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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미가서묵상

미가서묵상일기 07 - 말씀이 살아 있음은, 그 말씀이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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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1:12~16   나 주가 예루살렘 성문에까지 재앙을 내렸으므로, 마롯에 사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으면서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린다. 라기스에 사는 사람들아, 너희는 군마에 병거를 매어라. 라기스는 딸 시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모레셋 가드 백성에게는 작별의 선물을 주어라. 악십의 집들이 이스라엘 왕들을 속일 것이다. 마레사에 사는 사람들아, 내가 너희 대적을 너희에게 데려올 것이니, 이스라엘의 영광인 그가 아둘람으로 피할 것이다. 너희는 사랑하는 아들딸을 생각하며, 머리를 밀고 애곡하여라. 머리를 밀어 독수리처럼 대머리가 되어라. 너희의 아들딸들이 너희의 품을 떠나서, 사로잡혀 갈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창밖으로 바람소리가 들립니다. 강한 한기가 느껴지네요. 강추위가 연일 계속됩니다. 오늘은 연휴를 마치고 출근하는 날이라서 더욱 차갑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그럼에도 우리 공동체 가족들에게는 기쁨과 기대로 가득찬 하루가 될 줄 믿습니다. 예전에는 외부 추위에, 상황과 환경에 나를 매어주었다면, 이제는 나로 인해 만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죠. 추우면 추운 데로 더우면 더운 데로 축복해 주는 우리에게 더 이상 외부환경은 우리를 흔들지 못할 줄 믿습니다.

 

지금 미가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의 메시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어제와 같은 비유와 풍자로 가득하죠. 그의 풍자를 일일이 해석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풍자의 깊은 뜻을 제가 모르는 것도 있고요. 또한 그런 풍자의 해석이 오늘 본문을 관통하는 주된 메시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풍자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위중하고 심각한 것인지를 알리려는 메시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중요하죠.

 

가령, 한 예를 들자면 모레셋 가드라는 지명이 오늘 등장하죠. 사실 원어에는 가드 모레셋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새 번역에서 이를 모레셋 가드라고 적은 이유는 그것이 온전한 지명이기 때문입니다. 가드 모레셋이 아니라 모레셋 가드가 정확한 지명인 거죠. 그런데 왜 미가는 잘못된 지명 이름을 사용했을까요? 물론 어떤 지명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어 헛갈릴 수 있죠. 그런데 미가가 어디 출신이라고요? 이미 미가서 1:1에 미가의 출신지를 적어 놓았죠. 거기에는 '모레셋 사람 미가'라고 떡 하니 적혀 있습니다. 모레셋이 미가의 고향인 거죠. 그러니 지명을 헛갈릴 수 없겠죠? 이는 일부러 그렇게 적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그 이유가 있겠죠? 모레셋과 모레셋 가드는 같은 지명입니다. 가드는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블레셋의 중심 도성이죠. 아마도 모레셋은 가드와 가까운 지역이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블레셋의 침공이 잦았던 것 같아요. 유대땅인데 블레셋지배를 받은 것이죠. 모레셋이라는 이름의 뜻이 소유물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가드의 소유물이라는 뜻으로 모레셋 가드라고 명명한 거죠. 미가를 소개할 때 모레셋이라고만 한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지금 모레셋은 유대땅인 것 같아요. 그런데 가드 모레셋이 된다는 말은 다시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죠. 이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수시로 침공을 받고, 수시로 타민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말이죠. 유대땅일 때는 늘 불안하고, 침공을 받고는 늘 차별을 받는 그런 고통이 모레셋 가드에 있는 거죠. 그것을 미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몰라도 실제 모레셋 사람들이라면 이 메시지가 끔찍했을 테죠.

 

이런 묵상을 하면서 저는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지, 주님의 말씀을 나는 어떻게 듣고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죠.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그 아픔과 위중함을 아는 모레셋 사람들은 강한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그 말씀이 어쩌면 전심으로 받아들여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메시지를 그저 그런 풍자로, 재미있는 언어유희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을 겁니다.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옛날이야기로 오늘 본문을 읽고 있는 저처럼 말이죠. 

 

풍자나 비유가 아니어도 그렇습니다. 직접적이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말씀하셔도 마치 나는 강 건너 불 구경하듯 말씀을 학식으로 대하고, 무슨 관념적 철학으로만 대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목놓아 부르짖고 나를 부르시는데도 혹시 나는 그것이 내 이야기가 아니라고, 그저 설교거리로, 누군가를 책망하는 소재로, 남 탓을 하는 재료로 사용하지는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향한 말씀으로 들리십니까? 주님의 말씀이 저 누군가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어떤 시대, 어떤 장소, 어떤 부류의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바로 지금, 바로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시나요? 말씀이 살아 있음은 그 말씀이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될 때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는 이유는 그 말씀이 나의 이야기이고, 내 안에 살아 숨 쉬는, 나를 움직이는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때, 그 말씀은 내 인생을 만드는 힘과 방패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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