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묵상일기 66 - 끝까지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2023. 11. 30. 06:50묵상하는말씀/여호수아서묵상

반응형

여호수아서 10:22~27 그때에 여호수아가 명령을 내렸다. "굴 입구를 열어라. 저 다섯 왕을 굴에서 끌어내어, 내 앞으로 데려오너라." 그들은 명령대로 그 다섯 왕을 굴에서 끌어내어, 여호수아에게로 끌고 왔다. 그 다섯 왕은 예루살렘 왕과 헤브론 왕과 야르뭇 왕과 라기스 왕과 에글론 왕이다. 그들이 이 다섯 왕을 여호수아에게 끌고 오자, 여호수아가 모든 이스라엘 사람을 불러 모으고, 그와 함께 전투에 나갔던 지휘관들에게 명령하였다. "가까이 와서, 너희 발로 이 왕들의 목을 밟아라." 그러자 그들은 가까이 나아가서, 발로 왕들의 목을 밟았다. 여호수아가 지휘관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마시오. 굳세고 용감하시오. 주님께서 당신들이 대항하여 싸우는 모든 원수에게 다 이와 같이 하실 것이오." 그런 다음에 여호수아는 그들을 쳐 죽여서 나무 다섯 그루에 매달아서, 저녁때까지 나무 위에 그대로 달아 두었다. 해가 질 무렵에 여호수아가 지시하니, 사람들은 나무에서 그들을 끌어내려 그들이 숨어 있던 그 굴에 던지고, 굴 어귀를 큰 돌로 막았다. 그곳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기온이 심상치 않네요. 찬 바람이 옷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입니다. 단단히 챙겨 입고 출근길에 나서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두려워 마세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옷을 입은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하세요. 주님께서 지키시고, 아름다운 길을 예비하신 그분의 손길을 믿는 우리이기에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옷을 입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전쟁의 참혹함은 글만으로도 눈을 감고 싶게 만들죠. 오늘처럼 전쟁의 승패를 나누며 단죄가 이루어지는 본문을 대할 때면, 이것이 아무리 성경이라 할지라도 묵상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가슴이 아픕니다. 아무리 적군이라도, 죽고 죽이는 전쟁은 결코 쉽게 용납될 수 있는 그런 행위는 아니죠. 다만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묵상함에 있어 전제를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시대적인 배경과 당시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대 전쟁에서는 적장의 시신을 전시하여 승리를 자축할 뿐만 아니라 승리자의 힘을 과시하는 용도로 많이 사용했다는 기록들이 있더라고요. 오늘 본문에서 적장의 목을 밟는 행위도 그와 같은 흐름의 모습인 듯합니다. 오늘날 이런 원시적인 전쟁의 행위들이 무자비하고 잔혹한 장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사실 현대적 전쟁은 훨씬 더 참혹하죠.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희생자들이 더 많고 도시는 폐허가 되죠.

 

아무튼 오늘 본문의 행위들은 고전적인 전쟁에 만연되었던 행위임을 인지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전제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거죠. 이때 우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적군을 비그리스도인으로, 싸워야 할 대상을 내 곁에 있는 이웃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주의해야 하죠. 성경에 나오는 적군들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나와 신앙이 다른, 혹은 나를 괴롭히는 이웃들로 대비하여 물리쳐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경향들이 있는 것이 좀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때론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호전적으로 만드는 잘못된 묵상들이 있죠.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의 전쟁은 우리 내면의 문제들과 싸우는 영적인 전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데 한 표를 던지고 싶습니다.

 

묵상은 모든 문제를 외부에 돌리고, 바뀌고 변화되어야 할 것들이 내가 아닌 타인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묵상은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죠. 나에게 말씀하시는, 나를 위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묵상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저건 누가 들어야 해'와 같은 생각은, 묵상의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로 오늘 말씀을 바라본다면 어떤 메시지로 우리에게 다가올까요?

 

어제 말씀드렸다시피 여호수아는 지휘관과 군사들을 격리시키는 작전을 펼칩니다. 그로 인해 오합지졸이 된 군사들을 쉽게 물리치. 이제는 고립되어 있던 왕들을 붙잡습니다. 그렇게 전쟁의 승패가 갈리죠. 그런데 우리 눈에 특이한 행동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생포한 가나안 왕들의 목을 밟게 만든 거죠. 이 행위는 고대 전쟁에서 승리자의 위상을 높이는 방법으로 쓰였다고 이미 말씀드렸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고전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가나안 왕들의 목을 밟는 이스라엘에게 한 여호수아의 말 때문이죠.

 

여호수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마시오. 굳세고 용감하시오. 주님께서 당신들이 대항하여 싸우는 모든 원수에게 다 이와 같이 하실 것이오."

 

저는 이 부분이 조금 어색했습니다. 이미 승리했잖습니까? 그리고 지금 발아래 가나안들의 왕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두려워 말라고 했을까요? 왜 지금 굳세고 용감하라는 말이 필요합니까? 저는 이 말씀이 지금 가나안 왕들의 목을 밟는 또 다른 목적이 담겨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행위는 단순히 승리를 자축하거나 승리자의 위대함을 높이려는 목적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죠. 더 나아가 누군가를 짓밟았다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원하는 바는 우리 안에 용기와 믿음이라는 거죠.

 

때로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섭니다. 때론 잘못된 습관들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죠. 그런데 우리는 곧 그 회개가 흐지부지 되는 것을 봅니다. 잘못된 습관들이 다시 돋아나는 것을 보죠.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합리론이 내 안에서 올라오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이 회개가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저는 회개가 훨씬 광범위한 시제를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진짜 회개는, 문제가 드러나고 잘못을 인정하면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태가 진정된 이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죠. 잘못을 인정한 이후 내가 그 잘못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그 잘못을 철저히 버리느냐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곧잘 짓밟는다는 문학적 표현을 쓰죠. 여호수아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모욕 주고 죽이는 것이 메시지가 아니라 나를 도우시고 살아계셔서 보이지 않게 움직이시는 그 손길을 바라보며 내 안에 있는 걱정, 근심, 두려움, 안 된다는 생각을 짓밟으라고 하시는 거죠.

 

전쟁은 이미 결판이 났습니다. 우리의 길은 이미 결정이 되었어요. 주님이 구원과 은혜의 길을 여셨고 생명과 축복의 깃발을 꽂으셨죠. 그러니 우리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렸죠? 믿음의 가장 큰 고백이 '나는 어차피 잘 될 것이다.'라는 것이라고요. 나를 지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나를 부르신 이도 하나님이시며 나를 끝까지 인도하실 이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믿고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는 것뿐이죠. 포기하지 않는 것, 멈추지 않는 것, 낙심하고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죠. 그러니 지금 내 눈앞의 일에 너무 두려워하지 마세요. 어떤 일이든 다 방법이 있고 해결될 것이니 용기를 가지세요. 무슨 일이든 주님께서 도우실 것이니 굳건하세요.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주님은 내 안에서 반드시 선한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