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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고린도전서묵상

고린도전서 62 - 우리에게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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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1:17~22   다음에 지시하려는 일에 대해서는 나는 여러분을 칭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유익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여러분이 교회에 모일 때에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하기야 여러분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여러분 가운데 파당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이 분열되어 있으니, 여러분이 한 자리에 모여서 먹어도, 그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먹을 때에, 사람마다 제가끔 자기 저녁을 먼저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합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야 하겠습니까?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습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여러분의 첫 표정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저는 오늘 일어나 맨 먼저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늘 그렇죠.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제 표정이 어떤지 궁금했어요. 마치 하나님께서 저를 보며 물으시는 것 같더라고요. '너의 지금 기분이 어떠니?' 하고 말이죠. 그러고 보니 제가 무표정이더라고요. 그래서 일부러 밝게 웃으며 표정을 바꿨습니다. 그리곤 화장실에서 거울에 비친 제게 웃어주었어요. '오늘도 네게 바라는 대로, 기대하는 대로 주님의 은혜가 넘칠 거야~'라고 축복을 하면서요. 아무것도 아닌데 훨씬 기분이 나아졌습니다. 지금 묵상하는 자리까지 제 얼굴에는 미소가 남아 있더라고요. 여러분의 아침도 미소로 시작되기를 빕니다.

 

아마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들은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오늘 본문은 작정하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쓴소리를 내뱉고 있는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이들이 서로 파당을 짓고 끼리끼리 갈라져 있다는 것이죠. 본래 고린도 교회는 모여서 함께 식사를 나누고 예배하는 순서를 가졌죠. 식사는 각자가 집에서 준비를 해 왔던 모양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만찬 때 이런 모양으로 식사를 나누곤 했죠. 어느덧 그런 식사 교제를 나눈 것이 옛 추억이 되어 가고 있네요. 대면 예배를 시작했지만 아직 식탁 공동체로서의 교제는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많습니다. 이 또한 회복되리라 믿습니다. 

 

이 식사 준비는 주로 부유한 이들의 몫이었던 모양이에요. 가난한 이들이 준비하기는 힘들었겠죠. 그런데 이들이 이전에는 모여서 부유하든 가난하든 할 것 없이 함께 나누며 식사를 하고 함께 예배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들이 자기끼리 먹고 마시게 된 것이죠. 그래서 가난한 이들은 함께 식사조차 못했던 겁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는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더욱 뚜렷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초대교회가 위대했던 이유는 주인과 종이 함께 교인이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죠. 그들의 주종관계가 교회에서는 평등한 관계로 자리 잡았으니 어찌 놀랍지 않겠습니까? 주로 주인 그룹은 교회에 먼저 오게 되었죠. 음식도 종들이 준비해 주었겠죠? 그 때문에 종들은 뒤치다꺼리를 하고 오느라 늘 교회에는 주인 그룹보다 늦게 왔습니다. 그래도 주인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다 모인 이후 식사를 나누며 서로 동등하게 입을 맞추고 교제를 했던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이었죠. 그런데 그 모습이 사라진 겁니다. 먼저 온 주인은 종들을 기다려 주지 않았습니다. 자기들끼리 배불리 먹고 음식을 남겨주지도 않았어요. 계층이 사라지고 차별이 소멸되었던 교회의 모습을 잃은 것이죠. 바울은 이 부분에서 분개를 금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매너리즘(mannerism)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래되어 굳어진 좋지 않은 버릇'이라는 뜻의 말인데요. 이게 본래는 예술 관련 전문용어였다고 하죠.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기법들이 어느덧 습관적으로 쓰이고 형식주의에 빠져 신선감을 잃어버리는 과정을 의미하는 말이었다고 해요.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습성이죠. 다짐과 열정의 첫 마음은 사라지고 어느덧 그저 마지못해 흘러가는 시간처럼 바뀔 때가 있어요. 아무리 크고 좋은 것이라도 그 감동이 계속 머물러 있지는 않죠. 흐미한 기억으로 남든 잊히든 처음 마음과는 다른 우리들을 보게 됩니다.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왜곡되어서 처음 생각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기도 하죠. 그래서 참 어렵습니다. 이것이 적응된 것인지 아니면 잊은 것인지조차 헛갈릴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만찬을 나누는 음식도 그렇죠. 처음에는 누군가를 대접하고 섬기는 마음에 있는 실력 없는 실력 다 동원해서 준비하고 만들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대충 사서 그 시간을 때울 때가 있죠.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할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르며 귀찮아하고 '이걸 왜 해야 하나?' 불평이 몰려오는 경우도 허다하니까요.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 하죠.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첫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믿고, 첫 축복에 목숨까지 내놓을 듯 감사했지만 이제는 그 정도로는 마음에 차지도 않는 우리 모습 가운데서도 예배는 계속되고, 믿음은 유지되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제가 교회에서 매일 물 주는 일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최근 잎이 나는 화분들을 보면서 감격하고 있는데요. 이렇게 생명을 이끄는 일에 꼭 필요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그것이 꾸준함입니다. 꾸준함이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이 또 노오력~하라는 말인가? 죽어라 공부하라는 말인가? 하죠? 그런데 제가 말하는 꾸준함은 그런 노력과는 다른 것입니다. 프랑스 동화작가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는 사람]에 보면 한 양치기가 나옵니다. 그는 사막 같은 황무지에 도토리를 심어요.  하루 종일 도토리를 심는 것이 아니죠. 그저 하루에 열 개씩 꾸준히 그 일을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그 황무지는 숲으로 변하죠. 그는 땀을 흘리는 열정도, 죽어라 일하지도 않았어요. 그저 자기가 가는 길에 매일, 꾸준히, 도토리를 심었을 뿐입니다.

 

꾸준함이 위대한 결과를 냅니다. 인생에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면 그것은 놀라운 집중력도, 엄청난 실력도 아닙니다. 작지만 꾸준함, 느리지만 꾸준함, 그것이 가장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 힘이에요. 월등한 재능이 있는 천재가 되고 싶으신가요? 그런 재능이 있으면 좋겠죠. 그러나 꾸준함 없는 천재는 이미 천재가 아닙니다. 단번에 쌓은 명성은 쉽게 허물어지기 마련이죠. 갑자기 신앙도 없고, 갑자기 은혜도 없습니다. 물론 갑자기 축복도 없어요. 여러분의 감사가 갑자기 있던가요? 그런 감사는 한순간에 잊히죠. 꾸준함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매일 꾸준함이 필요해요. 기도의 응답을 바라시고 기도하시나요? 그렇게 몇 시간을 기도해도 매일 단 1분 하는 꾸준함의 기도를 이기지 못합니다. 며칠간 하루 종일 열리는 부흥회에서 목이 터져라 찬양하고 기도해도, 매주일 공동체 예배에 빠짐없이 꾸준히 엎드리는 것보다 낫지 않아요. 어떤 세미나에서 단기 신학공부를 하는 것보다 매일 아침 꾸준히 말씀 묵상하는 것이 나를 성장시키는 데 훨씬 큰 힘을 발휘하죠. 그렇게 꾸준히 책을 읽고, 꾸준히 누군가를 만나고, 꾸준히 나의 재능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나무가 하루 아침에 자라지 않죠. 근육이 하루아침에 불끈하지 않아요. 사람도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아요. 매일 조금씩 물을 주듯이, 매일 일정한 운동을 하듯이, 매일 작은 미소, 좋은 생각, 밝은 한마디 말, 꾸준한 기도와 묵상이 나를 만듭니다. 노오력~말고 꾸준하세요. 한 번에 포텐 말고 작지만 꾸준하세요. 듬성듬성 뜨문뜨문하지 마시고 꾸준하세요. 꾸준없이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H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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