 신앙생활 잘 한 줄 안다. 임신과 출산을 자연스럽게 하는 자신은 신앙이 괜찮은 줄 안다. 하는 일마다 잘 되고 돈 잘 벌면 그것이 하나님 축복인 줄 안다. 그러나 잘 들어보라!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실 때 사탄이 가진 유혹의 도구가 무엇이었는가? 떡(경제력)이고, 천하만국과 영광(명예와 권력) 아니었는가? 그것은 사탄도 줄 수 있는 것들이다. 내가 잘 나가고, 잘 벌고, 잘 되는 것을 자랑하지 말라. 그것이 당신의 신앙을 보증해 주는 것이 아니다. 이어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한다.


렘9:24,    오직 자랑하고 싶은 사람은, 이것을 자랑하여라. 나를 아는 것과, 나 주가 긍휼과 공평과 공의를 세상에 실현하는 하나님인 것과, 내가 이런 일 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 만한 지혜를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하여라. 나 주의 말이다."


나의 신앙이 회복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방법이 여기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어떤 하나님이냐? 긍휼과 공평과 공의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미가는 이렇게 말했다.


미3:1,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이어지는 말은 아모스기자의 말이다.


암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울지어다.
암5:24,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오늘 본문의 긍휼과 공평과 공의는 히브리어로 헤세드ds,x,, 미쉬파트jP'v.mi, 체다카hq'd'c.다. 긍휼, 혹은 인애, 사랑과 은혜로 알려진 헤세드는 이미 잘 아는 단어다. 우리 안에 굳어지는 마음의 1차적인 반응은 바로 사랑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 안에 은혜를 알지 못하게 되는데서 우리는 빗나가기 시작한다. 이미 앞에서, 만달란트 비유를 통해 은혜를 잊은 자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았다. 마음이 굳어지면 사랑을 잃는다. 마음이 굳어지면 은혜도 소용없다. 한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97]에서 인상적인 에피소드 한 장면을 보았다. 성동일에게는 고집스런 작은 아버지가 계시다. 성동일의 아버지 제삿날을 빠지지 않고 챙기는 작은 아버지는 그날도 성동일네를 찾아왔다. 아들도 곧잘 일어버리는 제사를 꼬박꼬박 챙길 정도로 우애가 좋았던 형제였다. 제사를 마치고 터미널에서 작은 아버지를 배웅하던 성동일은 그리도 형님이 좋았냐며 작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그런데 뜻밖의 소리를 듣는다.


"내가 느그 아버지 무지하게 미워했다."


일찍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형제가 컸다. 어머니는 똑똑한 형님만 좋아하셨단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카스테라를 하나를 얻어오셨는데 그것을 형님에게만 줬단다. 동생인 작은 아버지는 그것을 먹고싶어 형님에게 갖은 아양을 떨었는데 형님은 안 주더란다. 그날로 작은 아버지는 결심을 했단다. 남부럽지 않는 부자가 되겠다고. 그리곤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일해 자신이 일하던 타이어공장을 몇 년만에 사버렸다. 사장이 되던 날, 좋은 차 몰고 집으로 금의환향했단다. 공부한 형님은 공무원 되어 면사무소에서 등기나 밀고 있는데 나는 좋은 차, 좋은 옷 입고, 매일 카스테라 먹는다고 어머니와 형님에게 큰소리를 쳤단다. 그렇게 득의양양해서 사업을 하는데 경험이 없던터라 몇 개월 만에 사기를 당하고 쫄딱 망해버렸단다. 이 때문에 빚더미에 앉아 갚지도 못하고 감옥에 가야할 형편이 되어 구치소에 있을 때 형님이 찾아왔단다. 형님은 집 팔고, 있는 논 다 팔고, 이 친구, 저 친구에게 빌릴 수 있는 돈이란 돈은 다 빌려 빚을 갚아 주었단다. 그런데도 동생인 작은 아버지는 그런 형님이 알미웠단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형님에게 무시당하며 살았는지, 얼마나 설움이 많았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단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다 듣고는 형님이 딱 한 마디 하더란다.


"내가 미안하다..."


매우 단촐한 에피소드였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기에 충분했다. 은혜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다. 내 마음이 굳어서 그렇다. 굳은 마음에는 사랑이 귀찮다. 굳은 마음에는 은혜가 오히려 얄밉니다. 매일매일 내 마음을 개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은 굳어 버린다. 매일매일 내 영혼을 갈아엎지 않으면 우리의 심령은 매말라 버린다. 우리가 매일 찬양하고, 기도하며, 주님 앞에 예배하는 것은 내 영혼을 갈아 엎는 것이다. 그 말씀에 내 생각과 기준을 갈아엎어야 한다. 그 사명에 나의 뜻과 계획을 갈아 엎어야 한다.


헤세드에 비해 미쉬파트와 체다카는 낯선 단어들이다. 낯선만큼 그 개념을 설명하기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말 성경에서 번역된 단어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미쉬파트라는 단어는 성경에 421회 쓰였는데 우리말 번역을 보면, '공평'(31회), '공의'(42회), '심판'(26회), '재판'(22회), '규례'(76회)로 각각 번역되어 있다. 반면 체다카는 157회로 각각 '의'(약100회) '공의'(10회) '공평'(8회) '정의'(7회) 등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미쉬파트와 체다카가 거의 동일한 개념 처럼 보인다. 굳이 구별이 없을 것 같은 이 단어를 히브리어는 나눠놓았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가 그만큼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듯 다른 이 단어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미쉬파트가 법률적, 사회적 정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체다카는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의미의 정의를 말한다. 미가서의 그 유명한 구절을 읽어보라.


미6:8,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의 공의가 바로 미쉬파트다. 착한 일이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란다. 바로 사회적 정의와 사회적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적 정의에 눈을 감으면 안 된다. 지역적 차별과 구조적인 모순과 약자의 문제에 침묵하면 안 된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쉬파트를 실천하라 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사업가가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어려움이나 이 지역의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나는 그리 착한 사람도 아니고, 돈도 없으며, 그리 열정도 많지 않다. 그러나 내가 교회와 함께 다림사역을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미쉬파트를 실천하라고 하신 말씀 때문이다. 세상의 법과 정의가 힘 있는 자에게 기울 때 교회는 약자 편에 서야 한다.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도록 기도해야 하고, 소외되고, 아무에게도 호소할 곳 없는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 당시 위정자들이 그들만의 모임을 가지고 있을 때 예수님은 거지와 창녀의 친구가 되어 주셨다. 권력이 가진 자들 위주로 돌아갈 때 예수님은 낮은 자리에 계셨다.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는 사회적 모순을 뒤집는 것이었다. 종servant이 해야 했던 세족洗足도 선생이고 스승이었던 예수님께서 하셨다. 그것은 사회적 편견에 대한 도전이셨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유대인 앞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추수를 하여 곡식도 먹었다.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강하게 맞서셨다. 그리고 그 단단하게 굳은 전통과 아집의 종교적 신앙을 깨뜨리기 위해서 죽으심으로 항거하시고 싸우셨다. 하나님의 미쉬파트를 실천하라는 말씀에 힘입어서 말이다. 그것의 결과가 바로 십자가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의 모순과 정의에 눈 감아서는 안 된다. 나만 잘되면 된다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의 신앙은 나를 위한 신앙으로 굳어져 버린다. 하나님의 미쉬파트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눈을 뜨고, 정의에 깨어있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이 땅의 권력자들이 두려워 떨게 해야 한다. 살아 숨쉬는 신앙인들로 인해 범죄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사랑을 실천하고 꿈을 나누는 교회를 통해 지역의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 미쉬파트를 잃고 교회의 십자가만 세우면 무엇하는가? 교인만 많으면 무엇하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미쉬파트가 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그로 인해 역사적 대변혁을 이루셨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곳곳에서 사회적 정의의 문제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돈보다 생명이 더 중요하다는 사회적 정의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유대가정에는 어린아이들에게 저금통 하나를 준비해 준다고 한다. 소위 돼지저금통 같은 것이다. 보통 저금통은 자녀에게 경제관념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좋은 교육교재다. 그러나 유대가정의 자녀들이 갖는 저금통은 저축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 저금통이 다 차면 모아서 가난한 이웃을 돕는 기부금으로 사용한다. 어려서부터 나누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 저금통의 이름이 체다카다. 유대 시장에서도 이같은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오후 장사가 끝날 쯤 되면 팔던 물건의 일부를 포장해서 떼어 놓는다. 보통 마지막 떨이를 할 때 주로 사용되는 물건처럼 보이지만 유대인들은 필요한 사람들이 자유로이 가져가도록 하기 위해 마련하는 것이다. 기부와 자선은 유대인들에게 뿌리 깊게 자리잡혀 있다. 소득의 1/10을 기부하는 것에서부터, 축적된 부는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히브리어에는 자선慈善이라는 의미의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비슷한 말이 바로 체다카인데, 그 이유는 유대인에게 자선이란 그저 당연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쉬파트가 사회적 변혁운동이라면 체다카는 개인적 변혁운동이다. 미쉬파트가 법률적 개혁운동이라면 체다카는 긍휼적 개혁운동이다.  정의의 문제에 꼭 따라다니는 것은 법이다. 정의로 인해 법의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의 법에는 자비가 없다. 오직 심판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세상의 정의는 오직 심판을 위한 정의다. 하나님도 규율과 법, 그리고 심판을 말씀하신다. 분명히 심판은 있으며, 분명히 하나님의 법도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가 미쉬파트이며, 또한 체다카이듯이 하나님의 심판 또한 긍휼을 통한 심판이시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다. 하나님의 법 밖에 놓인 사람들이고, 구제 불가능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체다카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다. 자신의 것을 주셨고, 자신의 아들을 주신 체다카를 실현하셨다. 그것이 우리의 구원을 불렀다. 당신은 이미 이 하나님의 공의를 경험했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잊어버려서도 안 되고, 가만히 손을 놓거나 무관심해서도 안 된다. 사회를 직시하는 눈과, 이웃을 돌보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올바르게 가지 못하는 사회를 향해 광야의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하고, 올바른 길로 가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눈물로 호소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끝까지 긍휼로 그들을 돌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시다. 우리의 목표도 미움이 아니라 사랑이고, 갈라섬이 아니라 함께함이다. 미쉬파트와 체다카를 품으라.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일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