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2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여러분에게 문안드립니다. 또 각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아울러 문안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사람들의 주님이시며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고린도전서 묵상을 시작합니다. 고린도전서 묵상에 앞서 역사적인 배경과 설명이 필요하지만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는 곳곳에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죠. 다만 한 가지,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고린도에 보내는 서신은 그냥 보내는 안부 편지가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에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고 조언하고자 보낸 긴급한 편지임을 우리는 감안해야 합니다. 초대교회는 아직 변변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고, 질서를 세울 교리나 규율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신학적 기반도 부족해서 조금은 우왕좌왕하는 상태에 있었을 시기입니다. 그런 와중에 곳곳에서 사건들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선이 없는 상황에 각종 이단 사설들이 등장하고 헛갈린 해석들이 분분한 상태였죠. 이를 해결하고자 바울은 직접 갈 수 없으니 급하게 편지를 보내서라도 도움을 주고자 했던 것이죠. 그러다 보니 당시의 문화와 삶의 제한된 언어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의 사고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서 조금은 더 묵상의 깊이를 더해야 하고, 이해와 해석을 동원해야 합니다. 말씀을 우리의 상황에 거듭나도록 끌고 오는 것이 우리가 말씀을 읽는 태도이고 실력이기도 합니다. 그런 열린 마음으로 이 묵상을 시작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통상적인 인사말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쓰는 편지인지, 그리고 수신자들에게 인사와 안부를 묻는 것은 서신의 기본이기도 하죠. 바울은 그의 모든 서신에서 익히 수신자들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요. 거룩한 성도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이들, 자신과 한 공동체로 함께하는 이들이라는 식의 구분을 짓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한 형제로, 한 자매로, 한 식구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런데 이것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그는 유대인이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입니다. 유대인들은 특별한 자신들의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죠.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말은 일면 축복의 말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차별과 우월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만의 집단이 있었고, 자신들이 속한 집단만이 온전하고 완벽한 집단이라는 특권의식이 팽배했습니다. 바울도 다르지 않았죠. 그런데 그런 그가 이제는 다른 이들과 가족이 되었습니다. 이젠에는 국한된 집단이었다면 이제는 팽창되는 집단으로 자신의 자리를 바꾼 것이죠. 아마도 그 집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모든 사람들은 그의 가족이 되었을 테니까요.
저는 우리의 생각이 그래야 한다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세계관은 넓어지는 세계관입니다.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멀리 보면 멀리 볼수록 더욱 넓어지고 커지는 세계관이죠. 늘어나고 커지는 세계관입니다. 반면 나만의 세계관은 늘 좁아집니다. 잘라내고 쳐내는 세계관이죠. 그래서 점점 작아지고 점점 좁아집니다. 그렇게 차별과 우월, 소수와 1등의 세계관이 되죠.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좁은 문이라는 말을 착각하는 것 같아요. 좁은 길, 좁은 문은 나 혼자 남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이야 말로 더 많은 사람들과 더 큰길을 걷는 문이죠. 반면 넓은 문과 길은 나 혼자 남는 길입니다. 그래서 길이 커 보이는 것일까요? 그러나 결국에는 혼자만의 길이 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소스데네도 그렇습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름이 사도행전에도 나오는데 이 두 인물이 동일인인지는 학계의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만약 동일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바울이 전도여행을 했던 당시 고린도 지역의 회당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린도에서 전도를 하던 바울을 유대인들이 고소를 한 사건이 있는데요.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은 회당의 지도자였던 소스데네를 잡아다 폭행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바울이 회당에서 전도하는 것을 방조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소스데네도 바울을 따라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그는 유대인을 잃었지만 전 세계인을 얻었습니다. 갇힌 세계관에서 열린 세계관으로 나온 것이죠.
믿음이 그렇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점점 더 닫힌 쪽으로 갑니다. 제한되고 국한된 이념들을 만들고, 교리를 만듭니다. 규율과 법으로 옭아매고 안 되는 것들을 나열하며 자기 스스로를 옥죄이죠. 그들의 생각은 늘 가능성보다는 위험성을 말하고, 이해보다는 꼬투리를 잡는 데 열을 올립니다. 좋게 보는 생각보다는 나쁘게 먼저 보고, 칭찬하기보다는 깎아내리기 급급하죠. 점점 좁아지는 시야는 스스로를 숨 막히게 합니다. 해방을 줘야 할 믿음이 오히려 자유 없는 감옥을 쌓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가 밝았어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정말 무궁한 가능성이 펼쳐질 시간들이 앞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간 앞에서 이렇게 말하죠. 작년과 다르지 않다고 말이죠. 그저 그런 시간일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나의 시간을 과거에 묶고 좁게 보는 시선은 아무런 희망도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지도 모릅니다. 우리 조금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갑시다. 친구는 더 많아지는 쪽으로 나가세요. 그래야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사람들이 많아지니까요. 할 일들은 더 많은 쪽으로 달려가세요. 그래야 가능성의 확률이 더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더 크고 넓게 합시다. 그래야 더 많은 것 가운데 선택의 기회가 오기 때문이죠. 조금만 더 생각을 넓혀 보세요. 조금만 더 멀리 보시고, 조금만 더 가슴을 열어보세요. 내 생각이 넓어지면 더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고, 더 가슴을 펴면 더 많은 사랑을 품게 될 거예요. 올해는 조금만 더 열린 공간으로, 넓은 곳으로, 멀리 보고 걷는 한 해가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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