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보다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잘하는 경향이 있어요.
매일 만나는 가족보다는 가끔 만나는 친구에게 더 잘하죠.
늘 보는 가족에 대한 약속보다
가끔 보는 친구에 대한 약속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이 이유에는 이런 마음이 존재하죠.
가까운 사람이니까 나를 봐줄 것이라는 생각 말이죠.
사랑하니까 봐주겠지, 가족이니까 용서해주겠지…
이말은 사실 틀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니까 봐주고, 가족이니까 용서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마음이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니죠.
봐주니까 마음에 담지 않아도 되고,
용서해 주니까 나쁘게 굴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이런 워딩을 전해드린 적이 있죠.
[내가 예배한다고 하나님께서 당연히 받으실 것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가인을 잘 알고 계시죠?
인류 최초 살인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물론 그보다 더 무서운 사실은 그가 바로 우리의 조상이라는 사실이죠.
그가 시기와 질투, 그리고 살인에까지 이르는 계기는 예배였습니다.
자신의 예배는 안 받으신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예배는 받으신 겁니다.
예배에 관한 한 장자의 권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전통을 가진 유대에서는 충격이죠.
이미 이 사건에 대해 신명기를 통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아벨의 제사에 ’맏배의 기름기’라고 덧붙이고 있다고 말이죠.
그러니까 가인은 ‘그냥’ 예배를 드린 것이고요.
아벨은 ‘정성’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아마도 가인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예배하는데 하나님은 당연히 받으셔야지… 내가 예배하잖아..”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내가 교회 나오잖아요? 기도하잖아요? 제물 드리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은 받으셔야 하는 것 아냐?”
이것이 착각인지도 모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죠.
나에게 상속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대기업의 창업주이고 아들이라고는 나밖에 없습니다.
당연히 상속은 나에게 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준비하지 않아도 될까요?
아무런 공부도, 아무런 준비도, 마음도 없이 상속이 당연할까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어주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은혜를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중심되는 사고에서나 가능하죠.
내가 중심이 되면 예배하는 ‘형식’이 중요합니다.
예배한 시간, 장소, 그리고 무엇을 드렸냐가 중요하죠.
그러나 하나님이 중심이 되면, 예배의 ‘진정성’이 중요해집니다.
어떤 형식보다 나의 마음의 중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강한 선민사상이 있습니다.
선민사상이란,
자신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며,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신다는 자부심이죠.
그들이 붙잡고 사는 것은 ‘언약(약속)’과 ‘성전(예배)’입니다.
참 인간이 간사하죠?
약속의 의미를 잃으면 약속의 겉껍데기만 남습니다.
가령, 결혼은 약속이죠.
이 약속은 서로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유일한 동역자가 되겠다는 증표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시간을 함께하겠다는 다짐이죠.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면, 시간만 남고, 마음은 사라집니다.
함께하는 시간만 있으면 그 의미의 유무는 중요하지 않게 되죠.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나의 마음을 드리고, 나의 잘못을 불 태우며, 주님의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죠.
무속신앙, 즉 샤머니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는 것이 무속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사라진 거대한 성전은,
오색천이 나부끼고 돌무더기가 쌓인 서낭당과 진배없죠.
이뿐만이 아닙니다.
무속신앙화된 종교 생활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말씀보다 우선시 되기 때문입니다.
가짜는 단순히 가짜가 아닙니다.
가짜의 무서움은 진짜를 갖지 못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전통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그 전통 유대인들이 부여잡은 것이 가짜이기에
진짜 메시야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합니다.
가짜 신앙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개혁적인 설교가입니다.
그는 40년 동안 사역을 했는데, 사역기간 내내 인기 없는 설교자였습니다.
본래 개혁과 혁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인기와는 인연이 없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개혁이라는 것이 본래 아픈 것이기 때문이죠.
요즘은 개혁, 혁신이라는 말을 마치 무슨 성공하는 사람들의 화두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뜻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개혁은 마치 개간을 위해 땅을 뒤집듯,
내 익숙했던 삶의 패턴을 갈아엎는 것을 의미하고요.
혁신은, 자신의 뼈를 깎는 아픔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 개혁과 혁신을 두 어깨에 짊어진 설교자였어요.
예레미야가 사역했던 시대의 남유다는
그야말로 격변기였습니다.
앗시리아가 몰락하고 바벨론이 발흥하던 시기였죠.
그 틈바구니에서 이스라엘은 처절한 몸부림을 쳤습니다.
이집트와 바벨론 사이를 오가며 추종과 굴종의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시기 예레미야의 메시지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래 생활이 어려울 때는 다 귀찮죠.
특별히 뼈 때리는 팩트 폭행은 더 싫습니다.
오히려 위로와 격려, 그냥 모르는 체 해 주기를 바라죠.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와중에 개혁을 외칩니다.
오늘 본문 10절에는 6가지 단어가 등장하죠.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며,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
이것이 예레미야에게 주신 사역에 대한 소명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부수고 다시 세우라는 뜻이죠.
어쩌면 이것이 예레미야서의 주제일지도 모릅니다.
후안 카를로스 오르티즈의 [제자입니까]라는 책에 보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마치 집 인테리어 공사하는 것으로 표현하죠.
더러워진 벽지를 뜯고 새로운 벽지를 붙이는 것처럼,
담배도 끊고, 술도 끊는 생활을 하고,
낡고 헤진 바닥을, 강화된 마루로 까는 것처럼,
교회도 정하고, 꼬박꼬박 출석을 하며,
어두침침한 조명을 화려한 상드리에로 바꾸는 것처럼,
세상 음악과 문화를 즐기던 패턴을 찬송과 말씀으로 바꾼다고요.
그러나 책은 이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는 단순한 리모델링 공사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그러니까 부수고 다시 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잡초는 쉴새없이 뽑아주어야 합니다.
매일 쌓이는 감정은 허물어야 하고,
떨어지지 않는 거짓과 속임의 악한 영들을 멸망시켜야 하죠.
상처와 아픔으로 나를 내모는 과거의 발목은 깨부숴야
우리는 새로운 시간과 미래를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잡초와 상관없이, 수많은 공격 속에서도,
끊임없이 말씀의 씨앗을 심고 뿌려야 하죠.
이것이 개혁입니다.
개혁은 가만히 있는다고 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혁신이죠.
혁신은 끝까지 붙들어야 합니다.
한 가지만 추가하죠.
나를 힘들게 하는 감정, 악한 영, 과거의 상처, 잡초들,
이것들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입니다.
진짜 싸우고 바꿔야 할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개혁의 대상은 ‘나’입니다.
혁신의 대상도 역시 ‘나’임을 기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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