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7:21~26,
“나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받고 싶은 것은 제사가 아니다. 너희가 번제는 다 태워 내게 바치고 다른 제물은 너희가 먹는다고 하지만, 내가 허락할 터이니, 번제든 무슨 제사든 고기는 다 너희들이나 먹어라. 내가 너희 조상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번제물이나 다른 어떤 희생제물을 바치라고 했더냐? 바치라고 명령이라도 했더냐?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나에게 순종하라는 것, 그러면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 내가 그들에게 명하는 그 길로만 걸어가면, 그들이 잘 될 것이라고 한 것뿐이지 않았더냐? 그러나 그들은 내게 순종하지도 않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계획과 어리석은 고집대로 살고, 얼굴을 나에게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등을 나에게서 돌렸다. 너희 조상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로부터 오늘까지, 내가 나의 종 예언자들을 너희에게 보내고 또 보냈지만, 나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희는 조상보다도 더 고집이 세고 악하였다.”
지난달, 한국 사회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공개되면서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서울 송파구의 한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두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된 것이다. 그 가슴아픈 현장에는 그들이 마지막으로 남겨놓은 흰 봉투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봉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께, 죄송합니다. 마지막 집세와 공과금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 봉투에는 70만원이 들어 있었다. 32세, 35세인 두 딸을 둔 60세 어머니는 12년전 암으로 남편을 잃었다. 그나마 남편은 사업실패로 인한 상당액의 빚을 자신에게 유산으로 물려주고 갔다. 게다가 딸들은 고혈압과 당뇨로 병원 신세를 져야할 형편이어서 생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어머니가 벌어 먹여야 했다. 설상가상 식당일로 생활을 이어가던 어머니가 빙판길에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그마저도 그만 두어야 했다. 60만원의 생활비로 한번도 공과금과 집세를 거르지 않았던 세 모녀는 마지막 공과금을 끝으로 스스로 세상과 이별하는 선택을 하고야 말았다.
이 사건은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렇게 어렵고 고단한 삶을 사는데 이들을 도와주기는커녕 상황을 제대로 아는 이 조차 없었다. 사회 안전망이 허술하다는 비판과 자괴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왔다. 현재 우리나라 복지체계로는 이 세 모녀가 해택을 받을 수 있는 돈은 0원이다. 그나마 기초생활수급자가 되지도 못한다. 나는 이 사건을 접하고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사건의 내용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국사회복지정책을 욕하기도 했다. 그리고는 그냥 지나쳐갔다. 내심 깊은 마음에는 '제아무리 정부라도 어찌 사람들의 사정을 다 알 수 있겠는가?'라는 이해아닌 이해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말씀묵상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사실 이 사건의 파장이 사회에 마친 영향에 비해 교회는 조용했다. 자살에 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기에 오히려 비난이 더러 나타나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 이 사건은 어쩌면 자살문제라는 교리적 측면보다 생명을 돌보는 사역적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 일이다. 사회복지는 정부만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은 NGO만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교회는 이웃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아야 하는 지역기관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 모녀가 교회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는 지역에 교회가 분명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아마도 한 두 곳이 아니었으리라. 만약 그들이 교회 교인이었는데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면 그 교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만약 그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 교회가 있었다면 그 교회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잘 몰랐어요?” “우리 교인이 아닌 걸요?”
이런 말로 변명이 가능하지는 않으리라. 그들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은 남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일로 내 안에 깊은 근심이 쌓이기 시작했다. 마치 하나님의 음성처럼 내 안에 울려퍼지는 질문들이 생겼다.
“네 주위에 이렇게 절망하며 삶을 등지는 어린이가 있다면 어떻게 할래?”
다들 잘 알다시피 우리교회는 이 지역의 어린이들을 섬기는 다림사역을 한다. 좋은 취지, 좋은 내용,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지역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물론 나도 다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수고하는 선생님과 함께 운영하는 우리교회 교인들을 자랑스러워한다. 다림사역을 하는 교회가 감사하고 뿌듯하다. 그러나 상대적박탈감과 삶의 절망에서 낙심한 이들을 돕자고 세워진 다림교육이 있는 이 지역에서 만약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삶을 등지는 이가 나타난다면 나는 뭐라고 말할까?
“잘 몰라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숨어 있어서.....”
이런 것들이 과연 변명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슴 저미는 회개를 해야만 했다. 다림교육의 재정을 걱정하고, 내부의 문제들을 위해 수없이 기도했지만, 이 사역을 잘 감당키 위해 많은 교육과 모임, 생각을 모았었지만, 정작 지금도 어디에선가 숨죽이며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찾아 나서고 있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다림선생님이 아파서 사역을 못하면 눈물이 나고, 누군가 헌신해 주면 감사하고, 누군가의 감격를 받으면 힘이 났지만, 그러나 하루하루가 힘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웃들이 나에겐 급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경건의 내용이 없는 겉모양의 삯꾼 목자 같은 생각이 들었다. 다림이 좋은 일을 하는 뿌듯함만 만끽할 뿐, 다림사역으로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즐길 뿐, 그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움에 빠져 있는 보이지 않는 이웃들에 대한 관심이 없었음을 하나님께 회개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교육이라는 큰 매개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예레미야서 7장은 성전설교라는 제목이 붙은 장이다. 여기에서 예레미야는 계속적으로 “다른 신을 따르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십계명 이후로 선지자들이 줄기차게 해온 말이다. 한마디로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우상숭배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리고 있다.
렘1:4, '이것이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주님의 성전이다' 하고 속이는 말을, 너희는 의지하지 말아라.
렘1:9~10, 너희는 모두 도둑질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음행을 하고, 거짓으로 맹세를 하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섬긴다. 너희는 이처럼 내가 미워하는 일만 저지르고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성전으로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우리는 안전하다' 하고 말한다. 너희는 그런 역겨운 모든 일들을 또 되풀이하고 싶어서 그렇게 말한다.
예레미야는 예언자와 제사장들이 백성들을 속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상처입고 앓고있는 백성들에게 한결같이 '괜찮다, 괜찮다'라는 말로 안심을 시켰다. 그러니까 심령은 어찌 되었든 주님의 성전에만 거하면 '괜찮다', '안전하다'고 말해왔던 것이다. 마치 중심에는 다른 마음을 품으면서 몸은 성전에 와 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다. 이것이 거짓이라고 예레미야는 말한다. 이것이 우상숭배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마음은 어떤 것인가? 그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예레미야가 말하는 우상숭배의 정의가 나온다.
렘7:5~6, 너희가, 모든 생활과 행실을 참으로 바르게 고치고, 참으로 이웃끼리 서로 정직하게 살면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고, 이곳에서 죄 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겨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예레미야는 오늘 우리에게 우상숭배를 이렇게 정의한다.
“이방인과 고아, 과부를 돌아보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지극히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행위에만 치중하는 신앙이 우상숭배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예레미야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 선포했다.
렘4:1~2, "이스라엘아, 정말로 네가 돌아오려거든, 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나 주의 말이다. 내가 싫어하는 그 역겨운 우상들을 내가 보는 앞에서 버려라. 네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여라. 네가 '주님의 살아 계심을 두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면, 세계 만민이 나 주를 찬양할 것이고, 나도 그들에게 복을 베풀 것이다."
그리고 진리와 공평과 정의로 서약하기를 바라신다. 개역성경에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번역된 이 말은 [미슈파트]와 [쩨다카]다. 이 말의 뜻은, 이웃과 마음을 같이하며 자신에게 대하듯 이웃을 대하는 올바른 관계다. 그리고 외모나 뇌물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르게 내린 판결과 연관된 개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레19:18,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이웃을 돌보지 않는 신앙은 우상이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신앙은 우상이다. 내가 감당해야할 이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룩한 척 성전에 모여 울부짖고 매달리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예레미야는 말한다.
율법학자가 예수께 물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고, 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네 대답이 옳다. 그대로 행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서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여라.”
영생을 얻는 길,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렸다. 왜? 거짓 경건에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상숭배는 본질적으로 종교적 제의에만 충실하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종교행위다.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려는 사람은 결코 가난한 이웃을 무시하며 살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분리되어 있다면 그는, 신앙은 좋되 이웃을 섬기는 삶이 약한 것이 아니라 신앙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입술로 무엇이라 고백하든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이다.
시68:5, 그 거룩한 곳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 과부들을 돕는 재판관이시다.
나는 가끔 이런 유혹에 빠진다.
"조금 좋은 성전에서, 조금 좋은 시스템을 가졌으면 설교효과도 있을거야."
"좀 더 엄숙한 예식과 경건한 분위기라면 좋을텐데..."
"기도가 끝나면 웅장한 후주가 나온다면 기도의 의미가 더 살고, 축도가 끝난 이후에는 경쾌한 음악이 있다면 우리의 마음도 편할텐데..."
지난 주, 장모님 댁을 방문했다. 가끔 가는 어머니 댁,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라고는 한 달의 한번 대접하는 식사정도다. 그런데 지난 주엔 사실 겸사겸사 갔다. 우리교회 예배실 앞이 너무 휑해서 화분을 몇 개 사려고 갔다. 장모님 댁 근처는 유독 화원들이 많았다. 화분을 좀 놓으면 화사하고 예배 분위기도 날 듯해서 화분을 좀 사려고 한다고 했더니 장모님이 일침을 놓는다.
“화분은 무슨...”
어머니는 그냥 하신 말씀일텐데 나는 그 소리가 갑자가 하늘의 음성처럼 들렸다.
“화분 놓는다고 예배가 되냐?”
“경건하고 엄숙한 예식을 빙자하여 네 설교나 빛내자고 예배하냐?”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만족하면 다냐?”
“그것이 네 주위의 고아나 과부를 돌보는 삶과 무슨 관계가 있냐?”
음악이라는 것은 예배에 정말 중요한 요소다.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열고 닫는 일이 가능할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그러나 그렇게 음악이 웅장하고 화려하게 드려진 예배에 우리가 돌봐야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 없다면 그것은 치장에 불과하다. 거기서 경건이 나오지 않는다. 분위기에서 경건이 나오지 않는다. 경건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데에서 나온다. 나의 욕심, 나의 욕망,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예배 드리지 말라. 예배로 말미암아 내 이웃, 내 할 일, 내게 주신 사명이 세워지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거짓 경건의 뿌리가 될지도 모른다. 오늘본문처럼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없고 그저 제사만 있는 꼴이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은 없고 그저 의식만 있는 꼴이다. 이것이 거짓 경건이고 우상숭배다. 오늘 본문 23~24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라.
렘7:23~24, 오직 내가 명한 것은 나에게 순종하라는 것, 그러면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 내가 그들에게 명하는 그 길로만 걸어가면, 그들이 잘 될 것이라고 한 것뿐이지 않았더냐? 그러나 그들은 내게 순종하지도 않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기들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온갖 계획과 어리석은 고집대로 살고, 얼굴을 나에게로 돌리지 않고, 오히려 등을 나에게서 돌렸다.
다 없어도 좋다. 건물이 없어도 좋다. 당신의 예배가 이웃을 향한 마음, 복음 전파의 씨앗이 되게 하라.
마10:42,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에게, 내 제자라고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가 받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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