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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70 - 은사는 사용하면 커지고, 순종하면 열매를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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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9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지나간 시간들은 지난 잠자리에 내려놓고 새로운 시간을 시작하는 마음으로 일어서는 아침이길 빕니다. 어제의 기분이 오늘까지 나를 붙잡지 못하도록 훌훌 털고 일어나세요. 마른 뼈가 살아나고 힘줄이 돋듯이 이 아침에 내 마음에 생기와 얼굴에 미소와 생각에 기대로 채우며 출발하는 우리 되길 기도합니다.

 

드디어 은사 같은 은사가 나왔습니다. 지혜와 지식, 그리고 믿음 같은 것들은 사실 은사라고 여기기 쉽지 않았죠. 우리가 알고 있는 은사는 오늘 본문처럼 병 고치는 은사, 즉 신유의 은사 같은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본격적인 은사들이 등장하나요? 앞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니 갈망하는 은사들이 줄줄이 나오죠.

 

이런 마음이 있으니 다시 한번 지혜와 지식, 믿음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은사인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주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은사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죠. 능력이라는 것이 순간적으로, 즉각적으로, 그리고 강력하게 일어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지금 드러나지 않으면 능력이 아닌 줄 알아요. 시간이 걸리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노력이라고 생각하죠. 그러고 보니 노력도 힘인데 노력은 마치 능력이 없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쯤으로 여기기 십상이죠.

 

꾸준히 한 우물을 파는 것도 은사이고, 성실히 그 자리에 있는 것도 은사입니다. 깨달음도 은사이고, 나눔도 은사예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늘 말씀 가운데 거하고, 그 말씀을 삶의 자리에 적용하는 것도 은사죠. 놀라운 것은 바울이 이런 은사를 먼저 언급했다는 점입니다. 지혜와 지식, 믿음을 먼저 말하죠. 그리고 오늘 본문부터 신유, 기적, 예언, 방언 등 우리가 잘 아는 은사들이 줄줄이 나오죠. 왜 놀랍다고 말씀드리냐면, 몇 주간 제가 이런 말씀을 나눴죠? 신앙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이죠.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나를 사랑해야 하고, 남이 잘 되기를 바라기 전에 내가 잘 됨을 인정해야 한다고요.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내가 좋은 마음과 좋은 감정을 갖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나를 지키는 은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내 안에 지혜와 지식, 믿음이 나의 마음을 지키고 감정과 기분을 좋은 쪽으로 유지하며 항상 기쁘고 감사한 마음을 품게 만드는 것만큼 큰 은사는 없다고 말이죠.

 

자! 그래도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해 알아봐야겠죠. 이는 이웃 사랑의 가장 근본적인 은사일지도 모릅니다. 남의 아픔과 고통을 직접적으로 해결해 주는 일일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야말로 즉각적 반응이 가능한 기적의 분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유의 은사는 특별한 이들에게 주어진 은사로 여겨지기도 하죠.

 

성경에는 많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그 장면들이 참 익숙해요. 사람들이 병 고치는 일에 그리 경계심이 없죠. 누군가 선지자라고 하고 선생이라고 하면 자신의 병을 들고 찾아가는 것이 당연지사처럼 빈번했죠. 아마도 그 이유는 당시 의학적 발달이 미비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찌 보면 병 고치는 능력은 의료행위의 일부분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문제는 오늘날에는 당시만큼 병 고치는 은사들이 활발하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은사가 사라진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일까요? 이 부분이 어쩌면 우리가 병 고치는 은사에 대한 새로운 마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대사회는 많은 의학적 발전을 이뤘습니다. 최근 100년 사이 과학적 발달은 어마어마하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동차, 컴퓨터, 통신기술들이 그렇죠. 앞으로는 AI 기술들이 우리 사회를 주도할지도 모릅니다. 의학 또한 그렇습니다. 해부학의 발달로 수술이 가능해지고 미생물 연구는 오랜 시간 인간을 괴롭히던 전염병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하게 만들었죠. 이런 의학의 발달은 어쩌면 주먹구구처럼 보이던 신유의 은사를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왔는지도 몰라요. 그렇게 현대 의학과 신유의 은사를 대립적 구도로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하죠.

 

그런데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정말 현대의학은 신유의 은사와 반대되는 것일까요? 페니실린을 만들어 많은 전염병 퇴치에 불씨를 붙였던 알렌산더 플레밍에게 진짜 신유의 은사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위해 연구의 연구를 거듭한 허준이 바로 신유의 은사로 가득한 사람 아니었을까요? 의학적 기술에 대한 적용방법에는 다른 견해들이 존재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학적 재능을 가진 이들은 어쩌면 남의 병을 고치는 은사로 채워진 이들임에는 틀림없다고 저는 믿습니다. 의학적 치료도, 약도 모두 병 고치는 은사의 결과물들이라고 저는 믿어요. 그러니 의사분들은 자신이 병을 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들임을 인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어디 의사들 뿐입니까? 우리 주위에는 마음의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로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울고 같이 웃어주는 이들 또한 병 고치는 은사의 주인공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로 인해 누군가는 위로를 받고, 누군가는 마음의 치유를 받기 때문이죠. 다림교육에서 어떤 아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나도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구나!"

 

어릴 적부터 사랑받아본 경험이 없는 이 아이는 아무런 연관이 없고 아무런 이득도 없이 그저 자신을 만나주고 가르쳐주고 이뻐해 주는 언니 오빠들을 보면서 마음의 치유가 일어난 거죠. 저는 다림교육에 멘토를 자처하는 모든 이들에게 병 고치는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합니다. 누군가를 돕는 일은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죠.

 

병 고치는 은사, 나에게도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당신, 그런 마음이 들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고,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 안에 작용하는 신유의 은사 때문입니다. 그 은사는 사용하면 커지고, 순종하면 열매 맺는 은사입니다. 은사는 특별한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아니, 내가 어쩌면 지금 특별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오늘 나의 은사가 새롭게 나에게 말을 거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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