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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74 - 포용력이 은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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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2:10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하는 은사를 주시고,


 

 

 

좋은 아침입니다. 연일 화창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좋습니다. 오늘은 최고기온이 30도 가까이 오를 것이라고 예보가 되어 있네요. 바쁜 일상 중이지만 마치 위로하듯 주시는 맑은 하늘과 햇살을 통해 포근한 주님의 품을 느끼는 하루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방언의 은사입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상태에서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형태를 말하죠.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방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요.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들은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죠. 그래서 방언은 기독교의 독특한 은사의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사건 때문일까요? 초대교회에서는 방언이 하나의 기준점이었던 모양입니다. 방언을 하고 안 하고 가 어떤 클래스를 나누는 기준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방언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아요. 한국교회에서도 한때 방언이 신앙의 크기를 대변하는 하나의 기준이 되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치 방언을 하면 성령이 있는 것처럼, 그렇지 못하면 성령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했던 때가 있었죠. 그래서 그랬는지 어떤 기도원에서는 방언을 가르치는 수업까지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못하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부끄러워하기도 했죠. 물론 방언을 자랑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가짜로 방언하는 이들도 있었죠. 어차피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니까요. 참 마음이 쓰린 그런 모습들이죠.

 

이처럼 방언을 무슨 성령의 표증처럼, 믿음의 표식처럼 여기며 자랑하게 된 연유는 은사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컸던 탓입니다. 은사는 자랑거리가 아니라 수고하고 봉사해야 할 직분이었거든요. 내게 할 수 있는 일이 많으면 할 일도 많아지는 법입니다. 내게 재능이 많으면 그 쓸 일도 많아지는 거죠. 그것은 남을 돕고 섬기고 사회가 돌아가게 하는 밑거름이 되죠. 그런데 재능을 무슨 남보다 우월한 표증으로 생각하게 되니 은사를 왜곡하는 겁니다. 갑질이라고 하죠? 갑질이라는 것은 내가 휘두를 권세가 있다는 건데요. 그 권세는 본래 남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주어진 권한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신의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의 것으로 착각해서 남들을 무시하고 짓밟는 데 사용하는 것이 갑질이죠. 자신이 왜 그 선물을 받았는지, 자신에게 왜 그 직분을 맡겼는지 모르는 것이죠. 이것을 도둑질이라고 하면 과한 표현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니까요.

 

이미 언급한 사도행전의 오순절 방언 사건을 잘 보면 한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방언이 각 나라의 언어였다는 점입니다. 그 자리에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 나라에서 온 유대인들이 있었죠.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 있는 사람들이, 좀 심하게 말하면 외국물 마셔본 적 없고 무식한 갈릴리 어부들이 자신들이 사는 나라의 언어, 그러니까 외국어를 능통하게 하고 있으니 안 놀랄 수 없었던 것이죠. 그것도 한 나라의 언어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언어로 말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점이 방언을 인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에요. 적어도 그 성령이 함께하여 방언하는 그 자리가 바로 전 세계의 자리가 되었기 때문이죠. 

 

언어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인종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유대인처럼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가진 민족들에게는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는 것이 목숨처럼 중요한 부분이었죠. 이것을 애국의 관점에서 보면 뿌듯하고 굳건한 민족애가 되지만 반대로 타국의 관점에서 보면 인종 혹은 민족적 차별이 됩니다. 우리나라도 백의민족이니 한민족이니 하는 말로 민족적 의식을 고취시킨 적이 있는데요. 이를 타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들만 똘똘 뭉치는 차별의식이라는 것을 지울 수 없습니다. 오순절 방언 사건은 단순히 외국어를 모르던 사람들이 외국어를 하는 신비한 현상이 등장하여 놀라운 사건이 아니라, 언어로 단절된 자국과 타국 사이, 자민족과 이방민족의 경계, 그 틀을 깨는 사건이었다는 데 주목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시자 세계 모든 민족이 한 가족이고 한 생명임을 밝히는 놀라운 일치의 사건이었다고 말이죠.

 

방언은 단순한 언어가 아니라 차별과 편견을 깨는 포용력입니다. 성경은 이를 이웃 사랑, 서로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죠. 포용력이 은사입니다. 이웃이 마음에 들어오고, 다른 이와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은사입니다. 나와 너의 틀이 깨지고 함께 주님의 자녀임을 선포하는 것이 은사입니다. 피부 색깔, 문화적 차이, 성별의 문제, 나이와 세대 간의 간극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같은 생명이며 같은 주님의 자녀,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습니다. 그 생명나무 아래에서 출발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근본이죠.

 

오늘도 내 안에 있는 큰 그릇을 보여주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나와 다른 이들도, 다른 생각도, 다른 모습도, 같은 생명, 같은 영을 넘어설 수 없으니까요. 서로 다른 말과 행동, 경험과 결과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며 그래도 같은 생명임을 존중할 때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운행하심이 커짐을 믿습니다. 그렇게 더 넓은 세계로 향하는 하루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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