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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66 - 내 중심이 오늘을 살게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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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3 형제자매 여러분, 신령한 은사들에 대하여 여러분이 모르고 지내기를 나는 바라지 않습니다. 알다시피 여러분이 이방 사람일 때에는, 여러분은, 이리저리 끄는 대로, 말 못 하는 우상에게로 끌려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맑은 하루가 예보되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영상 20도를 웃도는 기온이 된다네요. 벌써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화창한 봄날이 다 지나가기 전에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향긋한 봄내음도, 선선한 바람도, 소박하게 핀 푸른 풀잎도, 그렇게 내 마음을 녹이며 살며시 웃음 짓게 만드는 봄기운을 느껴보시기 바래요.

이제 고린도전서는 후반부로 접어듭니다. 12장에서는 성령으로 인한 은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신령한 은사란 곧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을 뜻합니다. 그 선물은 믿음의 공동체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필요한 달란트를 뜻하는 말이죠.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가장 큰 성령의 은사입니다. 사랑이 재능이라는 말이 어색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분명 사랑은 재능이고 은사입니다. 기쁨도 은사고, 친절과 온유도 은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사를 간구해야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가르치거나 돕거나, 혹은 다스리는 것도 성령의 선물이죠. 그런 각자의 재능이 있습니다. 그런 재능들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 나라죠.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런 성령의 은사에 대해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이 은사를 마치 자신의 잘남이나 우월한 능력으로 과시했던 이들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이 12장에 등장합니다. 이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오늘 본문은 성령의 은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 하나를 언급하죠. 이방인이었을 때,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을 때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그때 그들은 우상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다녔다고 지적하죠.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요. 우상에 심취한 모습이나 성령에 이끌리는 모습이 닮아 있다는 사실이죠. 아마도 우상에 끌려다니는 이들에게도 일정한 은사의 표증이 나타났던 모양입니다. 이런 모양이었을까요? 예언하는 것들이나 혹은 누군가를 지배하는 모습들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말에 무릎을 꿇고 꼼짝하지 못하는 모습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그렇죠. 점괘나 운세에 사로잡혀서 사는 이들도 있죠. 그 말들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도 합니다. 마음대로 아무 날이나 이사도 못 가고, 살 집조차 마음대로 고르지 못하죠.

이렇게 말한 바울은 3절에서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다'라고 하죠.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가 안 갑니다. 이 말은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 아니겠어요? 누가 그랬을까요? 말의 흐름으로 보아서는 우상에게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들은 왜 예수를 저주했을까요? 이는 아마도 로마 제국의 압박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로마는 신생 기독교의 존재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었죠. 그래서 지도자급 사람들을 잡아 박해를 했고 또 그들에게 이런 강요를 했던 것으로 보여요. 예수를 입으로 저주하면 살려주겠다고 말이죠. 마치 일제 강점기 시절 교회를 박해하던 모습과 흡사합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협박이죠. 아마도 신령한 은사를 가진 지도자들 가운데 그렇게 박해에 흔들렸던 이들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강압과 박해를 이겨낼 자신이 별로 없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 단단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요?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도 그런 현실에 서는 일은 우리의 정신력과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강압에, 압제에, 죽음의 공포에 맞서 당당하게 죽으라는 말로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겠습니다. 그런 것이 멋져 보일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강요하시리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신령한 능력이 어떤 외부적인 재능이 아니라는 뜻이죠. 정말 큰 성령의 은사는 바로 어떤 일에 처하든지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강조하시는 말씀이라 믿습니다. 신령한 은사의 중심은 그것이라고요. 어떤 상황이 와도 기쁘고 감사한 마음에 사로잡힐 수 있는 것, 그렇게 중심이 있는 삶이 성령의 삶이라고 말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라는 용기를 부르짖지 않겠습니다. 변절하지 말고 굳건하라는 말도 하지 않으렵니다. 저는 그럴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항상 기뻐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겠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만 붙들겠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만 간직하겠습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내 안에 평안을 추구하겠습니다. 그것을 중심에 놓겠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성령의 선물임을 믿습니다.

용기, 승리, 힘, 능력, 이런 것 다 몰라도 됩니다. 내 중심에 기쁨이 있으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내 중심에 감사가 넘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내 중심에 있는 기쁨이 어떤 나를 만들지, 내 중심에 세워진 감사가 어떤 미래를 걷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미래를 저는 오늘 기쁨과 감사로 세운 내 중심에 걸겠습니다. 그렇게 중심이 있는 삶을 살겠습니다. 오늘도 어떻게 살아야지 고민하지 마세요. 그저 내 중심을 세우세요. 내 중심을 감사와 기쁨으로 푯대를 꽂으세요. 그러면 내 중심이 오늘을 살게 할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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