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23~26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것은 주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것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식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시고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너희가 마실 때마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선포하는 것입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느덧 4월이네요. 오늘은 맑은 날씨가 예보되어 있습니다. 대기질도 그리 나쁘지 않네요. 여러분의 오늘 날씨는 어떨까요? 지금 어떤 예보가 내려져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미 이 아침에 여러분의 하루가 정해질지도 모릅니다. 예보된 날씨처럼 말이죠. 내가 예보한 날씨처럼 하루가 만들어질지도 몰라요. 맑고 청명한 기분을 예보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될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전하는 성만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가 전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대언하는 식으로 전해지는 데요. 예수께서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그들에게 당부하셨던 말씀이죠. 한마디로 성만찬을 표현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것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희생임을 알려주시는 예식이라는 뜻이죠.
성만찬의 의미와 분석은 다음 기회에 하겠습니다. 지금은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왜 바울은 성만찬에 대해 상기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초대교회는 모임마다 성만찬을 행했던 모양입니다. 식사와 함께 성만찬을 나눴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이제 식사와 교제에서 고린도 교회는 나뉨이 있었어요. 다함께 식사를 나누지 않았던 거죠. 그러다보니 성만찬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성만찬의 포도주로 취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그 성만찬의 의미가 고린도교회에서는 사라진 셈이 된 것이죠. 모양은 있는데 의미가 사라진 것을 형식주의라고 말하죠. 그야말로 떡과 포도주는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예수님께서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까맣게 잊은 모습이었던 겁니다.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성만찬의 의미를 다시 상기하게 만든 것이죠.
우리는 그런 것 없나요? 뭔가 하고는 있지만 왜 하는지 모르는 그런 행동 말이죠. 습관처럼 하지만 기대도 없고 바람도 없고 소망도 없이 그저 형식만 있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혹시 그것이 예배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기도나 묵상이 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죠. 어릴 적에 숙제 가운데 일기쓰기가 있었어요. 세상 제일 하기 싫은 일이 그 일기쓰기였습니다. 방학때면 그 숙제가 한껏 밀려서 하루동안 몇 주의 분량을 똑같이 적어 해치우는 경우들이 허다했죠. 생각해보면 일기숙제의 의미는 이런 것일 거예요. 일기는 하루를 돌아보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글로 표현하는 종합 교육의 표본이죠. 일기만큼 글쓰기 훈련에 좋은 도구도 없습니다. 글쓰기 뿐만 아니라 시간관리와 사고, 잘못된 일들의 반성과 새로운 다짐 등의 고차원적인 인격형성의 복합적인 훈련이 여기 다 들어있죠. 그것이 일기 숙제의 본래 의도였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글쓰기가 아니라 글자쓰기를 했고, 나를 돌아보는 일은 남의 일기장을 베끼는 것으로 둔갑했죠. 사고는커녕 단순 작업 일색이고, 매일매일이 아니라 하루에 몰아서 해 버렸죠. 분명 일기장은 완성했는데 그 의미나 뜻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주어지는 복은 하나도 없었죠.
문제는 우리가 무언가를 하면 그것에 대한 의미도 갖는 줄 안다는 겁니다. 내가 일기장을 베끼든, 훔치든, 혼나지 않고 제출하면 마치 내가 쓴 것처럼 착각한다는 거죠. 그러면 글 재주도 생기는 줄 알고, 내 자신이 뿌듯해지고 한다는 거죠. 가끔 운동을 하죠. 한달에 한번쯤, 그러고도 그는 자신이 운동을 한다고 믿는다고요. 이런 경우를 착각은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바울은 이에 대한 적절한 말을 한 적이 있죠. 이 말씀입니다.
고전9:27 나는 내 몸을 쳐서 굴복시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 나서 도리어 나 스스로는 버림을 받는, 가련한 신세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조금 거칠게 이 말씀을 해석하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요? 남에게는 복음을 전했는데 정작 자신은 그 복음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미련함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남에게는 좋은 말, 좋은 충고, 좋은 소리를 늘어놓지만 정작 자신의 생각은 늘 부정적인 것에 매여있고, 남을 위해서는 기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기도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사람처럼 말이죠. 예배에 참여는 하면서도 이 예배에 참여함이 어떤 축복으로 다가올지, 내가 엎드려 기도하는 것이 어떤 응답으로 되돌아 올지,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어떤 미래에 영향을 줄지 알지 못해서 결국 그리스도인이었으나 그리스도인의 축복을 얻지 못하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 아닐까요?
저는 바울이 자신의 몸을 쳐서 굴복시킨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몰랐는데요. 드디어 오늘 찾았습니다. 바로 오늘 주신 본문에서 말이죠. 그것은 [기억]입니다. 그분이 우리 창조주임을, 우리 아버지임을 기억하는 것, 그분이 우리의 구원자임을 기억하는, 그분은 우리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고, 그분은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시며, 그분은 우리를 위해 당신이 먼저 싸우시는 분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늘 새로운 기회를 주시고, 나에게 늘 문을 여시며, 사막에 물을 내시고, 광야에 길을 만드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죠. 그것을 바울은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 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죠. 저절로 그런 기억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신을 쳐서 굴복케 해야 할 만큼 힘든 일이라는 뜻이죠.
나이 이야기 해서 어른들께는 죄송하지만 제가 나이가 드니 가장 힘든 것이 기억이에요.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잘 잊습니다. 자꾸 잊으니까 사람들이 제게 기록을 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기록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록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군요. 그 기록을 보지 않으면 기록한들 기억해 낼 방법이 없더라고요. 수첩에 적는 분들 많으시죠? 그런데 적고는 그 수첩을 볼 일 없으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그저 기록일 뿐이죠. 기록은 누군가가 봐야 비로소 기억이 되니까요. 그리고는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억이라는 것이 단순히 한번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죠. 한번의 기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떠올라야 하죠. 계속적으로 느껴야 합니다. 다시말해 반복이 되어야 기억이 남아있는 법이죠. 그래서 기억은 반복이라고 저는 느낍니다. 그 반복의 훈련을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서 굴복케 하는 것이라고 한 거죠.
운동도 반복의 힘에 있습니다. 생각도 반복의 힘에 좌우되고요. 느낌이나 감정도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기억되기 때문이죠. 운동이 내 몸에 새기는 반복의 글씨라면 생각은 내 영에 새기는 반복의 기록입니다. 내가 좋은 생각을 반복하면 그 좋은 생각이 내 영이 되고 내 몸이 되죠. 내가 좋은 느낌을 반복적으로 가지면 그 느낌이 내 주위와 분위기를 바꿉니다. 그래서 매일 우리는 몸을 쳐서 복종시키듯 내 몸과 생각에 좋은 생각과 감정과 느낌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아주 작은 것도 반복적으로 하면 큰 능력이 되죠. 그래서 이 아침에 작은 묵상을 하는 거죠.
큰 돈 갑자기 못 법니다. 작은 돈들이 반복적으로 내게 들어오면 큰 돈이 되죠. 큰 능력 단번에 가질 수 없습니다. 작은 습관이 반복되다보면 그것이 능력이 됩니다. 갑자기 작가가 될 수도, 예술가가 될 수도 없어요. 오늘 작은 연습이 반복될 때 어느덧 내 앞에 작가나 예술가가 서 있게 되죠. 그렇게 우리는 작은 반복의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은 작은 반복의 힘으로 하는 겁니다. 우리가 축복을 누리는 것도 작은 복에 감사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큰 기적도 맛보죠. 그러니 지금 작은 반복의 힘을 믿으세요. 반복이 기억을 낳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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