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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하는말씀/사무엘서묵상일기

사무엘서묵상일기166 - 내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해 줄 사람도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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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1:5~13   얼마 뒤에 그 여인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 다윗에게 사람을 보내서, 자기가 임신하였다는 사실을 알렸다. 다윗이 그 소식을 듣고는, 요압에게 전갈을 보내서, 헷 사람 우리야를 왕궁으로 보내게 하였다. 요압이 우리야를 다윗에게 보내니, 우리야가 다윗에게로 왔다. 다윗은 요압의 안부와 군인들의 안부를 묻고, 싸움터의 형편도 물었다. 그런 다음에 다윗은 우리야에게 말하였다. "이제 그대의 집으로 내려가서 목욕을 하고 쉬어라." 우리야가 어전에서 물러가니, 왕은 먹을 것을 함께 딸려서 보냈다. 그러나 우리야는 자기 상전의 종들과 함께 대궐 문간에 누워서 자고, 자기 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다윗은 우리야가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원정 길에서 돌아왔는데, 왜 집으로 내려가지 않는지를, 우리야에게 물었다.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장막을 치고 지내며, 저의 상관이신 요압 장군과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고, 나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님이 확실히 살아 계심과, 또 임금님의 생명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런 일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에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날도 저물었으니, 여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그러나 내일은 내가 너를 보내겠다." 그리하여 우리야는 그날 밤을 예루살렘에서 묵었다. 그다음 날, 다윗이 그를 불러다가, 자기 앞에서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였다. 그러나 저녁때에 그는 여전히 왕의 신하들과 함께 잠자리에 들고, 자기 집으로는 내려가지 않았다.


내용은 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다윗의 부정으로 밧세바는 임신을 하죠. 이거 어디선가 많이 본 막장드라마 같은 느낌입니다. 언제나 범죄는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의 잘못을 덮기 위해 또 다른 잘못을 동원되는 것이 쌓여서 범죄가 형성되는 거죠. 그것이 반복되면 될수록 죄는 더 치밀해지고 잔혹해집니다. 다윗이 딱 그렇습니다. 남의 아내를 몰래 범했는데 이게 들통날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를 이제야 걱정하는 것을 보니 안 들킬 줄 알았나 봐요. 우리 모두가 그렇죠. 자신의 잘못은 안 들킬 줄 알고 합니다. 어디 들킬 것을 미리 안다면 잘못인 줄 알면서 하겠습니까? 이상하리만큼 잘못된 생각은 허황된 용기를 동반하죠. 내가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를 줄 압니다. 아무도 안 보도, 아무도 듣지 못할 줄 알죠. 

 

이제 마음이 급해진 다윗은 머리를 짭니다. 어떻게 가릴 방법이 없으니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불러 아내와의 시간을 갖게 하죠. 그러니까 이는 밧세바의 임신이 남편에 의한 것으로 속이려는 의도입니다. 참 이럴 때는 머리들이 기발해요. 이 또한 신기합니다. 잘못된 생각은 참 치밀하고 세심하죠. 어쩌면 완전히 덮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야는 아내에게 가지 않아요. 아직 전쟁 중이기에 자신만의 휴가를 누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완벽한 계획은 깨집니다.

 

저는 이 치졸한 범죄 사기극이 불편합니다. 말하기도 싫어요. 그렇다고 이 범죄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너무나 확실하고 어쩌면 너무도 일반적인 이 범죄의 형태이기에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다들 아실 것으로 파악되기에 긴 설명을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다윗의 치졸한 범죄 행각입니다. 그런데 그 범죄의 구성이 다윗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메시지의 핵심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안에도 그와 같은 불편한 흑심들이 있고, 또한 자신이 저지른 일을 회개는커녕 가리기에 급급한 형태의 반응이 너나 할 것 없이 다 깔려 있습니다. 이 범죄의 현장을 목격하는 것이 내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으로 다윗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그런 내 안에도 있는 추악한 민낯을 보게 되는 것이 어쩌면 불편한 것일지도 몰라요.

 

그럼에도 저는 우리가 다 아는(그런데 잘 말하지 않는) 이런 추악한 모습을 잠시 뒤로하고 연속해서 한 주제의 메시지를 읽습니다. 며칠간 계속해서 우리의 귀를 때리는 메시지죠. 그것은 11장의 첫 서두부터 등장한 말입니다.

 

삼하 11:1  그러나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다윗이 함께함을 떠나 홀로 있는 순간에 찾아온 은밀한 죄의 유혹, 이것이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숨어있는 메시지처럼 들려요. 오늘 본문에서도 그 메시지는 계속됩니다. 그 메시지를 다시 들려주는 구절은 11절입니다. 

 

삼하 11:11   우리야가 다윗에게 대답하였다.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모두 장막을 치고 지내며, 저의 상관이신 요압 장군과 임금님의 모든 신하가 벌판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만 홀로 집으로 돌아가서, 먹고 마시고, 나의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임금님이 확실히 살아 계심과, 또 임금님의 생명을 걸고 맹세합니다. 그런 일은 제가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야에게 휴가를 주며 아내와의 시간을 보내길 바랬던 다윗의 계획은 우리야의 거부로 무산되었습니다. 그가 집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죠. 다윗이 그 연유를 묻는 질문에 대한 우리야의 답변이 바로 11절입니다. 그는 자신이 집에 갈 수 없는 이유를 말한 것인데요. 그게에 주목되는 문장이 있죠.

 

"어찌 저만 홀로 집에 갑니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누군가 그랬죠? 아리스토텔레스던가요? 코로나 시대를 맞으며 우리에게 당면한 최대 위기는 바로 이 사회적 관계입니다. 현존하는 미래학자들은 인류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명제가 바뀔 것을 예측하죠. 그만큼 함께하는 사회, 공동체성의 지속이 어려운 시기입니다. 산업은 언택트(비접촉) 시대의 다양한 분야로 구상되어 가고, 혼족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죠. 가상현실이 우리의 삶의 주류가 될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메타버스(가상현실) 산업이 급성장 중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사회가 전개될지, 또한 어떤 사회가 펼쳐질지 그 미래를 알 수 없어요. 그러나 어떤 현실이 오든 하나님은 당신과의 협력과 교제를 위해 우리를 만드시고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오리지널 디자인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요. 또한 그렇게 현실에서의 교제를 우리의 일상으로 두셨고, 거기다가 교제와 협력의 영이신 성령을 주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하셨다는 사실은 현재 보이는 현실의 흐름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혹시 이를 두고 보수적이라는 판단을 하셔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본질은 연합에 있다는 사실을 저는 확신합니다. 주님과 더불어,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이 창조하신 세계의 기초라는 생각을 저는 지울 수 없어요.

 

어려운 이야기 할 필요도 없습니다. 허망하게 쓰러지고 추락했던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든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은 능력과 달란트가 있는 인물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처음부터 독재자는 없고, 처음부터 계획된 범죄자는 없어요.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셈인데요. 그 '하다 보니'가 중요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자기만의 세계에 빠지고, 어느 순간부터 구별 짓고 차별하는 단계에 이르며 독재와 독단, 자기 확증과 편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느끼는 순간, 자신은 위대한 지도자가 되고,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느끼는 순간, 교만과 편견이 자리 잡죠. 그렇게 더불어 함께 하는 마음과 습관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 안에 나도 모르는 죄가 싹터요. 그때부터가 무너지는 때입니다. 보수니 진보니 각각의 이념 가지고 싸우는 이들이 있죠? 어떤 이념을 갖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이념이 남과 구별되고 차별하며, 더불어 함께 일치를 두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자기 합리화이자 편견이고 아집일 뿐입니다. 거기에 사랑과 평화는 없어요. 단지 전쟁과 암투만 있을 뿐이죠. 그렇게 홀로는 무섭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나는 더불어 사나요? 조금만 걸려도 얼굴을 돌리고, 조금만 귀찮아도 손절을 하는 나는 아닌가요? 함께하려는 개선보다는 버리고 새로운 관계로 채우려는 모습은 아닌가요? 좋은 눈으로 보기보다는 나와 비교하며 가치판단을 하지는 않나요? 그렇게 점점 나 이외에는 아무도 두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듣지 않으려 하지는 않나요? 그래서 책도 읽지 않고, 묵상도 하지 않고, 나눔도 갖지 않는 모습이 되지는 않으신가요? 오직 자기가 원하고, 자기감정에만 충실한 것만을 곁에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게 홀로를 즐기며 살지는 않나요? 

 

죄송한 이야기지만 힘이 좀 있고 살만할 때는 그렇게 혼자여도 괜찮아 보여요. 그런데 힘이 없고 연약해질 때, 현실적으로 내가 아프고 근심이 쌓일 때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이 하나 없고, 아니 기도 부탁할 사람 하나 없고, 나의 괴로움을 함께 나누려 찾아갈 사람 하나 없는 자신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해 줄 사람도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홀로를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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